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언론사 첫 합법노조인 한국일보 노동조합이 창립 30주년을 맞았다. 

1987년 6월 항쟁으로 대통령 직선제를 쟁취한 직후 자유의 공간은 7~9월 노동자대투쟁으로 채워졌다. 같은 해 늦가을, 언론사 노조로는 처음으로 한국일보에서 노동조합이 출범했다. 1974년 전국출판노동조합연맹 지부로 노동조합의 형태가 있었지만 단위노조로 완전한 모습을 갖춘 것은 초유의 일이었다.

신군부의 ‘보도지침’을 폭로한 김주언 전 한국일보 기자는 지난 26일 한국일보 본사에서 열린 ‘한국일보 노조창립 30주년 기념식’에서 미디어오늘에 “1987년 10월29일 서울 종로2가 YMCA 2층에서 ‘영등포 조기축구회’ 모임인 것처럼 내걸고 비밀리에 노조를 결성했다”고 당시 상황을 말했다. 노조가 불법이던 시절 이들은 공개적으로 노조창립식을 진행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 한국일보와 각 계열사 등에서 58명이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 한국일보 노동조합은 1987년 10월 29일 서울 종로 YMCA 건물 2층에서 '영등포 조기축구회' 모임을 가장해 비밀리에 만들었다. 사진은 당시 노조 활동사진
▲ 한국일보 노동조합은 1987년 10월 29일 서울 종로 YMCA 건물 2층에서 '영등포 조기축구회' 모임을 가장해 비밀리에 만들었다. 사진은 당시 노조 활동사진

조성호 한국일보 2대 노조위원장은 이날 행사에서 30년 전을 회상했다.

“노조창립대회 현장에서 후배가 결성 취지문을 읽는데 이런 대목이 있었다. ‘1974년 전국출판노조 한국일보 지부의 정통성을 계승하고 새 시대를 열어가고자 한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눈물이 났다. 박정희 유신독재 시대에서 민청학련(1974년 4월) 같은 큰 사건이 일어나고 긴급조치가 발동하면서 언론자유가 무참하게 훼손되던 1974년, 아침엔 동아일보 오후엔 한국일보 두 신문이 10월24일 자유언론실천선언을 터트렸다. 이어 전국 30여 개 언론사가 선언을 이어갔다. 유신체제 위에서 노조가 불법화되고 지부장들이 해고되면서도 투쟁을 이어갔다. 그러다 1987년 후배들이 노조를 결성하면서 (74년 투쟁의) 정통성을 계승한다고 했을 때 눈시울이 뜨거워진 것이다.”

▲ 조성호 한국일보 2대 노조위원장이 지난 26일 한국일보 노동조합 창립 30주년 기념식에서 노조 설립 당시를 회상하고 있다. 사진=이기범 언론노보 기자
▲ 조성호 한국일보 2대 노조위원장이 지난 26일 한국일보 노동조합 창립 30주년 기념식에서 노조 설립 당시를 회상하고 있다. 사진=이기범 언론노보 기자

이후 동아일보가 ‘신동아 사태’(안전기획부의 인쇄소 침탈, 1987년 9월20일)를 계기로 노조를 결성했고 중앙일보 등 7개 언론사가 1987년 노조를 결성했다. 1988년 4월6일 15개 언론사노조가 ‘자유언론’과 ‘권익쟁취’ 슬로건 아래 ‘전국언론사노동조합협의회’를 출범했고, 같은해 11월26일 전국언론노동조합연맹(언론노련)을 결성했다. 국민주로 만든 한겨레가 창간호를 찍어낸 건 같은해 5월15일의 일이었다.

전국 41개 언론사노조 122명의 대의원이 참가한 언론노련 출범식에서 권영길(서울신문 외신부) 초대 위원장은 “우리는 정치권력의 강권과 권력 및 언론소유주의 야합에 의해 예속과 굴종의 길을 걸어왔다”며 “하지만 우린 이에 맞서지 못하고 오히려 한 시대의 거대한 악에 편승했고 점차 패배주의와 기회주의, 냉소주의에 체질화되면서 그날그날의 소시민적 삶을 영위해왔다”고 지난날을 반성했다.

권 전 위원장은 이날 행사에 참석해 “동아일보 편집국장·MBC 사장 등을 거쳐 언론운동 현장에서 활동하는 김중배 선생, 남재희 전 장관 등 한국일보는 언론계 기라성 같은 인재를 키워 배출하던 곳이었다”며 “한국일보 노조는 첫 언론사 노조라는 의미 이외에도 언론노조가 뭘 해야 한다는 것을 확립한 곳”이라고 평가했다.

언론노련은 1989년을 언론해방투쟁의 원년으로 선포하고 노동조합 사수와 편집권 독립을 위해 파업 등 투쟁을 이어갔다. 언론노련은 4년여 법정투쟁을 거쳐 1993년 12월22일, ‘노조 설립 때 상급단체 가입이 강제조항이 아니’라는 법원 판결을 통해 합법노조로 인정받았다. 한국노총에 가입하지 않으면 법외노조로 취급되던 당대 현실에서 자유의 틈을 확보한 투쟁이었다. 산별노조로 전환되면서 전국언론노동조합을 창립(초대 위원장 최문순)하게 된 건 2000년 11월24일이었다.

7대·10대·11대·12대 한국일보 노조위원장을 지냈고, 전국언론노동조합 2대·3대 위원장을 지낸 신학림 전 위원장도 이날 행사에 참석했다. 그는 “위원장을 맡게 된 이유는 정리해고 방침 때문이었고, 이후에 외환위기가 와 연달아 3번을 하게 됐다”며 “1998년 장재국 회장을 1:1로 만나서 ‘한국일보 소유구조 바꾸지 않고 이대로 가면 10년 안에 망한다’고 했는데 나중에 정말 망했다”고 회상했다.

▲ 신학림 한국일보 7, 10, 11, 12대 노조위원장이 지난 26일 한국일보 노동조합 창립 30주년 기념식에서 노조활동 시절을 회상하고 있다. 사진=이기범 언론노보 기자
▲ 신학림 한국일보 7, 10, 11, 12대 노조위원장이 지난 26일 한국일보 노동조합 창립 30주년 기념식에서 노조활동 시절을 회상하고 있다. 사진=이기범 언론노보 기자

신 전 위원장에 따르면 한국일보 노조는 6대 이유식 위원장 시절부터 소식지를 매주 만들며 사주를 견제했다. 신 전 위원장은 “당시 타블로이드 4쪽짜리 소식지를 만들며 가장 강조했던 건 ‘장씨의 회사로 남으면 죽고 사원의 회사로 남으면 산다’였다”며 노조의 필요성에 대해 말했다. 조성호 전 위원장도 “한국일보 노조는 임금·근로조건 등 이익추구에만 매몰되지 않고 큰 뜻을 펼쳐 편집권 독립의 가치를 중시하고 그 제도를 만들고 실천하는데 많은 노력을 했다”고 평가했다.

편집권 독립과 사주의 배임 등을 두고 한국일보 노사는 극심한 갈등을 이어왔다. 2002년 장재국 전 회장은 외환관리법 위반으로 유죄 판결을 받는 등 장씨 일가의 불법행위로 난항을 겪으면서도 장씨 일가는 물러나지 않았다. 급기야 2013년 6월 장재구 회장 등 사측 인사들은 편집국을 폐쇄했다. 회사는 용역을 동원해 기자들을 압박했고, 신문지면은 연합뉴스 등 통신사 기사로 채웠다. ‘짝퉁 한국일보’라는 말이 나돌았다. 기자들은 독자들 보기 부끄럽다며 거리로 나섰다. 투쟁 끝에 한국일보는 2015년 초 동화기업에 인수돼 새 출발에 나섰다. 신 전 위원장은 “한국일보 모 기업이 제조회사로 있다는 건 한국일보만의 강점”이라고 평가했다.

이날 노조행사에는 이준희 한국일보 사장 등 경영진도 다수 참석했다. 이 사장은 “30년 전 5공 말기 엄혹한 시절 ‘007스파이 작전’과도 같은 드라마틱한 설립으로 언론민주화를 촉발했고, 신문과 경영이 궤도를 이탈할 때마다 집요하게 바로잡아 한국일보와 언론 전체의 정체성과 위상을 지키는 역할을 해왔다고 자부한다”며 “동료의 마음으로 열심히 응원하고 지원하겠다”고 말했다.

한국일보 노조로 시작한 신문노조, 나아가 언론노조는 30년 간 많은 변화가 있었다. 언론노조는 ‘안티조선 운동’ 등 조중동 프레임을 유지할 뿐 이들 노조와의 소통이 부재한 상황이다. 30년 전과 달리 신문사가 아닌 방송사가 언론노조를 주도하며 신문의제가 사실상 배제당하는 한계도 있다. 신문의 편집권독립문제, 광고시장 실질적인 시장지배자인 포털사업자에 대한 견제와 책임부여, 광고를 통한 신문사 관리·통제, 연합뉴스·서울신문 등의 공공성 강화, 열악한 지역신문에 대한 지원 등은 신문사 노조들이 공론화하고 해결해야 할 문제로 남아 있다.

▲ 한국일보 노동조합은 1987년 10월 29일 서울 종로 YMCA 건물 2층에서 '영등포 조기축구회' 모임을 가장해 비밀리에 만들었다. 사진은 당시 노조 활동사진
▲ 한국일보 노동조합은 1987년 10월 29일 서울 종로 YMCA 건물 2층에서 '영등포 조기축구회' 모임을 가장해 비밀리에 만들었다. 사진은 당시 노조 활동사진

다음은 역대 한국일보 노동조합 위원장 (2000년 11월24일 산별노조 전환 이후 ‘위원장’에서 ‘지부장’으로 호칭 변경)

최해운(87년), 조성호(88년), 박영철(89년), 박래부(90년), 남영진(91년), 이유식(92년), 신학림(93년), 윤승용(94년), 조성희(95년), 신학림(96년), 신학림(97년), 신학림(98년), 장인철(99년), 임대호(2000년, 제명), 임대호(01년, 제명), 전민수(02년), 전민수(03년), 임대호(04년, 제명), 전민수(06년), 최윤필(11년), 정상원(12년), 정상원(13년), 김주성(14년), 김주성(15년), 허정헌(16년), 배성재(17년 현재 27기 지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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