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승-전-동성애’라는 말이 있다. 김이수 헌법재판소장 후보와 김명수 대법원장 후보의 인사청문회에서 ‘동성애’가 이슈로 부각됐을 때 나왔다. 두 후보는 그동안 성소수자의 인권을 중시하는 의견을 제시해왔다. 김이수 후보는 결국 국회 문턱을 넘지 못했다. 일부 기독교계가 국회의원들에게 보낸 ‘동성애 인정하는 김이수 절대반대’라는 문자폭탄 때문이었다. 김명수 후보는 가까스로 국회인준을 받았지만, 청문회에서 곤욕을 치렀다. “성 소수자를 인정하면 근친상간·소아성애·시체성애·수간까지 비화할 것”이라는 막말도 나왔다.

성 소수자의 인권은 보호해야 할 중요한 가치이다. 그러나 이에 대한 논란으로 차별금지법 제정은 해묵은 과제가 되었다. 2007년 법안이 발의된 뒤 10년동안 논란만 이어지고 있다. 이른바 ‘동성애 블랙홀’ 때문이다. 차별금지법은 헌법의 평등이념에 따라 모든 영역에서 합리적 이유 없는 차별을 금지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성별 장애 병력 외모 나이 언어 출신지역 결혼여부 종교 사상 성적지향 학력 등을 이유로 차별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문제가 되는 부분이 바로 성적지향이다. 이른바 ‘동성애’나 ‘양성애’ 등을 일컫는다.

차별금지법 반대운동은 개헌논의가 시작되면서 널리 벌어지고 있다. ‘동성애 옹호기관 국가인권위 헌법기관화 반대’ ‘평등원칙중 인종 언어 추가와 성평등 규정 신설 반대’ 등 온라인 서명 운동도 진행중이다. 헌법상 ‘양성 평등’을 ‘성 평등’으로 개정하자는 국회 개헌특위의 의견에 파상공세가 나왔다. “동성애와 성전환이 헌법적 권리로 보장돼 동성애와 동성혼을 허용하려는 꼼수”라는 주장이다. 이와 관련된 법 제도와 지방자치단체의 인권조례 폐지운동마저 일어난다. 일부 국회의원은 이에 동조하여 혐오와 차별을 선동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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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금지의 원칙은 인권을 인권이게 만드는 본질이다. 유엔은 인권선언에 따라 회원국에 차별금지법을 제정토록 권장한다. 유엔 사회권위원회는 2009년에 이어 지난 9일에도 한국정부에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을 권고했다. 사회권위원회는 한국정부가 “차별금지 사유를 둘러싸고 공감대를 형성하기 위하여 적극적이고 효과적인 조치를 충분하게 취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위원회는 법 제정의 ‘긴급성(urgency)’을 지적하고, 18개월 안에 이행상황을 보고해야 할 3대과제 중 하나로 꼽았다. 특히 헌법개정 때 이를 완전하게 반영토록 했다.

유엔 사회권위원회는 사회권 규약(1966년 제정, 1976년 발효)에 가입한 국가들의 규약 이행사항을 점검하는 전문가 그룹이다. 사회권 규약은 국제인권협약으로 차별금지·성평등보장·노동권·사회보장권·건강권·교육권 등을 포함한다. 한국은 1990년 가입한 뒤 2001년, 2006년, 2009년에 이어 올해 네번째 규약이행 심의를 받았다. 권고건수는 2001년 30건에서 2009년 83건으로 크게 늘었다. 무더기 권고가 쏟아진 이명박 정부 이후 올해에도 대부분 되풀이됐다. 이명박·박근혜 정부의 인권성적표가 매우 초라했음을 반증한다.

사회권위원회는 이밖에 “모든 사람이 노조에 자유롭게 가입할 수 있도록 보장하고, 노조활동에 대한 자의적 개입을 예방하도록 노동법을 개정할 것”을 권고했다. 국제노동기구(ILO) 협약 87호(결사의 자유 및 단결권 보호)와 98호(단결권 및 단체교섭권)의 비준도 권장했다. 협약비준은 문재인 대통령의 대선공약이다. 비준이 완료되면 해고자를 조합원으로 두고 있다는 이유로 ‘노조 아님’ 통보를 받은 전국교직원노조나 설립신고를 반려한 전국공무원노조가 합법화할 수 있다. 또다른 해묵은 과제를 풀 수 있는 길이 열리는 셈이다.

▲ 1월14일 저녁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12차 촛불집회에 참가한 시민들이 박근혜 대통령 퇴진을 외치고 있다. ⓒ 연합뉴스
▲ 1월14일 저녁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12차 촛불집회에 참가한 시민들이 박근혜 대통령 퇴진을 외치고 있다. ⓒ 연합뉴스
이제 촛불항쟁 1주년이다. 매서운 추위를 무릎쓰고 광장에서 촛불을 들었던 시민의 요구는 박근혜 퇴진만이 아니었다. ‘이게 나라냐’라는 외침 속에는 인권이 존중받는 사회에 대한 염원이 스며 있었다. 평등하고 공정한 사회에 대한 기대가 용솟음쳤다. 새로운 민주주의를 만들자는 준엄한 요구였다. 그러나 차별금지법에 대한 정부와 국회의 의지는 아직 확고하지 않다. 국회는 반대세력에 동조하거나, 오히려 혐오를 선동하는 데 앞장선다. 문재인 대통령은 2012년 차별금지법 제정을 약속했지만, 올해 문재인 정부 100대 국정과제에서는 누락됐다.

차별금지법은 인간의 존엄과 평등 이념을 실현하기 위한 최소한의 인권기본법이다. 개헌논의가 진행중인 시점에서 차별금지법은 반드시 제정돼야 한다. 정부와 국회는 ‘사회적 합의’ 운운하며 혐오를 선동하는 여론에 귀를 기울여서는 안된다. ‘촛불혁명으로 탄생한 정부’가 촛불민심을 외면할 수는 없다. 인권선진국으로 나아가려면 유엔의 권고를 충실히 이행해야 한다. 문재인 대통령은 내로라하는 인권변호사 출신이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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