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부터 8월까지 이어진 ‘문화계 블랙리스트’ 1심 재판에선 소동이 가끔씩 벌어졌다. 방청을 온 블랙리스트 피해자들이 때때로 모르쇠로 증언하는 피고인에게 “거짓말 하지 말라”며 고함을 치거나 ‘엉엉’ 소리를 내며 울었다. 당시 법정 밖으로 끌려 나온 한 예술감독은 블랙리스트를 “예술인의 손목을 꺾는 검열”이라면서 “생존을 가지고 문예인을 길들이는 것”이라 일갈했다.

정부가 이 같은 블랙리스트를 지난 9년 간 지속적으로 ‘가동’해 온 사실이 밝혀지고 있다. 처음엔 박영수 특검팀의 수사로, 이후엔 국정원 적폐청산TF의 조사로 물증이 잡히면서다. 이명박·박근혜 정부 모두 정부 비판적인 인물 및 단체에 지원금을 끊거나 인사상 불이익을 줌으로써 이들을 솎아냈다. 국가정보원은 이 과정을 음지에서 지원한 기관이다. 국가의 고급 정보력이 안보와 무관한 분야에, 공익을 해치는 수단으로 10년 가까이 낭비돼왔다.

▲ 이명박·박근혜 정부 동안 가동된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가 박영수 특별검사팀의 수사와 국정원 적폐청산 TF 조사를 통해 진상이 규명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사진공동취재단
▲ 이명박·박근혜 정부 동안 가동된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가 박영수 특별검사팀의 수사와 국정원 적폐청산 TF 조사를 통해 진상이 규명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사진공동취재단


국정원, “좌편향 시정해라” 권고… 블랙리스트 등재 인물도 알려줘

특검 수사 결과를 보면 박근혜 정부는 2013년 8월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이 부임할 때부터 문화계 블랙리스트를 작성해 대통령이 탄핵소추되기 전까지 가동했다. 김 전 실장이 수석비서관회의 등에서 ‘종북세력이 문화계를 15년간 장악했다’며 블랙리스트 작성 지시를 내리면 ‘교육문화 수석비서실→문화체육관광부 예술정책과→문체부 산하 기관’까지 조직적으로 지시가 전달돼 블랙리스트가 작성된 식이다.

국정원은 이 과정에서 블랙리스트를 활용해야 한다는 기조를 강화하는 역할을 했다. 김 전 실장은 국정원이 작성한 ‘시․도 문화재단의 좌편향․일탈 행태 시정 필요’, ‘좌성향 세력의 세 확산 기도 등 문화관련 이념문제’ 정보보고 문건 등을 참고했다. 김 전 실장에 징역 3년을 구형한 블랙리스트 1심 재판부(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30부)는 “국정원이 작성한 정보보고 문건 등이 대통령과 대통령비서실 등에 보고되면서, 대통령을 풍자하거나 정부비판 여론에 찬동하는 문화예술인들에 대한 정부지원은 부적절하다는 기조가 청와대 내부에 확산되었다”고 밝혔다.

‘시․도 문화재단의 좌편향․일탈 행태 시정 필요’을 보면 “□ 단체장의 인사권 오남용, 간부․사업의 좌편향 등 문제점”이란 소제목 아래 “서울문화재단은 국보법폐지국민연대 공동대표를 지낸 김○○이 이사장에 선임되고 이사진 12명 중 전교조·참여연대 출신 등 좌성향 인물 5명, 광주문화재단은 인민해방군가를 작곡한 월북음악가 정○○ 추모음악제, 대통령님 모독그림을 그린 홍○○이 회원으로 활동 중인 광주 민예총 주관 행사 지원, 부산문화재단은 한대련 등 좌편향 단체 후원 확대” 등이 적혀 있다.

블랙리스트가 본격적으로 작성되던 시기, 김 전 실장이 모철민 전 교문수석을 통해 유진룡 전 문체부 장관에 하달한 국정원 작성 문건에도 특정 예술인과 단체 이름이 ‘좌편향된 예술인’으로 지목돼있다. 문건은 “예술위(한국문화예술위원회)는 2014년 상반기 문예진흥기금 지원대상을 선정하였는데 지원대상에 좌파단체인 민예총 산하 ‘민족미학연’, 이념편향성 연극으로 물의를 빚은 극단 ‘혜화동1번지’, ‘서울프린지네트워크’, 좌성향 ‘작가회의’ 소속으로 정부를 비판해 온 고○○, 박○○, 신○○ 등이 포함됨”이라며 “이는 지원대상 선정을 민간전문가들로 구성된 심의위에 맡긴데다, 심의위원도 대중적 인기·지명도를 우선 고려하는 관행에 따라 좌성향 인물들이 포함되기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다. 문체부는 책임심의위원 후보자 105명의 블랙리스트 명단을 작성해 청와대에 보고했고 후보자 19명이 2014년도 예술위 책임심의위원 선정에서 배제됐다.

▲ 지난 2015년 1월9일 조윤선 전 청와대 정무수석이 김기춘 전 대통령 비서실장에게 물을  전달하고 있다.  ⓒ연합뉴스
▲ 지난 2015년 1월9일 조윤선 전 청와대 정무수석이 김기춘 전 대통령 비서실장에게 물을 전달하고 있다. ⓒ연합뉴스


문체부 직원들은 청와대와 국정원이 알려주는 예술 단체 및 예술인 명칭을 지속적으로 블랙리스트 명단에 올렸다. 명단을 관리한 문건엔 ‘연극, 무용분야 해당없음-K(15.12.21)’ ‘B확인(1.21)’ ‘추가통보(B)’ 등이 반복적으로 적혀 있다. ‘연극, 무용분야 해당없음-K(15.12.21)’ 부분은 국정원(K)이 2015년 12월21일 국제교류공모사업 연극·무용 분야 응모자 중 블랙리스트에 해당되는 사람이 없다고 밝혔다는 뜻이다. B는 청와대를 뜻한다.

문체부 직원들은 법정에서 국정원 직원으로부터 수시로 관련 내용을 전달받고 명단을 보충했다고 밝혔다. 특검 관계자는 이와 관련 “위에서 하도 지시가 내려오니 문체부 직원들이 기관을 출입하는 국정원 직원에게 명단 업데이트를 계속 문의했던 게 아니겠느냐”고 지적했다.

정부와 국정원의 조직적 지원 배제 속에서 3여 년 동안 약 320개 정도의 단체 또는 개인이 예술위 지원기금에서 배제됐다. ‘세종도서’ 지원 등 출판지원금 부문에선 22권의 도서가 선정에서 배제됐다. 2014~2015년 동안 ‘동성아트홀’, ‘인디스페이스’, ‘아리랑시네센터’, ‘독립영화전용관 확대를 위한 시민모임’ 등이 영화상영관 지원에서 배제됐다. 2015년 부산국제영화제는 다이빙벨 상영을 강행한 후 정부지원예산이 14억 6천 여 만 원에서 8억 원으로 삭감됐다. 박찬경 영화감독, 이송희일 감독, 오멸 감독 등은 2015년 예술영화 지원사업에서 표적 탈락했다. 블랙리스트에 오른 문화예술계 전문가 혹은 원로 19명은 2014년 ‘예술위 책임심의위원’에서 빠졌다.

블랙리스트 등재 기준은 ‘정부 비판 활동’이다. 명단엔 지원 배제 사유로 ‘광우병 대책회의’, ‘박근혜 못 살겠다 증언대회’, ‘박근혜 정부에 어리석음과 안타까움을 넘어 분노를 느낀다’, ‘문재인지지’, ‘세월호 참사 대통령 책임 시국선언’, ‘5·18 관련 창작물’, ‘역사교과서 국정화 반대’ 등이 적혀 있다. 모두 국가정보원의 정보 활동 대상으로 보기 힘든 사회적 의제들이다.

박영수 특검팀의 수사 대상은 김 전 실장, 조윤선 전 청와대 정무수석 등을 비롯한 청와대 고위 관료였다. 특검팀은 이들이 블랙리스트 집행에 대한 권한을 가지고 있다고 판단, 공무원들에게 의무에 없는 일을 강제한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 혐의로 법정에 넘겨 전원 유죄를 이끌어냈다.

MB정부 5년 간의 블랙리스트 의혹, 모두 사실이었다

특검 수사가 한 차례 진행됐음에도 박근혜 정부의 블랙리스트는 재조사가 필요한 부분이다. 이유는 이명박 정부 당시 블랙리스트 사건에서 엿볼 수 있다. 이명박 정부의 ‘블랙리스트 행동대장’은 국정원으로 지목된다. 국정원 적폐청산 TF는 ‘MB정부 시기 문화·연예계 내 정부 비판세력 퇴출 사건(이하 연예계 블랙리스트)’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국정원의 퇴출압박 활동 내용이 담긴 문건을 다량 발견했다. 박근혜 정부의 국정원도 블랙리스트 가동에 더 깊이 연루됐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문화예술계 핵심 종북세력 명단(총 82명)’은 국정원이 작성한 이명박 정부 블랙리스트 명칭이다. 2008년부터 2011년까지 이명박 대통령 임기 내내 블랙리스트 논란에 휩싸인 연예인들이 대부분 포함돼 있다. 2008년 10월 ‘윤도현의 러브레터’에서 하차한 가수 윤도현씨, 2009년 9월 KBS 2TV ‘스타골든벨’에서 하차한 김제동씨, 2010년 MBC 라디오 ‘세계는 그리고 우리는’에서 돌연 하차한 김미화씨, 2009년부터 8년 동안 공중파 드라마 출연을 하지 못한 문성근씨 등이 대표적이다. 국정원 개혁위는 원세훈 전 국정원장이 2009년 2월 취임 이후 블랙리스트 가동을 지시했다고 특정했다.

▲ 지난 9월13일 언론노조 MBC본부 총파업 결의대회에 참석한 김제동씨가 연대발언을 하고 있다. 사진=이기범 언론노보 기자
▲ 지난 9월13일 언론노조 MBC본부 총파업 결의대회에 참석한 김제동씨가 연대발언을 하고 있다. 사진=이기범 언론노보 기자


청와대와 국정원 간 면밀한 지시·보고 체계도 발견됐다. 청와대는 2009년 9월 영화감독 및 방송 PD 동향 파악(‘좌파성향 감독들의 이념편향적 영화 제작 실태 종합 및 좌편향 방송PD 주요 제작활동 실태’)을, 2010년 4월엔 방송인 정부 비판 대응책(‘좌파 연예인 비판활동 견제방안’), 2011년 6월엔 언론인·학자·연예인 방송출연 동향 파악(‘좌편향 성향 언론인ㆍ학자ㆍ연예인이 진행하는 TV 및 라디오 고정 프로그램 실태’) 등을 수시로 지시했다. 청와대 민정·홍보수석실은 2011년 12월 ‘마약류 프로포폴 유통실태, 일부 연예인을 중심으로 급속히 확산되고 있다는 소문 확인’ 지시도 국정원에 내렸다.

국정원은 이에 ‘일일 청와대 주요요청 현황’에 따라 ‘VIP 일일보고’, ‘BH 요청자료’ 등의 형태로 정보를 보고했다.

이명박 정부 블랙리스트 가동 조직은 국정원 내에 구성된 ‘좌파 연예인 대응 T/F’였다. 김주성 당시 국정원 기조실장이 2009년 7월 만들었다. 이들의 회의 문건에서 확인된 퇴출 계획은 실제로 이뤄졌다.

조사 결과에 따르면 국정원은 2009년 10월, 2011년 6월 두 차례에 걸쳐 한 연예 기획사 세무조사를 기획했다. 김제동·윤도현씨가 소속된 기획사 ‘다음기획’은 실제로 세무조사를 2회 받았다. 2010년 1월 ‘국제영화제 차기 위원장 후보 배제’ 대상으로 지목된 차승재 영화제작자는 실제로 후보에 오르지 않았다. 국정원은 2010년 4월 김제동씨가 진행한 MBC ‘환상의 짝꿍’ 폐지 유도를 기획했다. 환상의 짝꿍은 3개월 후 폐지됐다. 국정원은 2010년 3월 ‘특정 PD’가 제작한 다큐멘터리 ‘아마존의 눈물’을 방송대상 수상작에서 제외해달라는 요청도 했다. 국정원 개혁위는 이같은 사건 18건을 정리해 공개했다.

국정원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블랙리스트를 근거로 직접 여론전에 개입했다. ‘댓글부대’로 알려진 심리전담팀은 블랙리스트 연예인에 대한 비방 글을 온라인 커뮤니티, 각종 SNS, 포털 댓글 등에 게시했다. 배우 문성근씨와 김여진씨가 합성된 나체 사진은 단적인 예다. 한국일보에 따르면 심리전단팀은 민간인 사이버 외곽팀을 동원해 ‘대한민국 긍정파들의 모임’ 인터넷 카페 게시판에 ‘[19禁] 문성근과 김여진의 부적절한 관계’라는 제목으로 두 사람이 나체로 침대에 누워 있는 사진을 올렸다.

82명은 왜 블랙리스트에 등재됐을까. 김제동씨는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 노제 사회를 맡은 것을 비롯해 쌍용자동차 해고자 문제를 언급하는 등 사회 참여 활동이 활발했다. 윤도현씨는 ‘노사모(노무현을사랑하는사람들의모임)’ 가입 전력이 있다. 김여진씨는 ‘문재인 지지’를 표명한 적이 있다. 국정원 개혁위는 △대통령에 대한 언어테러로 명예를 실추 △‘좌성향’ 영상물 제작으로 불신감 주입 △촛불시위 참여를 통해 젊은층 선동 등이 국정원의 블랙리스트 등재 기준이라 밝혔다.

당장 거론되는 혐의는 국정원법 제9조와 제11조 위반이다. ‘정치관여금지’를 규정한 국정원법 9조는 특정 정치인·정당을 지지하거나 반대하는 활동을 금지하고 있다. 이를 위반한 자는 7년 이하의 징역과 7년 이하의 자격정지에 처한다. 이명박 정부 및 여당을 지지하고 경쟁 관계의 정치인과 정당을 비방하는 댓글전이 이에 해당될 수 있다.

‘직권남용 금지’를 정한 11조는 다른 기관이나 사람에게 의무 없는 일을 하게 하거나 사람의 권리 행사를 방해해서는 안된다고 정한다. 이를 위반한 자도 7년 이하의 징역과 7년 이하의 자격정지에 처한다. KBS, MBC, 영화진흥위원회 등 특정 연예인의 출연을 금지하게 한 강요행위가 해당될 수 있다.

박근혜 국정원 블랙리스트 개입, 곧 공개돼

김제동씨는 ‘연예인 블랙리스트’ 존재가 폭로된 후 국정원으로부터 사찰을 당한 경험을 공개했다. 김씨는 지난 13일 서울 상암동 MBC 로비에서 열린 MBC 총파업 결의대회에 참석해 "당시 국정원 직원을 집앞 술집에서 만났는데 노무현 대통령 서거 때 노제 사회를 맡았으니 1주기는 안 가도 되지 않느냐고 제안했다"며 "제동 씨도 방송을 해야 하지 않느냐고도 말했다"고 밝혔다. 문화예술인들은 이같은 일상적인 사찰이 “예술인의 손목을 꺾는 검열”로 작용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국정원 적폐청산 TF는 곧 박근혜 정부 국정원의 블랙리스트 개입 사건도 발표할 예정으로 알려졌다. 국정원 개혁위 관계자는 18일 미디어오늘과의 통화에서 “박근혜 정부 블랙리스트 건도 조사 마무리 단계에 있다. 조사 결과가 보고되면 발표할 예정”이라면서 “원래 박근혜 정부 블랙리스트 건을 조사하다가 이명박 정부 블랙리스트 문건이 발견돼 먼저 발표를 하게 된 것”이라 밝혔다.

국정원 개혁위는 이명박 정부 블랙리스트를 두고 원세훈 당시 국정원장과 김주성 전 기조실장 등을 국정원법상 직권남용 금지 위반 혐의로 검찰에 수사를 의뢰했다. 서울중앙지검은 곧바로 문성근·김미화씨 등을 참고인으로 소환하는 등 수사에 속도를 내고 있다. 국정원에 지시를 내린 이명박 전 대통령이 수사망을 피할 가능성은 낮다. 문성근·김미화씨를 비롯한 피해자들은 이명박 전 대통령에 대한 민·형사상 고소를 준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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