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각오>. 국 전 직원은 지난해의 여소야대 정국 초래, 종북좌파 세력 척결 미진 등을 깊이 자성하고 금년에는 침과대적(枕戈待敵·창을 베고 적을 기다린다)의 결연한 각오로 국정 흐름을 주도하면서 종북세력 뿌리뽑기에 진력하겠습니다.” (국정원 문건 중)

한학수 MBC PD가 29일 이명박 정부 국정원의 MBC 장악 문건 관련 검찰 조사를 마친 후 취재진에게 읽어준 국정원 문건 일부 대목이다. “국정 운영 저해 세력 색출 활동 강화로 정부 정책 추동력 배가”가 적힌 문단 마지막에 실린 국정원의 ‘각오’다.

▲ MBC 콘텐츠제작국 소속 한학수 PD가 9일 서울 상암동 MBC 로비에서 &#039;블랙리스트&#039; 규탄대회에 참여해 콘텐츠제작국 제작거부를 선언하고 있다. 사진=전국언론노동조합 MBC본부 제공
▲ MBC 콘텐츠제작국 소속 한학수 PD가 9일 서울 상암동 MBC 로비에서 '블랙리스트' 규탄대회에 참여해 콘텐츠제작국 제작거부를 선언하고 있다. 사진=전국언론노동조합 MBC본부 제공

한 PD는 이날 오후 6시20분경 서울중앙지검 1층 로비에서 기자들과 만나 “이건 (국정원이) 국내 정치에 공공연하게 개입했고 그 성과가 미진했다는 것을 스스로 자성하면서 더욱 더 개입하겠단 것”이라며 “‘우리의 각오’를 보면서 과연 우리나라 정보기관이 맞는지 그런 생각을 했다”고 말했다.

한 PD는 원세훈 국정원장 지시로 2010년 3월 작성된 ‘MBC 정상화 전략 및 추진 방안’ 문건 원문을 살펴본 결과 “지역 계열사 사장들에 대한 인물 품평부터 PD수첩 PD 몇 명의 이름을 적시해 좌경PD라고 규정했고, 심지어 MBC 스페셜에 있는 PD 6~7명에 대해 친북좌파PD라고 적시했다”며 “사찰 혹은 내부 협력자 도움없이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예를 들어 지방 계열사 사장의 경우 ‘친노 활동을 했었다’거나 특정 활동을 거론하며 ‘친북좌파 활동을 했었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한 PD에 따르면 50~60명 규모의 시사교양국 인원 중 열 대여섯명이 좌익PD로 규정됐다.

한 PD는 “MBC 조직 개편 방향으로 PD수첩을 어떤 식으로 넣자, 시사교양국을 어떻게 해체하자 등의 내용이 다 적혀 있었다. 실제로 이후 경과를 놓고 보면 다 집행된 것이라 참담했다”며 “MBC를 완전히 수족 부리듯 운용했다는 점에서 방송사 하나를 통째로 말아먹은 것”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국정원 직원에 협조한 내부 MBC 공범자들도 밝혀져야 한다”고 말했다.

한 PD는 “이 문건은 최초 시나리오에 불과하다. 그 뒤 중간 보고나 성과 관련 문건은 국정원에서 계속 생산했을 것”이라며 “그 뒤에 만들어진 모든 국정원 자료들도 공개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어 “국정원이 이토록 MBC를 장악했다면 도대체 원세훈 국정원장은 누구에게 이것을 보고했느냐”며 “원세훈 국정원장이 답을 할 차례”라고 밝혔다.

한 PD는 조사받는 동안 A4 크기 이면지에 직접 문건 내용 일부를 적었다. 그는 “’PD수첩’, ‘시선집중’ 등 좌편향 프로그램 제작진의 경우 담당 PD는 물론 프리랜서, 작가, 외부 출연자들까지 전원 교체” “노조·야권에 빌붙어 편파·왜곡 방송을 주도해 온 제작·보도·편성본부 국장급 간부 전원 교체 및 건전성향 인사로 전진 배치” 등을 기자들 앞에서 읽었다.

이날 오전 10시께 서울중앙지검에 출석한 한학수 PD는 8시간 가량 참고인 조사를 마친 뒤 귀가했다.

한 PD는 2005년 황우석 논문 조작 사건을 밝힌 MBC 대표 PD로 유명하다. 그러나 2010년 김재철 전 MBC 사장이 취임한 이후 수차례 부당전보 조치를 받았다. 그가 설명한대로 2011년 5월 경인지사 수원총국 전보를 시작으로 2012년 MBC 아카데미, 2014년 신사업개발센터, 2015년 편성국 송출 주조정실 등 비제작부서를 전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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