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보수 정권에서 노무현·이명박 전 대통령에 대한 KBS 보도 행태는 큰 차이를 보였다. 살아있는 권력에는 약했다. 대신 죽은 권력에는 강했다. 미디어오늘이 입수한 김인규 전 KBS 사장 재임 시절(2009년 11월~2012년 11월) 3년치 임원 회의록 곳곳에서 이런 경향이 드러났다.

2010년 8월13일 KBS ‘뉴스9’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 차명계좌 때문에 자살했다”는 허위 사실을 주장한 조현오 경찰청장 내정자 발언을 단독 보도했다. 조 전 청장은 이 발언으로 재판에 넘겨졌다. 대법원은 지난 2014년 3월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과 유족들의 명예를 훼손한 혐의로 징역 8월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노 대통령 차명 계좌는 진실게임 양상”

‘조현오 막말 동영상’은 당초 KBS 시사 프로그램 ‘추적60분’에서 보도할 계획이었다. 추적60분 제작진은 앞서 두 달 전 노 전 대통령에 대한 근거없는 비방이 담긴 동영상을 입수해 취재했고 조 전 청장이 경찰청장에 내정된 뒤 방송할 것을 결정했다.

하지만 8월13일 이화섭 시사제작국장이 제작 중단을 지시하고 조 전 청장 발언 가운데 ‘노무현 차명계좌’를 심층 취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는 폭로가 내부에서 제기되면서 논란이 일었다. 데스크와 달리 제작진은 “여러 채널로 취재한 결과 차명계좌 존재는 사실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고 판단했다.

▲ 조현오 전 경찰청장. 사진=이치열 기자
▲ 조현오 전 경찰청장. 사진=이치열 기자
또한 언론노조 KBS본부(KBS 새노조)는 “이화섭 국장은 본인이 관장하고 있는 시사제작국 소속 기자가 취재해 온 팩트를 사회부에 흘려줬다”며 해당 아이템이 ‘뉴스9’으로 넘어간 과정도 폭로했다.

KBS 시사제작국은 “조현오 내정자의 ‘발언의 적절성’만으로 방송을 하는 것은 ‘추적60분’의 통상적 취재나 제작 방식에 비춰 대단히 이례적이니 ‘노 전 대통령 차명계좌, 있었나 없었나’로 심층 취재를 하는 방향으로 의견이 모아졌다”고 반박했다. 그러나 추적60분 제작진과 KBS 새노조는 제작 자율성을 침해한 사례로 꼽고 책임자 사과와 문책을 요구했다.

김인규 전 사장 재임 시절 KBS 임원회의에서도 이 문제가 다뤄졌다. ‘뉴스9’ 단독 보도 이후인 2010년 8월16일 김 전 사장은 “조현오 청장 발언은 KBS 특종”이라며 “여러분도 발언을 조심하라. 노 대통령 차명 계좌는 진실게임 양상”이라고 주장했다.

8월18일 임원회의에서 김 전 사장은 “조현오 (보도를) 어렵게 특종해놓고 감추는 것 같이 웃기는 일”이라며 “KBS 직원이 습득한 정보는 개인의 것이 아니라 회사의 것이다. 자기 것인데 왜 다른 사람이 내냐는 인식은 언론 윤리의 문제다. 신입사원 연수 때 언론인 윤리 교육을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후 이어진 김 전 사장의 ‘문제적 발언’은 “차명계좌 건은 장기적으로 취재하라”였다. 이는 노 전 대통령의 차명 계좌 여부를 심층 취재하라는 지시로 특종의 주인공인 추적60분 제작진 판단과는 동떨어진 지시였고 팩트에 기반한 것도 아니었다. 노 전 대통령 관련 아이템을 계속 끌고 가기 위해 ‘추적60분’보다 아이템 컨트롤이 쉬운 ‘뉴스9’에서 다룬 것은 아닌지 의심이 드는 대목이다.  

아울러 김 전 사장은 노무현 정부 때 임명돼 이명박 정부 시절 ‘불법 해임’된 정연주 전 KBS 사장에 대해 “정연주라는 방송 모르는 사람이 정치적 이념으로 무리하게 위계질서를 흐트러뜨렸다”(2010년 12월31일 임원회의록 中)며 반감을 내비치기도 했다.

“100일 남은 G20 왜 이리 조용하나”

언론이 전직 대통령 의혹을 파헤치는 것은 당연한 책무이나 어디까지나 근거에 기반해야 한다. 김 전 사장이 이명박 전 대통령 관련 보도에서 보인 태도를 고려하면 앞서 차명계좌 여부 취재 지시는 고개를 갸우뚱하게 할 뿐더러 KBS 사장의 취재 지시는 방송 편성 개입 금지를 명문화한 방송법 위반 소지가 있다.

2010년 8월9일 임원회의에서 김 전 사장은 MB 정부의 8·8 내각을 언급하며 “총리에 40대를 기용했다. 김태호(당시 국무총리 후보자·전 새누리당 최고위원)가 누구인지 관심 많다. 뉴스라인(KBS 심야 뉴스 프로그램) 섭외가 필요하다”며 “개각 통해 정부 의지 드러났다. 젊은 층과의 소통이다. 집권 후반기 의지”라고 설명했다.

이어 김 전 사장은 MB 정부가 내세웠던 ‘G20 정상회의’를 언급했다. “G20이 100일 정도 남았는데 조용하다. KBS가 주관방송사인데 외국 메이저 언론들은 톱으로 다뤘다. 건국 이래 20개국 정상이 몰려오는 것은 놀라운 이야기다. 현 정부에 긍정적으로 (보도)해주는 것처럼 여기는 게 문제인데 이는 역편파다. 어떤 사람이 왜 오고 무슨 일을 하는 것인지 알릴 필요가 있다. 나라별 호텔 예약, 경호 준비 등은 관심사다.”

▲ 경향신문은 2010년 10월29일자 사설에서 “G20 회의가 국운 상승과 선진국 도약의 계기라고 선전하는 정부에 공영방송 KBS가 적극 호응하는 보도행태가 지나쳐 보인다”고 지적했다.
▲ 경향신문은 2010년 10월29일자 사설에서 “G20 회의가 국운 상승과 선진국 도약의 계기라고 선전하는 정부에 공영방송 KBS가 적극 호응하는 보도행태가 지나쳐 보인다”고 지적했다.
KBS의 G20 보도는 지나친 홍보 특집으로 많은 비판을 받았다. KBS 새노조 조사에 따르면 그해 7월3일 ‘G20 특별기획-희망로드 대장정’ 시리즈를 시작으로 KBS가 방송했거나 방송 예정인 G20 관련 특집 프로그램이 TV에만 60여편, 편성 시간으로는 55시간(3300분)이었다. 경향신문은 10월29일자 사설에서 “이 회의가 국운 상승과 선진국 도약의 계기라고 선전하는 정부에 공영방송 KBS가 적극 호응하는 보도행태가 지나쳐 보인다”고 지적했다.

김용진 KBS 기자(현 뉴스타파 대표)는 그해 11월11일 미디어오늘 기고를 통해 “김인규 사장을 필두로 한 KBS의 수뇌부는 불과 1년여 만에 KBS를 이명박 정권의 프로파간다 도구로 전락시켰다”며 “그러면서도 입만 열면 공영방송의 가치, 공정성 등을 내세운다. G20 같은 정례 행사에 수천 분을 편성해 정권 홍보를 자행하면서도 공영방송 운운 하는 것은 인지부조화의 전형”이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김 기자의 미디어오늘 투고는 다음날 임원회의에 보고됐고 김 전 사장은 “이 친구(김용진) 옛날부터 사고친 인물 아니냐”라고 말한 뒤 “G20과 관련 없는데 (외부에서) 남발하는 것 많다. 쓸데없이 (G20 보도 등이) 많은 것처럼 보여 약점 잡히지 마라”고 임원들에게 주의를 줬다.

그러면서 김 전 사장은 “이 친구(김용진) 논리에 대응하려면 소수의 시각에 대한 대응이 필요하다. 관련 부서가 검토하라”며 “방송문화연구소는 김용진 주장과 말을 분석하라. 올림픽 기준으로 국제 행사, 월드컵 등 데이터 분석이 필요하다. 박사들이 그런 것을 해야 한다”고 지시했다.

김 기자는 KBS의 G20 과잉 홍보를 비판하는 미디어오늘 기고를 이유로 2010년 12월 정직 4개월 중징계를 받았고 이듬해 2월 정직 1개월이 확정됐다. 김 기자는 2013년 2월 KBS에 사표를 제출하고 현재는 뉴스타파 대표로 후배들의 탐사 보도를 이끌고 있다.  

▲ KBS 탐사보도팀과 미디어포커스 출범을 주도한 김용진 뉴스타파 대표의 모습. 사진= 김도연 기자
▲ KBS 탐사보도팀과 미디어포커스 출범을 주도한 김용진 뉴스타파 대표의 모습. 사진= 김도연 기자
“MB가 KBS 보고 난리난 모양”

대표적 MB 정부 실정으로 꼽히는 ‘자원외교’도 비슷한 경우다. 김 전 사장은 2010년 8월16일 임원회의에서 “볼리비아가 리튬이 엄청나다는데 국교 수립 45주년 성과로 TV쪽에서 다뤄볼 만하다”고 말했다.

다음날인 17일 KBS 뉴스9 톱뉴스 제목은 “볼리비아 리튬 선점 청신호”였다. 볼리비아 정부가 리튬 개발을 두고 한국 정부와 양해각서 체결을 검토하고 있다는 내용으로 곧바로 이어진 리포트(제목 “차세대 에너지원”) 역시 “볼리비아 광산 선점이 가져올 의미”를 다뤘다.

8월26일자 뉴스9에서도 “리튬 공동 개발”이라는 제목으로 한국과 볼리비아의 ‘리튬 개발에 관한 양해각서’ 체결 소식을 다뤘고 그 다음 리포트에선 무려 7분을 할애해 “치열한 ’자원전쟁’의 현주소”를 다뤘다. 볼리비아 자원 개발이 완벽한 실패로 끝났다는 점에서 KBS가 허울뿐이던 MB정부 자원외교 홍보 역할만 했다는 비판에 직면했다.

MB 정부가 구제역 대책 실패로 비난 받던 2011년 2월17일 KBS 뉴스9은 ‘이슈&뉴스’ 코너를 통해 정부가 서두른 가축 매몰 처분을 비판했다. 다음날인 18일 김 전 사장은 임원회의에서 “이슈앤뉴스 ‘구제역’에 장관들 충격 받은 것 같다”며 “MB가 보고 난리난 모양”이라고 말했다.

▲ 김인규 전 KBS 사장(왼쪽)과 이명박 전 대통령. 사진=이치열, 연합뉴스
▲ 김인규 전 KBS 사장(왼쪽)과 이명박 전 대통령. 사진=이치열, 연합뉴스
이명박 대통령도 18일 구제역 점검회의에서 “미국산 쇠고기 파동이 났을 때 미국 쇠고기를 먹으면 광우병에 걸린다는 과학적 근거 없는 괴담이 돌아 걱정이 많았다”며 “이번에는 그런 일이 없도록 과학적으로 증명해서 이해시켜 달라”고 주문했다. 이 발언 이후 KBS 보도에서 구제역 침출수 문제가 사라졌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KBS 새노조는 “대통령 발언 이후 KBS 보도에서 구제역 침출수 문제가 갑자기 사라지다시피 하고 있다”며 “그 배경의 일단에는 간부진의 침출수 보도 자제 요청이 있었음이 확인되고 있다. 지난 금요일 일부 제작 현장에서는 ‘구제역 침출수 아이템을 자제할 것’이라는 지시가 내려졌다”고 주장했다. 김 전 사장이 임원회의에서 보여준 반응을 생각하면 KBS 보도 축소는 예고된 일이었다.  

이명박 대통령 부부는 2010년 9월21일 추석특집으로 방영된 KBS 아침마당 ‘대통령 부부의 사람 사는 이야기’에 출연했다. 김인규 전 사장은 임원회의에서 “1년에 300여 명이 출연하는데 균형감각으로 봐야 한다”며 “추석 연휴 첫 날 대통령 부부가 특정 프로그램에 출연한 것은 처음인데 나름 의미 있다. 교양국 중심으로 수고가 많았다”고 치하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퇴임 직전인 2013년 2월 ‘지상파 방송의 디지털 전환’을 이유로 김인규 전 사장에게 ‘은탑 산업훈장’을 수여했다. MB 언론 특보 출신인 김 전 사장은 현재 경기대 총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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