1999년 11월에 아폴로 박사로 알려진 조경철 박사가 북한에 있는 동생을 만나러 가는 다큐멘터리를 제작했다. 형제 단 두 사람이 만났으나 최초의 민간 차원 이산가족 만남이었고 북한당국이 남한방송사의 방북을 공식적으로 인정해준 최초 사례이기도 하다. 꽉 막힌 남북관계가 언제 트일지 알 수 없지만, 18년 전 당시의 치열했던 방북 제작 과정을 되돌아보면서 ‘햇볕’ 찬란한 새 봄을 기다려본다. -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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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러 밀반출 작전

반세기 만에 형제가 만나는 역사적 사건에도 꼭 필요한 것은 ‘돈’이었다. 돈은 ‘평화’를 위해서 필요하고 ‘민족’을 위해서도 필요했다. 조경철 박사의 이산가족 상봉 프로그램 제작의 알파와 오메가는 사업비였고, 그 첫 관문이 김포공항을 통해 달러를 반출하는 문제였다.

1999년 11월 하순 어느 날, SBS 출입 기자를 통해서 김포공항 VIP통관을 예약했다. VIP통관은 일반인 통관과 다르게 절차가 까다롭지 않아서 달러 반출이 쉬울 거라는 기대 때문이었다. 고급스럽게 꾸며진 VIP룸에 잠시 대기하는 동안 후배 김PD와 나는 달러를 가방에서 꺼내 각자 재킷과 바지 호주머니 속에 숨겼다. 그리고 두툼한 코드를 걸쳤다. 외견상으로는 달러를 감춘 것을 아무도 눈치 챌 수 없었다.

“이쪽으로 오시죠!”

말쑥한 정장 차림의 공항 세관원이 우리를 안내했다. 초조한 기색을 감추려고 나는 진짜 VIP처럼 위엄 있게 걸었다. 이런 허풍은 불과 30초도 지나지 않아서 깨지고 말았다. VIP 통로에도 일반인과 똑 같은 검색대가 설치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승객은 단 둘 뿐이니 훨씬 더 세밀하게 검색할 것이 뻔했다. VIP통로에 대기하고 있던 세관원들의 눈빛은 국익을 위해 외화 밀반출을 방지해야 한다는 투철한 사명감으로 불타오르고 있었다.

“한 분씩 들어오세요!”

점심시간을 빼앗긴 여성 세관원이 시간 없다는 듯 빠른 말투로 나를 불렀다. 그 기세에 벌써 주눅이 들었다. 평소에도 간이 콩알만한 나였다. 쿵덕거리는 심장 박동 소리가 들릴세라 조심스럽게 검색대를 통과했다.

“삑!”

경보음이 울리자 온 몸에 냉수를 끼얹은 것처럼 체온이 급강하했다. 세관원이 무엇인가 발견한 듯 바짝 다가와서 다그치듯 말했다.

“양 팔을 드세요!”

달러 뭉치를 재킷의 오른편 안쪽 주머니와 바지 오른편 뒤쪽 주머니에 넣어 두었다. 팔을 들고 눈을 감았다. 세관원이 왼편 가슴의 위로부터 바지 아래까지 훑어 내렸다. 그리고 등 뒤로 가서 왼편부터 바지 아래로 훑어 내렸다. 입안이 바싹 타 들어갔다.

“됐어요, 들어가세요!”

나는 무뇌 인간처럼 멍청히, 그리고 신속히 검색대를 벗어났다.

“다음 분 들어오세요!”

“삑!”

김PD가 검색대를 통과하자 더 큰 경보음이 울렸다. 뒤를 돌아보니 그의 얼굴이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이리 와서 앞에 서세요!”

세관원은 이제야 뭔가를 발견한 듯 자신 있는 목소리로 김PD를 재촉했다. 김PD가 기계적으로 양팔을 벌렸다. 그녀는 검색봉을 김PD의 왼편 가슴 위에 갖다 대었다.

‘걸렸구나.’

순간 체념했다. 현기증이 났다. 아까 김PD 달러 뭉치를 재킷의 왼편 가슴 안쪽에 넣는 것을 봤기 때문이다. 그런데 소리가 나지 않았다. 세관원이 다시 가슴 오른편에 검색봉을 갖다 대려는 찰나 팀장인 듯한 사람이 소리쳤다.

“뭐해 빨리 보내드리지 않고. 바쁜 분들이잖아!”

우리는 세계에서 가장 엄격하다는 김포공항 검색대를 무사히 통과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김PD는 VIP 대기실에서 재킷 왼편에 넣어두었던 달러를 오른편으로 옮겨 놓았다고 한다. 달러 반출 때문에 한 달을 고민했는데, 예상 외로 간단히 해결되었다. 누가 잘못한 것인지,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지금도 정확한 판단이 안 되지만, 최초의 이산가족 상봉 프로젝트는 처음부터 살얼음판을 건너 듯 아슬아슬하게 진행되었다.

“먼저 담보금을 제시하시오”

회화나무 가로수조차 뜨거운 햇살을 힘들어 하며 지쳐버린 1999년 8월의 베이징. 달러 반출 석 달 전이었다. 나는 어설픈 지도만 들고 낯선 거리를 헤매다가 겨우 자오양취(朝陽區) 북한대사관 부근 해당화식당을 찾았다. 식당 2층 귀빈방에서 김 참사와 리 지도원이 일찌감치 기다리고 있었다. 시골 농부 스타일의 김 참사는 40대 초반, 얼굴이 검지만 눈빛이 살아있는 리 지도원은 30대 중반으로 보였다.

“늦어서 미안합니다. 식당을 찾지 못해서 한참 헤맸습니다.”

“괜찮소, 오 선생. 작년 5월에 평양 다녀갔다는 얘기는 들었소. 통일을 위해 좋은 일 많이 하신다고요.”

“저야 뭐 초보자입니다. 잘 부탁합니다.”

약간의 거드름을 피우는 그들에게 최대한 예의를 갖추고 이산가족 찾기를 비롯한 열 가지의 사업을 제시했다. ‘남녀축구 교환경기’, ‘교예단 순회공연’, ‘서울-평양 새천년맞이 제야의 종 타종’, ‘고구려고분 벽화 다큐멘터리’, ‘북녘요리 기행 다큐멘터리’, ‘백두산 야생호랑이 다큐멘터리’, ‘역사드라마 공동제작’, ‘남북한 새 천년동이 성장다큐’, ‘신년특집 백두산 일출 생방송’ 등 북한에 제안할 수 있는 모든 사업을 망라했다. 김 참사는 한 손에 담배를 들고 다른 한 손으로 내가 내민 제안서를 받았다. 그리고 제안서와 내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간간이 한숨까지 내쉬었다. 사업 규모가 벅찼거니와, 캐주얼 차림의 낯선 친구가 과연 이 엄청난 사업들을 수행할 비용들을 조달할 능력이 되는지 반신반의 하는 표정이었다.

“오 선생, 정말 SBS 사장이 당신을 보냈소?”

“네 그렇습니다.”

“그럼 먼저 담보금을 지급하시오.”

김 참사는 어마어마한 비용을 요구했다. 어느 정도 예상하긴 했지만, 이번엔 내가 한숨이 나왔다. 비용이 과다하다는 점을 지적했다. 남북 방송 교류는 단순히 물건을 사고파는 장사와 달라서 반세기 동안 끊어지면서 생긴 정서의 골을 메우고 민족화합과 통일을 앞당기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점, 남북한 간 이질감을 해소하는 데 방송만큼 강력한 매체는 없으며 따라서 우리가 하는 일은 단순한 거래가 아니라 역사의 흐름을 바꾸어 놓을 수 있는 주요한 책무라는 점을 강조했다. 아울러 돈에 얽매이지 말고 ‘민족적 사명감’에 입각해서 일을 성사시키자고 열변을 토했다. ‘사회주의적 도덕성’을 갖춘 그들의 순수성에 기대를 건 설득이었다.

그러나 이런 나의 노력은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그는 헤어질 때까지 담보금을 깎아 주겠다는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가 제시한 담보금이란 전체 사업비를 선지불한 뒤 사업이 끝날 때마다 제하는 일종의 ‘선납금’이었다. 중간에 사업이 중단될 경우 그 부담은 SBS가 고스란히 떠안는 매우 위험성 높은 불공정 사업 방식이었다.

“나도 송아지 한 마리 끌고 판문점 넘겠다”

회사에서는 비용이 과다할 뿐 아니라 선불로 지급하는 담보금은 절대 지불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다시 베이징으로 날아가 김 참사를 만났다. 거래의 일반적 관행에 따라 개별 사업의 진행 정도에 따라서 비용을 지급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김 참사는 다른 방송사에 앞서 SBS에 우선권을 준 이상 그에 상응하는 성의 표시를 해야 하지 않느냐고 주장했다. 나는 시간이 없으니 일단 제안서의 첫 번째 아이템인 ‘유명 인사의 이산가족 상봉사업’부터 진행하자고 이야기했다. 소설가 이문열 선생 부자, 백기완 선생 남매, 천체물리학자 조경철 박사 형제 등 세 이산가족의 인적 사항을 전달했다. 담보금은 일을 진행하면서 합의점을 찾기로 했다.

이문열 선생 부자의 상봉을 추진하려던 계기는 1999년 여름 신문에 난 기사 때문이다. 선생이 한국전쟁 직후에 월북한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중국에 갔지만 생사 여부를 확인하지 못했다는 내용이었다.

우리는 이문열 선생에게 사전 협의를 하지 않은 상태에서 일단 북한 측에 부친이 생존 여부부터 확인을 요청했다. 만약 생존해 계신다면 그 다음에 선생의 동의를 받아서 두 사람의 상봉을 추진하려고 한 것이다.

‘젊은 날의 초상’을 읽으며 소설 속의 주인공이 되기도 했던 나는 한때 이문열 선생의 열렬한 팬이었다. 분단의 희생자이자 한국의 대표적인 문인인 이문열 선생의 부자 상봉은 단순한 개인사가 아닌 역사적인 사건임에 틀림없었다. ‘젊은 날의 초상’에 실린 작가 이력에는 가난한 어린 시절 가장이 된 형이 화전(火田) 수만 평을 일구는 것을 본 것을 적고 있는데, 아버지의 월북이 어린 시절 그의 가치관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가늠할 수 있었다. 어떻든 문단의 거대한 인물이 토해낼 감정의 파장을 프로그램에 담아내는 일은 방송PD로서는 놓칠 수 없는 매력이었다.

9월 중순, 베이징에서 급히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야쪼(亞洲)호텔 커피숍에는 의외의 인물이 기다리고 있었다.

“오 선생, 고생이 많소! 그 동안 오 선생이 통일 사업에 성의를 다하고 있다는 얘길 들었소.”

조선아시아태평양 평화위원회 강덕순 대남실장이었다. 강 실장은 이른바 총풍 사건에도 등장하는 인물로 당시 대남사업의 실력자로 통했다. 학자적인 외모와 논리적인 화술을 갖춘 그는 대화 중 정치선전을 많이 하지 않아서 남한 사업가들과 언론으로부터 호의적인 평가를 받았다.

“오 선생 우선 안 된 이야기를 전해야겠소. 리문열 선생의 부친인 리원철 선생은 우리가 알아본 바로는 안타깝게도 올해 3월 84세로 사망하였소.”

이문열 선생의 부친은 도급 간부인 함경남도당 행정위원회 농상기술부장으로 일했다고 한다.

그 자리에서 강 실장에게 다른 이산가족인 통일운동가 백기완 선생의 누님을 찾아줄 것을 요청했다. 다행히 백 선생의 누님 근황에 대해서는 조선아태 평화위원회에서 두 해 전인 1997년까지 파악하고 있었다. 북한에서 백 선생을 세 번이나 공식 초청한 적이 있어서 북한의 가족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강 실장은 당시 73세인 백 선생의 누님이 구월산 부근에 거주하는 것으로 들었다며, 10월 초순경에 확답을 주겠다고 했다. 다음날 아침, 베이징의 켐펜스키호텔 1층 식당에서 김 참사와 의향서를 작성했다. 담보금 액수는 북한 측 요구 액수와 우리 측 제시 액수의 중간선에서 정했다. 대폭 삭감해야 했으나 방북 취재에 대한 욕심이 앞서 있어서 조급하게 결정을 한 셈이다. 백기완 선생의 북한 방문 외에도 남북 남녀 축구대표 교환 경기, 평양교예단의 순회공연 등을 빠른 시간 안에 추진하기로 했다. 결국 세 가지 사업에 대해 북한 측이 요구한 액수의 절반을 지급하기로 했다.

서울로 돌아 온 나는 서둘러 백기완 선생 상봉 프로그램 제작에 착수했다. 9월 27일로 기억된다. 점심시간이 채 되기 전 백 선생이 소장으로 있는 서울 대학로 뒤편 통일연구소로 찾아갔다. 방문을 열고 들어가자 백 선생은 널찍한 방에 가부좌를 하고 앉아 있었다. 고문 후유증으로 투병 중이었지만 여전히 강한 카리스마가 느껴졌다. 명성만큼이나 까다로운 사람이라는 소문을 들어 부담이 되었다. 그래서 일단 큰절부터 올렸다.

“그래, SBS에서 무슨 일로 나를 만나러 왔소?”

“백 선생님, 북에 계신 누님을 만나러 가실 의향이 있으십니까?”

백 선생은 마치 제안 내용을 미리 알고 있었던 듯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잠시 눈을 감고 생각에 잠기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세계 평화에 기여한 이 백기완이가 방북한다면 전 세계적인 뉴스가 될 것이요. 통일을 위해 일생을 바친 사람에게 걸맞은 격식과 의례를 갖추어준다면 북에 갈 의사가 있소!”

“어떤 격식과 의례를 요구하십니까?”

“나는 열세 살 때 황해도 장산곶에서 똑딱 배를 타고 인천 앞바다로 월남했소. 그래서 인천에서 다시 똑딱 배를 타고 장산곶으로 올라 갈 테니 북에다가 서해 뱃길을 열어달라고 요구하시오. 만약 그것이 어렵다면 판문점을 통해 맨발로 걸어가겠소.”

“… 북에다 제안은 해보겠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북한이 먼저 초청한 것이 아니라 저희가 요청하는 사업이어서 북에서 우리 조건을 들어주기가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특히 서해안 뱃길을 열어달라고 요구하기에는…”

“이 보시오, PD양반! 나는 지난 89년과 94년 이미 북에서 초청받은 적이 있소. 그 사람들이 어르신네를 모시는 방법을 안다면 그 정도의 예의는 지켜야할 것 아니오?”

“네…”

나는 거의 기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리고 다시 큰절을 하고 일어섰다. 통일연구소 문을 나서는데 다리가 저려서 넘어질 뻔했다.

회사로 돌아오자마자 베이징으로 전화를 해 백 선생의 요구 조건을 전달했다. 전화기 저편의 김 참사의 난감해 하는 표정을 느낄 수 있었다. 닷새 뒤, 예상보다 훨씬 빨리 백 선생의 누님이 생존해 있다는 답신이 왔다. 단 서해 뱃길이나 판문점을 통한 방북은 어려우므로 괜히 안 될 일을 고집해서 어려운 상황 만들지 말라고 경고했다.

그 다음날 오후 혜화동 통일문제연구소를 다시 방문했다. 백 선생은 ‘장산곶 뱃길방북’과 ‘판문점 맨발 방북’ 외에 한 가지 조건을 더 추가했다. 아홉 살 때 백 선생과 함께 월남한 여동생과 여동생의 아들인 조카 그리고 백 선생의 아들 등 세 사람을 더 데려가야겠다는 것이다.

주말에 다시 베이징으로 날아가 김 참사를 만났다. 백 선생의 고집이 보통 아니니 세 가지 조건 중 단 하나라도 들어주도록 평양 당국을 설득해 보라고 했다. 김 참사는 한숨만 쉬었다.

“아니, 오 선생! 당신도 통일사업을 한다는 사람이 도대체 될 일인지, 안 될 일인지 그 정도의 판단도 못한단 말이요?”

당일 저녁 서울로 돌아오자마자 짐을 든 채 곧바로 북한산 기슭 기자촌에 있는 백 선생의 집으로 찾아갔다. 싸늘한 날씨인데도 불구하고 언덕길을 오르는데 등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154번 종점에서 300m 정도 직진하여 세탁소 붙은 골목에서 왼편 두 번째 빨간 대문이 백 선생 집이었다.

대문을 열고 거실로 들어가니 백 선생이 엄숙한 얼굴로 기다리고 있었다. 결과가 좋지 않은 걸 예상한 모양이다. 부인이 가져온 음료수마저 마시지 않았다면 나는 앉은 자리에서 한 시간 반 동안이나 온 몸이 얼어붙은 듯 꼼짝없이 있어야 했을 것이다.

“선생님께서 제시한 조건은 들어줄 수 없다고 합니다. 이번에는 첫 방북이니만큼 형식을 따지지 말고 베이징으로 돌아서 오시길 바라고 있습니다. 단 의사 한 사람 정도는 동행해도 좋다고 합니다. 또 김일성대학에서 학생 1000명가량을 모아서 강연하시도록 준비하겠답니다.”

“내가 왜 내 나라 놔두고 중국 땅으로 돌아간단 말이오?”

백 선생이 언성을 높였다.

“나는 판문점으로 들어가겠소. 나도 송아지 한 마리는 끌고 갈 형편이 되오! 가서 전하시오. 악덕 재벌인 정주영이는 소 100마리 끌고 간다고 판문점을 열어주지 않았소? 이 세계적인 통일운동가 백기완이가 송아지 한 마리 끌고 갈 테니 문을 열어주라고 말이오!”

“……”

밤 11시가 다 되어서 기자촌을 내려오는데 다시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계속)

※ 이 칼럼은 자유언론실천재단 ‘내 인생의 취재기·제작기’ 연재와 공동으로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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