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서대필 조작 사건’ 피해자 강기훈씨가 대한민국 등을 상대로 제기한 국가손해배상 소송 항소심이 시작됐다. 원심이 검찰의 손해배상 책임을 인정하지 않은 데 따른 것으로 당시 검찰의 끼워맞추기 수사 입증이 핵심 쟁점이 될 것으로 보인다.

서울고등법원 제4민사부는 19일 오전 서울법원종합총사 서관 409호 법정에서 강씨와 강씨의 가족 5인이 대한민국, 강신욱 전 대법관(당시 부장검사) 및 신상규 전 고검장(주임검사), 김형영 전 국립과학수사연구원 직원 등을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소송 항소심 제1회 공판을 진행했다. 강씨와 피고 측 김씨의 쌍방 상소에 따른 것이다.

원심 판결은 유서대필 사건의 본질인 검찰의 ‘끼워맞추기 수사’에 면죄부를 줬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1심 재판부는 지난 7월6일 “대한민국과 김씨가 연대해 강씨와 그의 가족에게 6억8600여 만 원을 지급하라”며 원고 일부 승소 판결을 내렸다. 재판부는 검찰의 편향된 수사 및 기소로 인해 손해를 입었다는 강씨 측 주장을 기각, 강 전 대법관과 신 전 고검장을 배상 책임에서 제외했다.

▲ 7월6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린 ‘강기훈 유서대필 조작사건’ 국가배상금 소송 선거공판을 마친 송상교 변호사가 취재진 질문에 답변하고 있다. 이날 재판부는 국가가 사건 당시 불법을 저질러 강씨와 그의 가족 등 5명에게 손해를 끼쳤다며 그 책임을 인정, 5억여 원을 지급해야 한다고 판결했다.사진=민중의소리
▲ 7월6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린 ‘강기훈 유서대필 조작사건’ 국가배상금 소송 선거공판을 마친 송상교 변호사가 취재진 질문에 답변하고 있다. 이날 재판부는 국가가 사건 당시 불법을 저질러 강씨와 그의 가족 등 5명에게 손해를 끼쳤다며 그 책임을 인정, 5억여 원을 지급해야 한다고 판결했다.사진=민중의소리

강씨 또한 검찰의 위법한 수사에 대해 법적 책임을 다시 묻겠다는 입장이다. 강씨 측 변호인은 19일 미디어오늘과의 통화에서 “1심 판결은 마치 김씨가 단독으로 필적을 허위 감정해 이 사건이 우연히 발생한 것처럼 판단했다”며 “검찰은 수사 개시부터 종결까지 일관되게 유서대필자를 지목하겠다는 목적 하에 수사를 진행했고 이후 이어진 가혹행위, 강압수사 등의 문제는 하나의 행위이지 개별로 나눌 수가 없다. 단독 불법 행위로 인해 이 사건이 발생했다고 보는 것은 사건의 본질 자체를 축소시킨 큰 문제라 본다”며 항소 요지를 밝혔다.

변호인은 이어 “당시(1991년) 정권이 위기에 몰려 있었다. 돌파구가 필요했기 때문에 (투신자살의) 배후가 있다는 것을 기정사실로 해놓고 희생자를 찾아가는 방식으로 수사가 진행됐다”며 “원심은 여러 증거 자료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것들을 다 외면하고 판단했기에 항소를 할 수밖에 없었다”고 덧붙였다.

1심 재판부는 “검찰이 고 김기설씨의 필적 증거를 다수 확보했음에도 이를 의도적으로 은폐했거나 수사기록에서 누락시켰다”는 강씨 측 주장을 기각했다. 검찰은 고 김기설씨의 하숙방에서 압수한 일부 필적 증거, 고 김기설씨의 필적이 담긴 서아무개 하사의 수첩 등을 수사기록에서 제외했다.

이들 증거는 김기설씨의 ‘속필체’를 확인할 수 있는 것으로, 강씨가 검찰의 끼워맞추기 수사를 증명하기 위해 내세운 주요 근거다. 당시 검찰은 김기설씨의 ‘정자체’ 필적 증거만 증거목록에 올림으로써 “자취방에서 김기설씨의 필적으로 단정할 수 있는 자료를 찾지 못했다”거나 김씨의 유서 속 글씨체가 김씨의 다른 필적과 다르다고 주장했다.

당시 국과수 직원으로 필적 감정을 맡았던 피고 김형영씨는 김기설씨의 유서 등과 강씨의 화학노트 등 필적 자료를 비교해 ‘동일한 필적’이라는 내용으로 검찰에 회보했다. 김씨의 필적감정서는 강씨가 유서대필을 했다는 누명을 입는데 핵심 증거로 채택됐다.

▲ 1991년 6월22일 언론과 인터뷰중인 강기훈씨(가운데). ⓒ 연합뉴스
▲ 1991년 6월22일 언론과 인터뷰중인 강기훈씨(가운데). ⓒ 연합뉴스
강씨 측 변호인은 일련의 수사 과정을 볼 때 국과수 관계자에게만 손해배상 책임을 물은 것은 “법리적 기교를 이용해 검찰 면책을 시켜 준 것”이라 밝혔다.

1심 재판부는 당시 수사 검사들이 국과수 관계자에게 영향을 주는 행동을 한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검사가 의도적으로 감정 결과에 개입했다고 단정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당시 수사 검사들은 국과수에 감정을 의뢰하며 필적의 작성자나 입수경위를 명시해 전달했고 직접 국과수를 방문해 감정의뢰서를 전달하거나 받아오는 등 국과수 담당 실무자에게 선입견을 갖게 하는 행동을 했다고 인정했다.

국과수 관계자와 검찰에게 ‘소멸시효’를 달리 해석한 부분도 항소심에서 다퉈질 쟁점이다. 1심 재판부는 국과수의 위법 감정은 재심 무죄 판결의 증거가 됐다는 이유로 무죄가 확정된 2015년 5월14일을 소멸시효 기준이라고 판단했다.

동시에 재판부는 “검찰의 불법행위는 인정되지만 소멸시효가 완성됐다”며 강 전 대법관 및 신 전 고검장에 대한 손해배상청구권은 소멸돼다고 판단했다.

재판부에 따르면 강씨는 징역 3년을 선고받은 1991년부터 3년 내에 손해배상 소송을 냈어야 했다. 민법 제766조는 손해 및 가해자를 안 날로부터 3년, 불법행위를 안 날로부터 10년을 소멸시효로 두고 있다.

국가기관이 강씨의 유서대필 조작 주장을 공식적으로 인정한 때는 진실·화해위원회가 진실 규명 결정을 내린 2007년이다. 재심개시가 최종 결정된 시점은 2012년이다. 

서울고등법원은 2008년 강씨의 청구를 받아들여 재심개시를 결정했으나 검사가 재항고했고 대법원은 2012년에 이르러서야 재심 개시를 확정했다. 서울고등법원은 재심을 진행, 2014년 2월13일 강씨에게 무죄를 선고했고 대법원이 2015년 5월14일 검사의 상고를 기각함으로써 강씨는 무죄를 확인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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