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장겸·고대영 등 공영방송사 사장들이 나가면 방송 생태계가 건강해질까. 유승희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지난 13일 방송통신위원회 국정감사에서 “물론 이명박근혜 정부에서 악화됐지만 이전부터 문제였다”면서 방송사-외주제작사 간 불공정 거래에 대해 지적했다. 외주제작사 소속의 작가·독립PD 등은 방송사와 외주제작진 간 부당한 갑을관계 문제는 참여정부 정연주 KBS사장 시절에도 존재했지만 주목을 받지 못했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이 문제는 새 정부 첫 국정감사에서도 제대로 주목받지 못했다. 지난 12일 정무위·13일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 국감에서 일부 의원이 다뤘지만 관련 기사는 의원들 얼굴이 나온 사진기사 뿐이었다. 외주제작사 제작진에 대한 방송사의 ‘갑질’은 파업 중인 방송사 노조들도 사실상 외면하고 있는 문제다.

지난 12일 정무위 국정감사에서 김해영 민주당 의원은 “고 박환성·김광일 PD의 죽음을 알고 있느냐. EBS의 대표 다큐인 ‘다큐프라임’을 찍으러 가면서 운전기사·스태프도 없이 단 두 사람으로 팀을 꾸린 이유가 무엇인가”라고 장해랑 신임 EBS 사장에게 물었다. 장 사장은 “제작비를 줄이기 위해서”라고 답했다.

▲ 아프리카 현지 촬영 중 사망한 박환성, 김광일 PD의 영정사진. ⓒ김영미 PD
▲ 아프리카 현지 촬영 중 사망한 박환성, 김광일 PD의 영정사진. ⓒ김영미 PD

김 의원은 “방송사가 외주제작사에게 제작권을 부여하겠다고 밝힌 것이 잘 지켜지느냐”며 “방송사가 승인을 안 해주면 (제작사가 콘텐츠를 사용하지 못하는 건) 방송사의 전형적인 갑질”이라고 지적했고 장 사장은 “바꾸겠다”고 답했다.

유 의원은 이효성 방통위원장에게 “지상파는 외주제작 방송프로그램을 의무편성 하는데 명분상 양적 팽창을 가져왔지만 제작비는 삭감돼왔다”며 “제작비를 덜 주는 것은 둘째 치고, 모자란 협찬금까지 받아와라, 이는 앵벌이다. 외주제작사는 협찬금으로 제작비를 채우고 생색은 방송사가 내게 돼 있다”고 말했다. 그간 한국방송영상제작사협회·한국독립PD협회 등은 방송사 계약서를 구체적으로 공개하지 못했다. 계약서의 내용이 공개될 경우 프로그램을 맡지 못하게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유 의원과 추혜선 정의당 의원은 이들 협회의 도움을 받아 올해 국정감사 정책자료집을 통해 주요 방송사와의 계약서 일부를 공개했다. 자료집에 따르면 8년간 KBS에서 제작한 한 프로그램은 최초 제작비가 1800만원이었지만 점차 깎여 780만원까지 하락했다가 일방적으로 폐지됐다. KBS 담당자는 제작사에게 “수신료가 인상돼야 제작비를 삭감하지 않을 수 있다”고 통보했다고 전했다. MBC 아침프로그램은 2006년 시작 당시로부터 26번의 계약서 변경이 있었다. 그 과정에서 제작비 규모는 물가상승률을 감안할 때 하락했다. KBS·MBC·SBS 아침저녁방송이 다 유사하다는 게 업계 평가다.

외주제작사 제작진이 만든 콘텐츠 저작권을 방송사가 가져가는 구조에 대한 문제제기는 올해도 등장해야만 했다. 자료집에 따르면 KBS는 제작사가 콘텐츠진흥원으로부터 1억 원을 지원받고 제작사가 2000만원을 부담해 만든 2부작 특집프로그램에 대해 2000만원 제작비만 지급한 뒤 모든 저작재산권을 가져갔다. 협찬금의 일부를 방송사가 가져가거나 제작비를 삭감하는 행위는 TV조선, MBN, SBS, JTBC, CJ E&M 등 다수 방송사에서 이뤄졌다는 설명이다.

▲ MBC와 외주제작사 간 계약서 일부. 계약은 방송사 사정에 따라서만 변경이 가능하다. 계약서에는 시작시점만 나와있고 계약 종료시점은 나와있지 않다. 자료=유승희, 추혜선 의원 국정감사 정책자료집
▲ MBC와 외주제작사 간 계약서 일부. 계약은 방송사 사정에 따라서만 변경이 가능하다. 계약서에는 시작시점만 나와있고 계약 종료시점은 나와있지 않다. 자료=유승희, 추혜선 의원 국정감사 정책자료집

계약서엔 각종 불공정한 내용이 포함돼있다. MBC와 외주제작사 간의 한 계약서를 보면 계약시작 시점만 있고 종료시점이 없다. ‘방송일자’란에는 “‘갑(MBC)’의 사정에 따라 변경가능”이라고 돼있다. MBC 입맛에 맞지 않을 경우 언제든 외주사를 퇴출할 수 있는 구조다. 심지어 SBS의 아침프로그램 중에는 계약서 없이 제작에 들어간 경우도 있다. JTBC 역시 계약서가 없는 경우가 있었고, TV조선·채널A 등은 계약금에 협찬금 수익분배 내용이 없는 경우도 있었다.

방송사의 임의적인 계약해지 등은 불법 하도급·위장도급이라는 지적이 있다. 민법과 하도급법에 따르면 외주제작사는 콘텐츠를 만드는 하도급 사업자로, 방송사는 부당하게 콘텐츠를 반품하거나 위탁취소 할 수 없다. 또한 도급의 경우 인사노무관리·사업경영상 독립성이 보장돼야 하는데 지난달 MBC ‘리얼스토리 눈’ 책임CP의 욕설 파문 등을 보면 하도급법이 전혀 지켜지지 않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방통위는 지난 8월 문화체육관광부 등과 함께 방송사-외주사 간 불공정거래 실태조사에 나서겠다고 밝혔다. 김해영 의원은 12일 국정감사에서 홍남기 국무조정실장에게 “방송사-외주사간 불공정거래 개선 TF 회의내용을 보면 외주제작 인력의 4대보험 가입 확대에는 전원이 공감했다. 제작사들이 주 70시간 넘게 일하면서 월 100만원 대를 받는데 여기서 4대보험을 공제하면 고통이 가중될 수 있다. 외주제작 인력에 대해 최저임금 보장이 필요한데 논의가 전혀 없다”고 지적했다. 홍 실장은 “검토하겠다”고 답했다.

이어 김 의원은 “실태조사 계획을 보면 조사 대상인 외주제작사가 협회 소속사로 한정돼 있다”며 “열악한 외주사가 훨씬 더 많다”고 말했다. 조사방식도 문제 삼았다. 김 의원은 “면접조사 등이 이루어지지 않고 서면조사로만 이루어지고 있다”며 “재검토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또한 “문화산업의 오랜 부조리로 보이는데 해결을 위해 국무총리를 위원장으로 하는 특위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정부가 더 의지를 보여야 한다는 주장이다. 홍 실장은 “어떤 거버넌스가 좋은지 검토하고 보고하겠다”고 말했다.

▲ SBS와 외주제작사 간 계약서 일부. 저작권은 SBS에게 양도해야 하고, 모든 책임은 외주제작사가 지도록 돼 있다. 자료=유승희, 추혜선 의원 국정감사 정책자료실
▲ SBS와 외주제작사 간 계약서 일부. 저작권은 SBS에게 양도해야 하고, 모든 책임은 외주제작사가 지도록 돼 있다. 자료=유승희, 추혜선 의원 국정감사 정책자료실

자료집에선 영국의 제도를 대안으로 소개하고 있다. 영국의 경우 커뮤니케이션 법(Communication Act, 2003년)에 따라 오프콤(방송통신 규제기관)에서 불공정거래를 철저하게 통제한다. 한국과 달리 프로그램 제작 계약서가 제작결정 순간 작성되고 제작이 끝나기 전 제작비가 모두 지급된다. 방송이 나가야 제작비가 지급되는 한국처럼 독립PD들이 사비를 털어야 하는 일은 없다. 영국 BBC는 매년 물가를 반영해 작성한 표준 계약비를 발표하기 때문에 한국처럼 제작비가 점차 줄어드는 현상은 발생하지 않는다.

또한 BBC가 제작비를 제공한다는 이유로 일방적인 편집권을 행사할 수도 없다. 편집과정에서 드는 추가비용의 경우 한국에선 독립PD·외주제작사가, 영국에선 방송사가 지급해야 한다. 영국의 경우 저작권은 외주제작사에게 주어지며 방송사가 제작비를 제공한 대가로 5년간 독점사용권을 갖는다. 게다가 영국정부는 1982년 만든 공영방송 ‘채널4’를 100% 외주제작에 의존하도록 했다. 독립PD들이 온전히 활동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한 것이다.

언론계 적폐청산이 공영방송 내부 인적청산으로 축소된 양상을 보이고 있다. 정치권도 자신들과 관계있는 공영방송 이사 선임 이슈를 제외하곤 큰 관심이 없다. 프로그램 제작의 약 절반을 담당하고 있는 외주제작사·독립PD의 외침이 이번에도 외면당할 경우 최근 언론사 노조의 제작자율성 투쟁 역시 반쪽짜리 승리에 그치게 될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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