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멍에와 책임 제가 지겠다.” 조선일보 10월17일자 1면 제목이다. 파면당한 전직 대통령 박근혜씨 법정 발언을 제목으로 뽑았다. 재판이 시작된 지 6개월 만에 ‘공식입장’을 밝혔다는 점에서 박근혜씨 발언 내용은 충분히 주목할 만하다. 하지만 그것은 발언의 적절성과 문제점, 정치적 의도 등을 함께 짚어낼 때 의미가 있다. 후자 없이 전자에 방점을 찍는다면 박씨 주장을 단순 전달하는 것 외에 다른 의미는 없다.

그런 점에서 일부 언론보도는 유감이다. 박씨 발언을 중계하는 차원을 넘어 그의 주장에 힘을 싣고 정당화하려는 모습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곳이 조선일보다. 조선은 지난 17일자 사설에서 법치를 부정하며 사실상 ‘정치적 선동’을 하고 있는 박근혜씨 궤변을 옹호하는데 무게중심을 실었다.

물론 조선은 박씨를 향해 “법치의 이름을 빌린 정치 보복을 말할 자격이 있는지 의문”이라고 지적하기는 했다. 하지만 사설의 많은 부분은 검찰과 사법부 비판에 할애했다. “검찰과 법원은 편의대로 구속 기간을 연장하는 편법을 써왔다” “법원의 이런 모습이 ‘정치 재판’이라고 반발할 빌미를 준 것은 아닌가” “이미 정치화된 재판이 법률과는 더 멀어질 수밖에 없다”와 같은 대목은 사실상 박근혜씨 법정 발언을 옹호하는 것이나 다름 없다.

▲ 박근혜씨가 구속 연장 후 첫 공판에 출석하기 위해 10월16일 오전 서울중앙지법에 들어서고 있다. ⓒ 연합뉴스
▲ 박근혜씨가 구속 연장 후 첫 공판에 출석하기 위해 10월16일 오전 서울중앙지법에 들어서고 있다. ⓒ 연합뉴스
박근혜씨 ‘법정 궤변’은 그 자체로 문제가 많다. 하지만 문제점 지적 이전에 그의 ‘공식입장’은 보는 이로 하여금 참담함을 느끼게 한다. 국민 앞에 최소한의 사죄나 참회가 없었기 때문이다. 박근혜씨는 파면 당한 전직 대통령이었지만 한때 대한민국 국정 최고책임자였다. 최소한 책임의식이 있다면 늦긴 했어도 국정농단 사태에 대해 반성·사과하는 모습을 보였어야 했다. 하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

돌이켜보면 박근혜씨는 현직 대통령 시절부터 국회와 헌재로 이어지는 탄핵결정에 이르기까지 국정농단에 대해 반성하는 모습을 제대로 보인 적이 없다. 재판이 진행되는 지난 6개월 동안에도 줄곧 침묵으로 일관했다. 재판 과정에서 숱한 증언과 증거들이 나왔지만 박씨는 지난 16일 ‘정치보복’을 주장했다. 재판부의 공정성에 심각한 문제라도 있는 듯 궤변을 펼쳤고 국정농단의 주범인 자신을 정치권력과 사법부의 희생양인 듯 미화했다. 적반하장도 정도가 있는 법이다. 언론이 상식의 눈을 가졌다면 이런 점을 지적하며 박씨를 강하게 비판했어야 했다. 하지만 조선일보를 비롯한 일부 언론은 박씨의 이런 궤변을 지적하기보다 그를 옹호하는데 주력했다.

냉정히 살펴보면 현재의 박근혜를 만든 건 ‘친박세력’만이 아니다. 박근혜씨가 현직 대통령으로 한창 무소불위 권력을 휘두를 때 이를 감시하기는커녕 함께 보조를 맞췄던 일부 언론의 책임도 상당히 크다. 박근혜 정권 폐해와 문제점을 지속적으로 파헤치고 지적해온 건 일부 언론이었지 다수 언론이 아니었다는 점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 박근혜 전 대통령과 최순실 씨에게 뇌물을 제공한 혐의 등으로 1심에서 징역 5년을 선고받고 서울구치소에 수감 중인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10월12일 오전 서울 서초구 고법에서 열린 항소심 첫 공판에 출석하고 있다. 사진=민중의소리
▲ 박근혜 전 대통령과 최순실 씨에게 뇌물을 제공한 혐의 등으로 1심에서 징역 5년을 선고받고 서울구치소에 수감 중인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10월12일 오전 서울 서초구 고법에서 열린 항소심 첫 공판에 출석하고 있다. 사진=민중의소리
‘반성 없는 박근혜’ 못지않게 ‘반성 없는 삼성과 이재용’을 만든 책임도 언론에 있다. 삼성은 ‘삼성 뇌물 사건’ 1심부터 항소심 공판에 이르기까지 무죄를 주장하고 있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대통령의 적극적 요구에 수동적으로 응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삼성이 유리한 성과를 얻었다는 사실도 확인되지 않는다고도 주장했다. 백번을 양보해 삼성 측은 이렇게 주장할 수 있지만 많은 언론이 일방적으로 ‘삼성 대변지’ 역할을 자처하는 건 이해하기 어렵다. 실제 조중동 등 이른바 보수신문을 비롯한 경제지들은 이재용 부회장에 대한 1심 판결 이후 삼성 경쟁력과 대한민국 경제가 흔들릴 것처럼 우려하는 목소리를 쏟아냈다. 하지만 이들의 이런 우려는 호들갑에 불과했다.

염려되는 건 최근 들어 일부 언론이 다시 ‘삼성 띄우기’에 나서고 있다는 점이다. 미래전략실 재편과 관련한 보도가 대표적이다. 많은 언론이 ‘군림 않는 조직’ ‘신속한 경영 판단 장점만 살린다’는 식의 보도를 쏟아냈다. 구체적인 개편안도 나오기 전에 장밋빛 보도가 먼저 나왔다. 구치소에 수감 중인 이재용 부회장과 삼성은 여전히 ‘삼성 뇌물사건’에 대해 공식적으로 사과하지 않고 있지만 이 점을 지적하는 언론은 거의 없다. ‘반성 없는 박근혜’와 ‘반성 없는 이재용’을 만든 건 언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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