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정기 인사 때(오는 12월1일 예상)부터 사장을 비롯해 편성·시사교양·보도 부문 책임자에 대해 임명동의제를 실시하게 된다. 한 번 해보면 (구성원들도) 달라지지 않을까? 아직은 감이 없을 수 있다. ‘사장을 우리가 뽑네’ ‘우리가 동의를 해야 하네’ 이런 느낌을 갖는 것, 그런 과정들이 쌓이면서 구성원들 인식이 바뀌지 않을까 싶다.”

SBS 대주주와 노사는 지난 13일 ‘사장 임명동의제’를 골자로 한 합의문에 서명했다. 전국언론노동조합 SBS본부(본부장 윤창현)가 짧게는 대주주 윤세영 태영건설 회장의 ‘보도지침’ 폭로 이후 약 한 달, 길게는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보도참사 이후 약 1년을 싸워 얻어낸 수확이다. 미디어오늘은 지난 16일 오전 서울 목동에 위치한 SBS 노동조합 사무실에서 윤창현 SBS본부장을 만나 임명동의제 합의 의미와 앞으로의 바람 등을 들었다.

방송사 첫 사장 임명동의제 도입

합의문에 따르면 SBS 대표이사 사장은 SBS 재적 인원의 60% 이상이 반대하면 임명할 수 없다. 편성·시사교양 최고 책임자는 각 부문 인원의 60%, 보도 최고 책임자는 해당 부문 인원의 50% 이상이 반대하면 임명을 철회한다.

▲ SBS 대주주와 노사가 지난 13일 '사장 임명동의제' 등을 합의했다. 사진=언론노조 SBS본부
▲ SBS 대주주와 노사가 지난 13일 '사장 임명동의제' 등을 합의했다. 사진=언론노조 SBS본부

국민주를 기반으로 한 한겨레는 대표이사를 구성원들이 직접 뽑고 있고, YTN은 최근 보도국장 임명동의제를 도입했다. 모두 편집·제작의 자율성·독립성을 지키기 위한 방안이다. 대다수 민영방송사는 대주주의 방송 개입을 차단하는 게 관건이다. 윤 본부장은 “지난 10년을 돌아볼 때 대주주가 일방적으로 사장을 선임하고 사실상 방송을 사유화하는 수단으로 경영진을 구성해왔다고 평가했다”며 “이 부분을 바로잡기 위한 방안”이라고 설명했다.

왜 보도본부장은 50%, 다른 부문은 60%가 반대해야 임명을 철회하도록 정했을까. 비율 역시 대주주와 노조의 협상 결과다. 대주주와 사측은 구성원의 3분의 2, 노조는 50%가 반대할 경우 임명을 철회할 것을 각각 주장했다.

윤 본부장은 “노동조합 조직률이 전 사원의 약 75%인데 (대주주 주장을 받아들이면) 조합원들이 거의 다 반대를 던져야 해서 사실상 제도를 도입해놓고 카드는 쓸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며 “노조도 열심히 조직해야 임명 철회가 가능하고, 회사도 과반 이상의 신뢰를 얻는 인사를 추천하도록 절충점을 찾은 게 60%”라고 말했다. 보도본부장의 경우 방송의 공정성과 독립성이 다른 분야보다 높은 수준으로 보장돼야 하므로 50%로 합의했다.

SBS본부는 정기 인사를 오는 12월1일로 예상하고 있다. 현 박정훈 사장을 대주주가 사장 후보로 추천하더라도 구성원들의 동의를 받아야 임명이 가능하게 된다. 이번 인사부터 대표이사 사장·보도와 교양·편성 부문 최고책임자들을 임명하기 위해선 임명동의 투표 직전 일주일 간 회사는 후보자의 약력·인적 사항을 사내에 공지한다. 투표는 사내 정보시스템을 통해 전자 투표로 인사일 직전 3일 간 진행한다. 임명동의 기준을 충족하지 못할 경우엔 다른 후보를 선정해 1주일 이내에 임명동의 투표를 다시 실시하게 된다. 투표 결과는 적합 여부만 공개하고 인사를 발표하게 된다. 방송사로선 처음으로 시행하는 제도다.

합의문에는 수익 구조 정상화 방안을 위해 앞으로 노사가 협의하겠다는 내용도 있다. 구체적인 내용은 비공개지만 핵심은 SBS의 콘텐츠 수익이 자회사로 흐르는 걸 막겠다는 방안이다. 사외이사가 기존 4명인데 이를 3명으로 줄여 회사와 노조가 각 1명씩 추천하고 나머지 1명은 회사가 추천한 2명 중 1명을 노조의 동의로 정하는 내용도 합의문에 포함했다.

SBS 대주주와 노사는 이번 합의에 강제성을 부여하기 위해 합의문을 2017년도 방송통신위원회 재허가 심사위원회에 제출할 예정이다. 윤 본부장은 “SBS 설립허가 때 창업주 윤세영 회장이 SBS의 세전 이익 15%를 사회에 환원하겠다는 조건을 달았는데 아직도 강제력을 갖는다. 이를 위반할 경우 방통위 제재를 받는다”며 “이처럼 재허가 조건으로 제시한다는 건 사실상 법적 강제력을 갖는다”고 말했다. 

‘리셋SBS’ 이제 시작

SBS 사장 임명동의제 도입에 대한 평가는 긍정적이다. KBS 기자협회는 13일 협회 페이스북 페이지에 해당 소식을 전하며 “언론사에 한 획을 그었다”고 평가했다. KBS·MBC 파업 현장에서도 최근 이 소식을 공유하며 언론노동자들이 공영방송 정상화 의지를 다졌다. 언론개혁시민연대는 “고질적 병폐로 지목된 대주주의 방송 사유화와 전횡을 차단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한 것”이라며 “SBS 정상화가 시작됐다”고 평가했다. 윤 본부장은 “SBS는 물론 SBS A&T 사장(SBS 사장과 기준 동일)을 포함하는 임명동의제 합의는 분명 역사적 성과”라며 “민방은 물론 공영방송에서도 시행된 적 없는 혁신적 제도의 일환”이라고 자평했다.

▲ 박정훈 SBS 사장(왼쪽)과 윤창현 언론노조 SBS본부장이 지난 13일 사장 임명동의제를 합의했다. 사진=SBS 제공
▲ 박정훈 SBS 사장(왼쪽)과 윤창현 언론노조 SBS본부장이 지난 13일 사장 임명동의제를 합의했다. 사진=SBS 제공

애초 SBS본부는 상법상 의결권 법인 신탁을 주장했다. 대주주인 SBS미디어홀딩스의 의결권을 SBS 법인에 맡겨 대주주의 입김을 차단하고, 사실상의 노사 동수 사장추천위원회를 통해 사장을 선출하는 방안이었다. 이럴 경우 사장의 권한이 막강해진다. 따라서 사장을 견제하기 위해 나머지 이사들에 대해 임명동의를 거쳐야 한다는 게 SBS본부의 주장이었다.

하지만 이는 대주주의 결단이 필요한 내용으로 SBS본부가 강제할 수 없고, 줄다리기 끝에 사장 등의 임명동의제를 합의해 낸 것이다. 현실적으로 볼 때 가장 합리적인 선택이라고 볼 수 있다.

이번 합의만으로 SBS가 저절로 회복되지 않는다는 사실도 강조했다. 윤 본부장은 “이번 합의의 소중한 성과를 평가하되 도취되지 않겠다”며 “제도만으로 무너진 신뢰가 돌아오고 미래가 보장되지 않는다”고 했다. 그는 이번 합의를 “우리가 얘기했던 ‘리셋 SBS’의 종착점이 아니라 시작점일 뿐”이라고 했다.

윤 본부장은 “한편으로 엄청 마음이 무겁다”고 말했다. 사내 민주화는 구성원들의 책임 의식을 필요로 한다. 그는 “이제 구성원 개개인이 공동 책임을 지게 되는 것”이라며 “우리가 이전과 똑같은 실수를 저지르면 핑계 댈 곳이 없다”고 말했다.

KBS·MBC 경영진이 무자비하게 언론인을 길들이려 했다면 이와 달리 SBS는 정교하게 언론인을 순치시켰다고 평가할 수 있다. 사측에서 대주주의 사익을 마치 SBS의 이익인 것처럼 포장했고 오랜 기간 반복하면서 구성원들도 일부 이를 받아들였다는 평가가 나온다.

윤 본부장은 “구성원들이 SBS가 (대주주) 태영건설 것, 윤세영 회장 일가의 것이라는 인식에서 벗어나야 한다”며 “과거처럼 수동적으로 일하고 한 사람 한 사람이 언론인으로서 영혼을 담지 않으면 미래가 없다”고 강조했다.

SBS 뿐 아니라 언론계 전체에 영향

지난해 10월 JTBC 태블릿 PC 보도를 계기로 한 최순실-박근혜 국정농단 보도 국면에서 SBS 구성원들의 위기의식이 커졌다. 노조 집행부도 강하게 대응했다. 대선 국면에서 나온 ‘문재인-해수부 거래설’ 오보에 대해 사측을 배제하고 외부 인사를 영입해 보도 과정을 조사했고 그 결과와 사과문을 투명하게 공개했다. 

▲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관련 태블릿PC 보도 직후인 지난해 10월28일 오후 SBS 목동사옥 1층에서 열린 정치권력과 경영진의 보도개입 중단 및 공정방송촉구 조합원 결의대회에서 윤창현 본부장이 발언하고 있다. 사진=이치열 기자
▲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관련 태블릿PC 보도 직후인 지난해 10월28일 오후 SBS 목동사옥 1층에서 열린 정치권력과 경영진의 보도개입 중단 및 공정방송촉구 조합원 결의대회에서 윤창현 본부장이 발언하고 있다. 사진=이치열 기자

SBS본부는 최근의 두 사건을 ‘보도참사’로 규정하고 사측과 보도책임자들을 비판했다. 각 과정에서 보도책임자들 교체가 있었다. 지난해와 올해 집회·모임을 열면 참여하는 조합원들도 많아졌다. 이번 합의로 집행부의 향후 행보에도 탄력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윤 본부장은 “최근 두 차례 조합원 간담회를 했는데 평일인데도 업무를 제쳐두고 170명 정도 왔다”며 “대의원 결의대회 찬성률도 90%”라고 말했다. 조합원 숫자도 윤 본부장이 선출되던 지난해 3월 1077명이었지만 최근 100명 가까이 늘어 1150명을 넘겼다. 내부 동력이 살아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SBS본부는 과거를 반성하는 의미로 지난 10년간 SBS의 적폐를 기록하는 백서작업을 진행하겠다고 밝혔다.

최근 협상 과정을 두고 일각에선 대주주 사임 발표 이후에 ‘그만하면 된 것 아니냐’ ‘조직에 혼란을 조장한다’는 비난이 나왔다. 하지만 윤 본부장에게는 아직 가야할 길이 멀다. 

윤 본부장은 “대주주가 지금까지 방식으로 (계열사로) 수익을 잠깐 빼 가면 당장 이로울 수 있지만 결국 SBS가 망가지면 (대주주 이익도) 오래갈 수 없다”며 “SBS라는 거위의 배를 가르는 식이 아니라 잘 먹이고 잘 찌워서 건강하게 해서 황금알을 계속 낳도록 하는 게 대주주에게도 이익”이라고 말했다. 이는 대주주의 전횡으로 몸살을 앓고 있는 다른 민방에도 적용되는 메시지다. 상법상 민간기관이면서 방송법 지배를 받는 이중적 구조를 함께 고민해야 하기 때문이다.

윤 본부장은 “배수진을 치고 싸우는 KBS·MBC 동지들의 절박함에 100% 공감하고, 두 조직 조합원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며 향후엔 “방송의 독립성·자율성이 온전하게 보장될 수 있는 제도적 틀을 다시 손봐야 한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그는 “(국회에서 논의 중인) 현 방송법 개정안은 극심한 불균형을 조금 완화시키는 정도이고, 그것도 정치권 간 불균형을 한시적으로 잡는 것일 뿐”이라며 “시민과 구성원들에게 방송을 되돌릴 수 있는 제도를 만드는 게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덧붙여 “SBS의 이번 합의가 법적인 틀로서 한국 언론 전체에 적용돼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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