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산업 생산공정에서 일하다 희귀성 난치질환, 백혈병 등 중증 질환을 얻은 피해 노동자 5명이 31일 근로복지공단에 집단 산업재해 신청서를 접수했다.

전자산업 산재 피해노동자들을 지원하는 ‘반도체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지킴이’ 반올림 등은 31일 오전 산재 신청 서류를 접수하기 직전 근로복지공단 서울남부지사 정문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근로복지공단은 삼성 등 전자산업 직업병 피해자에 대해 신속히 산재를 인정하라”고 주장했다.

▲ ‘반도체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지킴이’ 반올림 등은 31일 오전 산재 신청 서류를 접수하기 직전 근로복지공단 서울남부지사 정문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근로복지공단은 삼성 등 전자산업 직업병 피해자에 대해 신속히 산재를 인정하라”고 주장했다. 사진=손가영 기자
▲ ‘반도체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지킴이’ 반올림 등은 31일 오전 산재 신청 서류를 접수하기 직전 근로복지공단 서울남부지사 정문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근로복지공단은 삼성 등 전자산업 직업병 피해자에 대해 신속히 산재를 인정하라”고 주장했다. 사진=손가영 기자

만 17세였던 1997년 삼성전자 기흥공장에 입사해 8여 년 간 근무한 은영(가명·37)씨는 퇴사 1년 전인 2004년 ‘다발성경화증(시신경척수염)’이 발병했다. 중추신경계 조직에 다발적 손상이 일어나는 다발성경화증은 인구 10만 명 당 3.5명에 불과한 유병률을 보이는 희귀성 난치 질환이다.

현재까지 삼성전자 반도체·LCD 생산공정 노동자 중 다발성경화증 발병이 확인된 피해노동자는 4명이다. 이중 3명이 근로복지공단으로부터 산재 불승인 결정을 받고 행정소송을 제기해 최근 서울고등법원 및 대법원으로부터 산재 인정 판결을 받았다. 은영씨도 이들과 마찬가지로 반도체 생산라인에서 유기용제 등 유독물질을 수시로 취급했고 불규칙한 주·야 맞교대 근무를 수행했다.

‘비호치킨림프종’ 질환자인 여성노동자 김아무개씨(30)는 만 18세였던 2005년 9월 삼성디스플레이 탕정공장 액정공정의 오퍼레이터로 입사해 2008년 9월까지 일했다. 김씨는 입사 후 한 달 만에 몸무게가 8kg 감량된 적이 있고 퇴사 이후 및 현재까지 생리불순과 하혈에 시달렸다. 김씨는 ‘실런트 배합업무’와 ‘실린지 세척업무’를 수행하며 아세톤, IPA(이소프로필알코올) 등 각종 유기용제 및 화학물질에 지속적으로 노출됐다.

정은규씨(30)는 지난 2월 희귀암으로 분류되는 악성 골육종이 발병해 현재 항암치료를 받고 있다. 정씨는 2010년 1월부터 2015년 2월까지 삼성디스플레이 아산사업장 모듈공정의 설비 엔지니어로 일했다. 

정씨는 근무 중이던 2013년 8월 양성 골종양(뼈의 양성종양) 진단을 받았다. 정씨는 IPA, 아세톤 등 화학물질을 상시 사용했고 실리콘이라 불리는 ‘UV경화용 접착제’를 수작업으로 취급했다. 그는 전리방사선이 방출되는 이오나이저 설비도 취급했다.

삼성전기 조치원공장에서 5년5개월 가량 근무한 여성노동자 권아무개씨(42)는 만성골수성백혈병 투병 중이다. 권씨도 만 19세이던 1994년 2월 삼성전기에 입사해 1999년 7월까지 ‘PCB 패널’ 조립공정 중 엑스레이로 패널 상·하단에 홀을 가공하는 업무를 수행했다.

이날 기자회견에 참석한 이정미 노무사는 “권씨는 근무 당시 방사선 노출 경고를 들었지만 방사선으로부터 인체를 보호할 장비는 지급받지 못했으며, 기계 작동시 뚜껑을 열면 안되지만 오작동할 때 뚜껑을 열어야 하는 상황이 종종 발생했다”면서 “가공 업무 중 벤젠, 포름알데히드 등 발암물질이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파킨슨병’을 앓고 있는 이화정(56)씨는 SK하이닉스 이천공장 사내하청업체 노동자로 2015년 8월까지 10년 가량 일했다. 그는 반도체 패키징 모듈공정의 테스트 업무를 맡았다. 

이씨는 회사로부터 자신이 어떤 유해물질에 노출됐는지 제대로 고지받지 못했다. 에폭시가 고온에서 태워져 나오는 부산물로 ‘추정’되는 ‘검은 분진’은 장갑이 새까맣게 변할 정도로 많이 발생했으나 그는 2014년까지 마스크 없이 근무했다. ‘아세톤보다 성능이 좋고 냄새가 지독한’ 유기용제를 이물질·먼지 등을 제거하는데 상시적으로 사용했다.

“‘의학적 소명 불충분’ 이유로 산재 불승인 남용 그만”

정은규씨는 산재 신청서를 접수하며 “삼성은 작업환경과 취급물질을 영업비밀이라고 공개를 거부한다고 들었다”며 “이런 상황에 저의 희귀질병에 대한 업무관련성을 입증하는데 무척 큰 어려움이 예상된다”고 심경을 밝혔다.

은영씨도 “그 동안 병의 원인도 모르고 여러 병원만 전전하다 나와 같은 사람들이 있다는 걸 알게 됐는데 회사는 유해화학물질을 사용한다는 사실을 여전히 감추고 있고 보상절차에도 투명성이나 진실이 없었다”면서 “나와 같은 사례가 다른 분들에게는 일어나지 않기를 바란다”고 입장을 전했다.

반올림은 이와 관련해 “법원은 업무관련성이 법률적·주관적 판단이고 근로복지공단의 재해조사가 잘못됐다고 수차례 지적해왔다”면서 “그럼에도 근로복지공단은 지독히도 변하지 않고 있다”고 비판했다. 근로복지공단이 “발병 원인이 의학적으로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는 이유로 산재 불승인을 남발하고 있다”는 비판이다.

대법원은 지난 8월29일 다발성 경화증에 걸린 삼성전자 LCD공장 노동자의 산업재해를 인정하며 “사업주가 영업비밀 등을 이유로 화학물질의 정보나 유해성을 공개하지 않을 경우, 이를 재해노동자에게 유리한 간접사실로 고려해야 한다”고 판결했다.

대법원은 또한 “비록 노출허용기준 이하의 저농도라 할지라도 상시적으로 유해화학물질에 노출되는 근로자에게 현대의학으로도 그 발병원인을 정확히 알 수 없는 희귀질환이 발병한 경우에도 전향적으로 업무와의 상당인과관계를 인정해 산재요양급여를 지급해야 한다”고 판결했다.

반올림은 기자회견을 통해 “근로복지공단은 대법원 판결의 취지대로 산재 인정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올림은 2007년 11월 단체가 결성된 이후 현재까지 총 13차례에 걸쳐 94명 피해노동자들의 집단산재 신청을 진행해왔다. 이중 산재가 인정된 피해노동자는 총 22명이다. 12명은 근로복지공단으로부터 산재 승인 결정을 받았고 나머지 10명은 행정소송을 진행해 항소 등을 거쳐 법원으로부터 산재를 인정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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