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물산과 제일모직 간 합병이 적법했다”는 판결을 두고 보수매체를 중심으로 “특검 기소 논리가 뒤집혔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는 가운데, 이같은 분석이 실제 판결과 괴리가 크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경영권 승계작업이 명시적으로 인정됐음에도 핵심을 간과한 분석이 재생산되고 있다는 지적이다.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16부(부장판사 함종식)는 지난 19일 일성신약 등 삼성물산 주주들이 제기한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간 합병 무효 소송에서 “합병 목적과 합병 비율 등의 절차가 정당했다”며 원고 패소 판결했다.

재판부가 “합병이 삼성그룹 총수 일가의 경영권 승계 및 지배권 강화를 위한 것으로 목적이 부당”하며 “합병 비율이 삼성물산 주주들에게 현저히 불리하게 책정돼 불공정하다”는 원고 측 주장을 모두 기각한 것이다.

▲ 20일자 아주경제 33면
▲ 20일자 아주경제 3면

이를 두고 지난 19~20일 다수 경제지·보수지는 지면을 통해 “삼성이 경영권 승계 작업을 묵시적으로 청탁했다는 특검 논리가 약화됐다”며 “이재용 부회장의 항소심에 긍정적인 영향을 줄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는 평가를 연일 내놨다.

한국경제는 20일자 “‘삼성 합병비율·절차 적법’… 이재용 재판 새 변수” 제하의 기사에서 “합병 문제는 특검 수사의 기둥이었고, 시작과 끝이었다”면서 “핵심적인 개별 현안의 불법성이 부정된 만큼 2심 재판부가 ‘포괄적 승계 작업’의 실체를 판단하는 데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고 분석했다.

동아일보는 20일자 사설 “‘삼성물산 합병 문제없다’… 기소 전제 흔든 民事판결”을 통해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의 부당성은 특검 측 기소 논리의 전제를 이루고 있는데 그 전제가 부인된 것”이라면서 “관련 재판이 진행될수록, 또 상급심으로 갈수록 판결끼리 상충하지 않고 사실과 상식에 부합하는 판결이 내려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총수 일가 지배력 강화됐다” 명시돼… 특검 기소 전제 안 흔들려

하지만 언론의 이같은 분석은 재판부가 이 부회장의 경영권 승계 작업을 합병 목적으로 인정했다는 점에서 부적절하다. 판결문은 “이재용 등 대주주 일가에게 삼성그룹 계열사들에 대한 지배력 관점에서 상당히 긍정적인 효과가 발생했다”며 합병으로 인한 총수 일가의 지배력 강화 사실을 인정했다.

판결문은 “대주주의 경영지배권 행사를 지원하는 역할을 하는 삼성그룹 내 미래전략실이 (합병에) 관여했다”며 “이재용의 동의·승인 하에 합병이 이루어진 점을 인정할 수 있다”고 밝혔다. 경영권 승계 작업을 위해 미전실과 이 부회장이 개입한 점도 사실관계로 받아들인 것이다.

이 부회장 뇌물 사건 1심 재판부는 경영권 승계 작업을 삼성그룹의 ‘포괄적 현안’으로 구분해 이 부회장과 미전실이 개입했다고 인정했다. 삼성물산 합병 무효를 심리한 재판부와 이 부회장의 1심 재판부가 동일한 사실관계를 채택한 셈이다. 1심 재판부는 대통령은 이 부회장의 현안을, 이 부회장은 대통령의 뇌물 요구를 인지하고 있었기에 묵시적 청탁이 성립한다고 봤다.

한 법조계 관계자는 “민사소송에서 사실관계를 다르게 인정해버리면 형사소송에 영향을 미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으면 영향을 미치기 어렵다”면서 “이 경우 사실관계가 다르지 않으니 (재판 중심 쟁점에) 영향을 미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합병 무효 여부와 뇌물죄 성립 여부는 별개”라고 밝혔다. 쉽게 말해 청와대와 보건복지부, 공단 기금운용본부의 불법 개입여부와 별개로 주주총회에서 국민연금의 합병 찬성 의결 자체는 문제 삼을 수 없다고 본 것이다. 기소 전제를 흔든 판결이 아니라는 의미다. 

이와 관련 한 판사는 한겨레와 인터뷰에서 “합병 자체에 하자가 없다는 것과 이 부회장이 합병을 통해 승계작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부정청탁을 건넸다는 것은 본질이 다른 사안”이라며 “이번 판결이 형사 재판에 미칠 영향은 적어 보인다”고 밝히기도 했다. 결국 일부 언론이 삼성 입맛에 맞게 넘겨짚으며 호들갑을 벌인 꼴이다. 

▲ 20일자 동아일보 사설
▲ 20일자 동아일보 사설

서울고법 “합병 비율 객관적이지 못해” 판결에 위배

한편 민사재판 판결 자체가 논란이라는 의견도 있다. 경제개혁연대 실행위원인 이상훈 변호사는 “총수 일가 지배권 유지 외에 경영상 필요라는 목적도 있으니 부당하지 않다고 전제해 뒤따르는 합병 비율, 절차 문제도 모두 적법하다고 인정된 격”이라면서 “부수적 목적이 있어도 행위 부당성 여부는 ‘주된 목적’으로 따지는데, 일반 시민들도 당연히 수긍하는 ‘지배권 유지’라는 주된 목적을 간과하고 지엽적으로 파고든 것”이라고 비판했다.

이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가 서울고등법원이 지난해 5월31일 “삼성물산이 제시한 주식매수가가 너무 낮다”며 삼성물산 소액 주주들 손을 들어준 판례다. 고법은 삼성물산의 실적 부진이 의도됐을 가능성, 삼성 총수 일가에 가장 유리한 시점에 합병이 결의된 정황 등을 이유로 합병 비율이 객관적 가치를 반영하지 못했다고 판단했다. 이번 ‘합병 무효 소송’ 재판부는 정반대의 결론을 내린 셈이다. 그러나 대다수 언론은 이 점을 지적하는데는 소극적이었다. 

수많은 이해관계자가 걸린 문제라 현실적으로 무효 결정을 내리기 어려웠을 것이란 분석도 있다. 가령 ‘선거 무효 소송’에서 무효 선고가 나면 재선거를 치뤄야 하는 현실적 부담이 있듯이, 이와 유사한 합병 무효 소송도 다른 사안과 달리 재판부가 보수적으로 해석 할 수밖에 없었다는 지적이다.

저작권자 © 미디어오늘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