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정부 청와대 시절 작성된 ‘비서실장 지시사항 이행 및 대책 세부분석’ 문건의 내용 중 일부는 그대로 실행됐다. 이번 청와대 문건은 2015년 3월부터 2016년 10월까지 당시 박근혜 정부 청와대 비서실장이 주재한 수석비서관회의에서 오간 내용이 담겨 있다. 당시 비서실장은 이병기·이원종 전 실장이다. 미디어오늘은 해당 문건이 어떻게 실행됐는지 따져봤다. - 편집자주

알랭드보통은 ‘뉴스의 시대’에서 “당대의 독재자는 뉴스 통제 같은, 눈에 뻔히 보이는 사악한 짓을 저지를 필요가 없다. 언론이 닥치는 대로 단신을 흘려보내게만 하면 된다”고 썼다. 2015년 12월 ‘광화문광장 태극기 논란’도 이런 방식으로 흘러갔다.

시작은 국가보훈처의 발표였다. 보훈처는 2015년 12월15일 “국민의 87.3%가 찬성한 범정부 국가사업인 ‘광화문광장 태극기’를 단지 ‘광장 사용 허가권’을 가진 지방자치단체가 반대해 추진하지 못한 것은 유감”이라며 “모든 절차를 통해 반드시 태극기 게양을 추진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보훈처는 서울시가 2015년 6월2일 보훈처와 체결한 업무협약을 파기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보훈처가 공개한 업무협약서에는 설치 기간이 명시돼있지 않았다. 이에 대해 보훈처는 ‘영구 게양’이라는 문구가 없지만 협의 과정에서 영구 게양 의사를 밝혔다고 주장했다.

▲ 박근혜 정부 청와대에서 작성된 '비서실장 지시사항 이행 및 대책 세부분석' 문건 내용
▲ 박근혜 정부 청와대에서 작성된 '비서실장 지시사항 이행 및 대책 세부분석' 문건 내용
대다수 언론사는 보훈처 보도 자료를 그대로 인용했지만 협약서의 허점을 꼬집는 보도도 있었다. “협약서를 비롯한 그동안의 추진내역을 감안하면 정작 보훈처 쪽 과실이 더 커 보이는 상황이다”(CBS 노컷뉴스), “서류에 명시돼 있지 않은 상태에서 ‘약속 파기’라고 주장하긴 어렵다”(머니투데이) 등이다.

조금만 더 들여다보면 보훈처 주장에 근거가 없다는 맥락을 잡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 실제 16일부터는 맥락을 정리한 기사가 나오기 시작했다. 헤럴드경제는 2015년 6월부터 12월15일까지 상황을 재구성한 다음 “보훈처가 태극기게양 문제를 정치적으로 해결하려 한다는 인상을 주는 부분”이라고 썼다.

20일에는 박원순 서울시장이 직접 나섰다. 박 시장은 당시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국가보훈처가 갑자기 내가 (태극기 설치를) 반대한다는 주장을 해서 당황스러웠다”며 “설치 장소와 기간 등을 협의 중인 상황에서 갑자기 (내가) 반대했다는 식으로 주장하는 건 명예훼손”이라고 말했다.

이어 박 시장은 “다만 항구적으로 광장에 무언가를 설치하는 건 조심해야 하며 한시적으로 설치하거나 이동할 수 있게 하면 좋겠다는 정도의 이야기였다”며 “정부 못지않게 애국적 행사를 많이 했다. 그런 걸 갖고 마치 애국심 경쟁하듯이 하는 것은 좀 유치한 게 아니냐”고 말했다.

하지만 박 시장의 인터뷰는 묻히고 만다. 다음 날인 21일 오전 보훈처가 행정자치부에 행정협의조정위원회에 조정을 신청했기 때문이다. 보훈처는 광화문광장 태극기가 서울시의 반대로 무산됨에 따라 조정신청서를 제출했다고 밝혔다. 단신 기사가 쏟아졌고 상황은 원점으로 돌아갔다.

▲ 2015년 12월21일 MBC뉴스투데이 방송화면
▲ 2015년 12월21일 MBC뉴스투데이 방송화면
이번에 드러난 박근혜 정부의 ‘비서실장 지시사항 이행 및 대책 세부분석’ 문건을 보면 보훈처의 조정신청에도 청와대가 관여했을 것으로 보인다. 박 시장의 인터뷰 이틀 전인 18일 열린 청와대 비서실장 주재 수석비서관 회의에서 박 시장이 언급되기 때문이다.

당시 이병기 전 비서실장은 “박원순 시장이 광복 70주년 기념 사업 일환으로 추진 중인 광화문광장 태극기 게양대 설치 사업을 적극 반대하고 있다고 하는데 박 시장과 서울시의 이러한 행태가 언론을 통해 잘 부각돼 국민적 비판이 모아지도록 할 것”을 주문했다.

청와대의 의지를 가장 잘 반영한 언론사는 MBC였다. MBC는 21일 “보훈처-서울시 광화문 태극기 갈등 ‘2라운드’” 라는 제목의 리포트에서 “세월호 유가족 천막이 설치돼 있는 광화문 광장”이라고 언급해 세월호 천막과 태극기를 동일선상에 놓는다.

조선일보와 연합뉴스TV 역시 “보훈처-서울시 광화문 태극기 갈등 ‘2라운드’”라는 제목의 기사를 내보내 갈등을 부각시켰다. 이외에도 보도를 살펴보면 그동안 논의됐던 맥락이나 박 시장의 인터뷰는 생략된 채 ‘행정 조정으로 간다’는 식의 단신이 대부분이다. 뉴스를 뉴스로 덮는 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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