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8월 국가정보원 청와대 보고사안에 ‘MBC 특정 문화·연예계 출연인물 퇴출 유도’가 담겼다. 특정 출연자를 하차시키고 사규에 출연제한 근거규정을 마련한다는 내용이었다. 한진중공업 사태 당시 소신 발언으로 유명해진 배우 김여진씨가 2011년 6월 말 MBC 시사라디오프로그램 <손석희의 시선집중> 고정출연자로 확정되자 경영진은 7월 초 방송심의규정 제8장 고정출연제한 심의조항을 신설했다. 일명 ‘소셜테이너 출연금지법’이었다.

이 조항은 사실상 김여진씨 출연을 막기 위한 맞춤형으로 탄생했다. 우선 ‘주 1회 이상 출연자를 고정출연자로 정의한다’는 부분이 삭제됐다. 이에 따라 <손석희의 시선집중>에서 격주 1회 출연이 예정됐던 김여진씨는 고정출연자로 분류됐다. 신설된 심의조항 중 제56조 4항은 ‘사회적 쟁점이나 이해관계가 대립한 사안에 대해 특정인이나 특정단체 의견을 공개적으로 지지 또는 반대하는 발언이나 행위를 한 사람은 고정출연이 제한된다’고 명시했다.

▲ 12일자 JTBC 뉴스룸 &#039;앵커브리핑&#039; 화면 갈무리.
▲ 12일자 JTBC 뉴스룸 '앵커브리핑' 화면 갈무리.
김여진씨 출연이 확정되어 홍보가 이뤄지자 경영진은 이우용 라디오본부장에게 근신 15일, 이진숙 홍보국장에게 근신 7일 징계를 통보했다. 출연자 섭외 문제로 인한 보직간부 징계는 매우 이례적이었다. 김여진씨를 기필코 막겠다는 경영진의 의지를 ‘누군가’에게 보여줘야 했다고 추정할 수 있는 대목이다. 2011년 7월4일 당시 언론노조 MBC본부는 “이번 논란은 사측이 MBC판 블랙리스트를 만들고 있는데서 비롯된 것”이라 주장했는데, 새정부 국정원 적폐청산 작업을 통해 실제 블랙리스트는 존재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6년만의 ‘팩트체크’다.

2011년 MBC라디오는 참혹하게 무너졌다. 김미화·김종배·김여진·윤도현이 차례로 하차하거나 출연이 금지됐다. 국정원이 작성한 블랙리스트에 오른 사람들 대부분이다. MBC PD협회·기자협회 등 8개 사내 직능단체는 “고정출연을 미끼로 출연자 입을 틀어막겠다는 강자의 횡포”라며 경영진을 비판했다. 당시 <손석희의 시선집중> 연출을 맡았던 이순곤 PD는 “제작진은 사규에 따를 수밖에 없다. 사규를 어기면서 행동하는 것은 무리”라며 섭외를 포기했다.

당시 상황에 항의하듯 <손석희의 시선집중>은 7월18일 코너 첫 방송에서 ‘소셜테이너 어떻게 볼 것인가’를 주제로 토론을 진행했다. 김여진씨 대신 월요토론 패널로 섭외된 소설가 서해성씨는 “근대국가성립의 핵심적 요소 중 하나가 표현의 자유이고 우리 헌법도 이를 보장하고 있다. 그런데 언론에서 표현의 자유를 위축시키는 조항으로 특정인을 출연 금지시킨다면 언론이 지금 어디까지 와 있나, 문제를 제기할 수 있는 부분”이라고 비판했다.

▲ 12일자 JTBC 뉴스룸 &#039;앵커브리핑&#039; 화면 갈무리.
▲ 12일자 JTBC 뉴스룸 '앵커브리핑' 화면 갈무리.
당시 ‘소셜테이너 출연금지법’에 대한 MBC 경영진의 입장은 흔들림이 없었다. 유명 인사들의 MBC 출연 보이콧이 이어지며 MBC안팎에서 지속적인 우려가 나왔지만, 당시 이진숙 홍보국장은 기자에게 “입장은 이미 확정됐다”고 말했다. 당시 MBC 한 편성PD는 “회사가 사규를 따라야 한다고 강조하며 헌법에 보장된 자유와 방송법 등 상위법을 무시하고 있다”고 우려했다. 왜 그렇게 밀어붙였어야 했을까.

최근 드러난 국정원 ‘좌파 연예인 대응TF’ 존재에 비춰보면 당시 국면은 MBC경영진이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을 가능성이 있다. 이와 관련 손석희 JTBC보도담당 사장은 지난 12일 <뉴스룸> 앵커브리핑에서 “이명박 정부 당시의 국정원이 방송 프로그램에까지 개입해서 정부에 비판적인 진행자를 솎아내고, 프로그램의 방향을 바꾸려 했다는 사실이 드러나고 있다. 따지고 보면 다 알고 느끼고 있었던 내용들이 팩트라는 자격을 가지고 수면 위로 드러났을 뿐인데도, 또다시 참담함을 느끼게 되는 것은 왜일까”라는 말을 남겼다.

8년간 진행했던 <세계는 그리고 우리는>에서 자진 하차해야만 했던 김미화씨는 블랙리스트의 최대 피해자 중 한 사람이었다. 김씨는 “김재철 사장을 언젠가 엘리베이터 앞에서 만났다. 라디오가 시끄럽던데 다른 프로그램으로 가라고 했다. 너무 윗분들이 압박을 주니까 왜 내려가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MBC에 오래 버틸 수 없겠다고 생각했다. 비참하게 쫓겨나느니 내발로 나가겠다고 결정했다”고 말했다. 그렇게 김씨는 정든 곳을 떠났다.

▲ 2011년 당시 김미화씨의 강제하차에 반발해 피케팅에 나선 MBC 라디오 평PD들의 모습.
▲ 2011년 당시 김미화씨의 강제하차에 반발해 피케팅에 나선 MBC 라디오 평PD들의 모습.
2011년 당시 언론노조 MBC본부 편제민실위 간사였던 한재희 MBC 라디오PD는 “김미화씨는 2008년부터 교체 움직임이 있었고 2011년 이우용 라디오본부장은 간접적으로 김미화씨를 압박했다. 김도인 당시 라디오편성부장은 김재철 사장과 똑같이 김미화씨에게 다른 프로그램으로 옮기라고 말했다”고 밝혔다. 조직적이었다는 의미다.

그해 10월, MBC 라디오에선 <김어준의 색다른 상담소>로 인기몰이를 하던 김어준씨마저 퇴출됐다. 당시 김미화씨의 <세계는 그리고 우리는> 강제하차 논란 이후 신설된 해당 프로그램은 청취자들의 호평을 받았는데, 프로그램 신설 무렵 기자와 만난 김어준씨는 “나는 막장개편 논란의 물 타기용으로 들어왔다”며 “가을개편에서 잘릴 거다”라고 예언했다. 예언은 현실이 됐다.

당시 상황과 관련, 김어준씨는 “(윗선에서) 절대 녹음을 하라고 요구했다. 정치적 내용은 절대 안 된다고 했다”고 말한 뒤 “PD연합회 주최 행사에서 KBS 김인규 사장과 MBC 김재철 사장 중에 누가 더 바보냐고 물었다가 며칠 뒤 MBC 간부 세 분이 스튜디오로 찾아와 사과를 요구했다”며 폐지 과정을 떠올렸다.

▲ 12일자 JTBC 뉴스룸 &#039;앵커브리핑&#039; 화면 갈무리.
▲ 12일자 JTBC 뉴스룸 '앵커브리핑' 화면 갈무리.
한재희 PD는 “(2011년 퇴출된) 윤도현씨는 2013년 다시 <두시의 데이트> 진행자로 내정되며 복귀를 앞두고 있었는데 윗선의 반대로 또 다시 퇴출됐다”고 밝혔으며 “배칠수씨는 <최양락의 재밌는 라디오>에서 시사콩트를 없애라고 해서 퇴출됐다”고 말했다. MB정부 국정원이 선정한 문화계 블랙리스트들은 이처럼 차례차례 배제됐다. 이와 관련 MBC 시사교양PD인 김환균 전국언론노조위원장은 “2010년, 2011년 김재철은 방송장악을 위해 늘 한 발자국씩 앞서갔다. 우리는 누군가가 플랜을 짜서 공급해주고 있는 것 아닌가 의심해왔다”고 밝혔다.

만약 ‘소셜테이너 출연금지법’이 국정원과의 ‘교감’속에 만들어진 것이라면, 출연자 퇴출이 국정원 블랙리스트에 따라 이뤄진 것이라면 국정원의 ‘의지’를 집행한 MBC 관계자들에 대한 수사가 불가피해 보인다. 이와 관련 2011년 당시 심의조항 신설 실무 작업을 맡았던 것으로 알려진 김동효 MBC정책기획부장(현 MBC미래방송연구소장)은 14일 미디어오늘과 통화에서 관련 사안에 대해 답변할 수 없다고 밝혔다. 그는 손석희 사장이 <손석희의 시선집중>에서 하차하던 2013년 5월 당시 MBC라디오국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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