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정부 청와대 시절 작성된 ‘비서실장 지시사항 이행 및 대책 세부분석’ 문건의 내용 중 일부는 그대로 실행됐다. 이번 청와대 문건은 2015년 3월부터 2016년 10월까지 당시 박근혜 정부 청와대 비서실장이 주재한 수석비서관회의에서 오간 내용이 담겨 있다. 당시 비서실장은 이병기·이원종 전 실장이다. 미디어오늘은 해당 문건이 그대로 실행됐는지 하나하나 따져봤다. (편집자주)

2015년 4월23일 방송통신심의위원회는 KBS 다큐멘터리 ‘뿌리깊은 미래’ 1부에 대해 중징계인 ‘경고’를 내렸다. KBS는 벌점 2점도 받았다. 뿌리깊은 미래는 광복 70년 동안의 사진과 함께 일반인들이 그 역사 속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를 보여주는 것을 콘셉트로 한 프로그램이다. 

앞서 2014년 문창극 국무총리 후보자 사퇴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 KBS ‘뉴스9’ 보도에 대한 방통심의위 심의가 있었고, 기대 밖으로 법정제재가 아닌 행정지도가 나오자 박 대통령이 위촉한 방통심의위원이 자진 사퇴하며 외압 논란이 이는 등 한 차례 풍파를 겪은 뒤였다. 

방통심의위는 뿌리깊은 미래에 대한 징계 사유로 △한국전쟁 원인을 ‘남침’이라고 명확히 하지 않았고 △‘뚜렷한 증거 없이 북한군에 부역한 혐의자를 처벌했다’고 한 것은 왜곡이며 △흥남 철수 당시 부두 폭파 영상을 보여주며 ‘민간인들이 남아있었다’고 한 것은 부정적인 인식을 심어줄 우려가 있다는 점을 들었다. 

▲ KBS 다큐멘터리 뿌리깊은 미래 방송화면 갈무리
▲ KBS 다큐멘터리 뿌리깊은 미래 방송화면 갈무리
정치 심의 논란이 일었다. 먼저 방통심의위가 밝힌 징계사유가 사실과 다르다는 지적이 나왔다. 민족문제연구소·5·18기념재단·전국교수노동조합 등 465개 역사·학술·시민단체로 꾸려진 ‘역사정의실천연대’(역사연대)는 방통심의위가 징계 사유로 내세운 것들이 객관적인 증거가 없다고 비판했다. 

역사연대에 따르면 △국사편찬위원회 검정을 통과한 역사 교과서에도 남침이라는 용어가 빠진 채로 서술된 경우가 있으며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에 따르면 전국 각지에서 북한군 부역자에 대해 기소와 재판 과정 없이 즉결 처형이 광범위하게 이뤄졌다. 

정치 심의의 배후로는 이인호 KBS 이사장이 꼽혔다. 2015년 2월11일 이 이사장이 임시이사회에서 “북한의 입장에서 쓴 듯한 내레이션이 있다”며 “외부에서 부정적인 평가가 많고 일부는 수신료 거부 운동까지 거론하고 있다” 등의 발언을 한 것으로 알려졌기 때문이다. 

당시 KBS PD협회는 임시이사회 다음날 성명을 내고 “이 이사장은 이사장이라는 위치를 이용해 전체 KBS 프로그램의 최종 책임 프로듀서인양 행동하고 사고하고 있다”면서 “이사회를 프로그램 개입의, 그리고 이념 전쟁의 장으로 활용하겠다는 사고”라고 비판했다.

▲ ‘비서실장 지시사항 이행 및 대책 세부분석’ 문건
▲ ‘비서실장 지시사항 이행 및 대책 세부분석’ 문건
하지만 박근혜 정부 청와대에서 작성된 ‘비서실장 지시사항 이행 및 대책 세부분석’ 문건에 따르면 진짜 ‘몸통’은 청와대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병기 전 실장은 2015년 3월23일 회의에서 뿌리깊은 미래에 대해 “대한민국 건국가치를 부정하고 역사를 왜곡해 논란이 크다”며 “어떻게 공영방송 KBS가 이런 다큐를 제작, 방영할 수 있었는지 의문이다. 방송통신심의위 제재가 필요한 사안이라고 생각되는데 점검해보기 바란다”고 지시했다. 

9일 뒤인 2015년 4월1일 뿌리깊은 미래를 제작한 김형석 KBS PD는 방송심의소위원회 회의에 출석했다. 당시 김 PD는 “전체적으로 역사적 사건이나 사회적 배경에 대해 설명하고 원인을 규명하는 정통 역사 다큐라기보다는 어려운 생활을 했던, 평범한 보통 사람들 중심으로 기획한 프로그램”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심의위원들은 계속해 김 PD를 몰아붙였다. 함귀용 위원은 “당시 북한군 치하에서 학살된 선량한 민간인이 몇 명이나 됐다고 생각하느냐”며 “그런데 이 부분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다. 민간인의 억울한 희생을 이야기하려면 이 부분을 설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김 PD는 “계속 말씀드리지만 군사작전이라든지 정치적 상황, 이런 측면이 아니고 일반인들이 어떤 상황이었는지, 그래서 전체적으로 1편은 힘든 상황이 계속 나온다. 2편에서는 그것을 극복할 수 있었던 힘이 어디에 있었는지 표현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함 위원은 김 PD에게 “과연 일반인들의 가장 큰 애환은 무엇이었냐”며 “12만 2000명이 학살당했다는 것이다. 거기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다. 어떻게 그 사람들의 애환을 얘기했다고 할 수 있나. 돌아가신 분들에게 부끄럽지 않나”라고 물었다. 

김성묵 위원장은 ‘남녘사람’ 이라는 표현을 문제 삼았다. 김 위원장은 “이 프로그램을 보는 사람들은 대한민국 국민 아닙니까”라며 “남녘사람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는데 역사적 사실 관계를 다루는 프로그램 제작에 편견이 개입될 수 있다는 위험성에 대해 어떤 고민을 했나”고 물었다. 결국 해당 프로그램은 중징계를 받았다. 

당시 상황에 대해 김 PD는 23일 미디어오늘과의 인터뷰에서 “어떻게 보면 관점 차이인데 (상대의) 관점을 (위원들이) 전혀 안 받아들이니까 뭐라고 답할 수가 없었다. 그게 아니라는데 (위원들이) 계속 그렇다고 하니까”라며 “‘내가 프로그램을 잘 못 만들었나’, ‘설득을 못 시킨 건가’ 등의 생각이 들었다. 답답했다”고 말했다. 

이번 문건에 대해 전국언론노동조합 KBS본부 관계자는 “이명박·박근혜 정부에서 청와대가 인사를 통해 보도에 관여한 사실들은 많이 드러났다”며 “하지만 박근혜 정부 청와대는 특정 프로그램 편성에까지 관여를 했다. 더 직접적이다. 이런 사례는 처음”이라고 말했다.

방송법 4조 2항은 “누구든지 방송편성에 관해 이 법 또는 다른 법률에 의하지 아니하고는 어떠한 규제나 간섭도 할 수 없다”고 명시하고 있다. 어떤 절차를 통해 청와대 지침이 KBS 보도 심의로 이어졌는지 규명이 필요한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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