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여름, 노광일씨(60)를 만났다. 더블루K 사무실 건물 관리인으로, JTBC기자가 최순실의 태블릿PC를 확보하는데 결정적 도움을 준 인물이다. 그가 더블루K 건물관리인으로 일을 시작하고 몇 달 안 된 2016년 초 더블루K 사무실이 들어섰고, ‘그들’은 그해 9월 이사를 떠났다. 노광일씨가 ‘기자들을 도와주면 내가 귀찮아진다’라는 생각으로 비어있던 사무실 문을 끝내 열어주지 않았다면, 세상은 어떻게 흘러갔을까. 짓궂은 상상을 해본다.

지난해 10월24일 JTBC의 최순실 태블릿PC 특종은 박근혜를 파면하고 조기대선에 이어 적폐청산을 사회적 화두로 이끌어낸 시민혁명의 스모킹 건이었다. 노광일씨는 지난 4월10일 최순실 공판에 증인으로 출석해 “JTBC는 손석희 사장이 있어 진실에 입각해 보도한다고 판단해 협조했다”고 증언하며 “언론이 제 역할을 해야 공정한 사회가 된다. 그동안 언론이 제 역할을 못해 이런 현실이 됐다고 생각해왔다”며 소신을 밝히기도 했다.

▲ JTBC 2016년 10월24일자 보도화면.
▲ JTBC 2016년 10월24일자 보도화면.
손석희 JTBC보도담당 사장과 JTBC는 올해 각종 여론조사에서 압도적인 언론계 ‘원톱’에 올라섰다. 지난해 10월18일 JTBC기자에게 문을 열어줬던 노광일씨는 자연스레 잊혀졌다. 음료 한 박스를 들고 찾아간 노광일씨의 일터는 여전히 어둡고 눅눅했다. 그는 홀로 앉아있었다. 벽 한 편에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사진이 보였다. 그는 기자들과의 접촉을 피하고 있었다. 자신이 부각되는 게 부담스럽다고 했다.

국정농단 사태가 어느 정도 진정되고 나서, 노광일씨는 손석희 사장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손 사장은 그에게 심심한 감사인사를 전했다고 한다. 그는 지난해 국정농단 보도를 주도했던 김의겸 한겨레 기자에게 마음을 열고 딱 한 번 인터뷰에 응했다. 김의겸 기자가 한겨레를 떠났다고 전하자, 그는 한겨레가 정말 소중한 사람을 잃었다며 안타까워했다.

전남 함평이 고향인 노광일씨는 중학교를 마치고 서울로 상경해 방송통신대를 나와 제약회사에서 27년간 일했으며 한겨레 창간독자이자 노무현재단의 평생 후원 회원이다. 그는 뉴스타파와 국민TV 등 대안매체의 정기 후원자였으며, 팟캐스트 애청자였다. 그는 정권이 교체되기 전까지 줄곧 신변에 위협을 느껴왔다고 했다. 하지만 후회는 없다고 했다. 그는 오히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자신을 더블루K 사무실이 들어섰던 그 건물의 관리인으로 보냈던 것 같다며 그를 추억했다. 그의 가방에는 여전히 노란 리본이 달려 있었다.

1년 전, 그 누구도 올 추석 연휴에 문재인 ‘대통령’이 교통방송에 출연해 교통정보를 전할 거라고는 예상할 수 없었다. 미국·일본·프랑스·독일 등 극우진영이 세계적으로 강세를 보이는 지금, 그 흐름을 거스르며 시민혁명을 이뤄낸 한국사회의 2017년은 위대했다.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았던 권력을 무너뜨린 건 노광일씨처럼 평범하지만 용기 있는 사람들이었다.

수년 전 지시사항을 이행하지 않았던 문화체육관광부 체육국장 노태강씨는 ‘참 나쁜 사람’으로 쫓겨났고, 훗날 이 사건이 박근혜의 발목을 잡았다. K스포츠재단 부장 노승일씨도 있다. 과거 그에 대한 평가는 제각각일 수 있으나 노승일씨가 국정농단 국정조사 청문회에서 내부고발자로서 많은 것들을 폭로했던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노광일·노태강·노승일 등등 수많은 사람들이 제 자리에서 정의를 지킨 덕분에 우리들은 ‘오늘’을 쟁취할 수 있었다.

얼마 전 노광일씨로부터 문자 한 통을 받았다. 미디어오늘 팟캐스트 ‘미오캣’을 듣고 보내온 문자였다. “그동안 공영방송에 대한 불신이 너무 컸는데 오늘 미오캣을 청취하면서 희망을 갖게 됨을 감사드립니다. 앞으로 저도 시민으로 공영방송이 정상화 되는데 관심을 갖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노광일 드림.” 

추석 연휴를 맞아 고마웠던 사람들을 떠올려본다. 노광일씨처럼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했던 정의로운 사람 모두가 제대로 된 대접을 받고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가질 수 있기를 소망해본다.

저작권자 © 미디어오늘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