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민주당 도청 의혹 사건 당시 KBS 정치부 소속 중견급 기자가 핵심 도청 당사자로 지목된 ㄱ기자에게 녹음이나 녹취를 반드시 해오라고 취재 지시했던 사실이 드러났다. 이는 당초 KBS 해명과 달리 KBS기자가 민주당 비공개 회의 내용을 실제로 도청했을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는 정황증거다.

KBS기자협회는 12일 오전 서울 여의도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핵심 도청 당사자로 지목된 ㄱ기자에게 취재지시를 내릴 수 있는 위치에 있던 중견급 기자ㄴ으로부터 확보한 진술을 공개했다. KBS기자협회는 지난 6월 말부터 진상조사위원회를 꾸리고 민주당 도청의혹사건 실체를 추적 중이다.

ㄱ기자에게 취재지시를 내린 ㄴ기자는 KBS기자협회 진상조사위원회 조사 과정에서 “내가 (ㄱ기자에게) 최대한 취재하라고 취재 지시를 내렸다”며 “‘녹음’이라도 하든가 ‘녹취’가 가능하면 녹취라도 하라고 했다”고 말했다. ㄴ기자는 이러한 지시를 한 것에 책임질 용의도 있다고 밝혔다.

도청 당사자로 지목된 ㄱ기자는 2011년 도청 의혹 사건 당시 3년차 정치부 막내기자였다. 또한 당시 KBS가 정치부를 포함해 전사적으로 수신료 인상 이슈에 집중했던 분위기였음을 감안하면, 막내기자 입장에서 수신료 관련 중요한 내용이 오가는 비공개 회의를 녹음이나 녹취라도 해서 최대한 취재하라는 선배기자 지시를 실제로 실행으로 옮겼을 가능성이 높다는 해석이다.

▲ KBS기자협회 민주당도청의혹진상조사위원회가 12일 오전 서울 여의도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진상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사진=차현아 기자
▲ KBS기자협회 민주당도청의혹진상조사위원회가 12일 오전 서울 여의도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진상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사진=차현아 기자
그러나 진상조사위원회는 ㄱ기자가 취재지시를 받고 실제로 녹취나 녹음을 했다고 단정할 증거는 찾지는 못했다. ㄴ기자도 진상조사위원회의 조사 과정에서 ㄱ기자에게 비공개 회의임에도 왜 녹음이나 녹취를 하라고 지시했는지는 밝히지 않았다.

진상조사위원회는 “회사 입장에서 중요한 (비공개) 회의인 것을 아는 상황을 놓고 보면 저널리즘 윤리 등 경험이 부족한 기자에게 녹음이나 녹취를 지시했다는 진술은 이번 도청 의혹사건을 푸는데 큰 의미가 있다”고 설명했다.

ㄴ기자는 취재 지시를 내린 이후 ㄱ기자로부터 통상적인 보고 이외에는 특별한 보고를 받은 적도 없고 정치부 내 다른 기자들로부터 들은 이야기도 없다고 진술했다. 자신과 주로 이야기를 했던 도청의혹 당사자 ㄱ기자도 이슈가 불거진 이후부터는 ㄴ기자가 아닌 아닌 고참 기자선배들과 주로 관련 이야기를 나눴다는 것이 ㄴ기자의 설명이다.

이 진술과 함께 진상조사위원회는 민주당 도청 의혹 사건이 터진 직후 해당 사안을 담은 KBS내부 보고서를 봤다는 2011년 당시 KBS 국장급 간부의 진술도 공개했다.

진상조사위원회에 따르면 해당 간부는 당시 이슈가 확산되자 정치부의 한 기자에게 어떻게 된 일인지를 물었고, 정치부 기자는 내부보고서라면서 한 문건을 보여줬다. 해당 간부의 진술에 의하면 그 문건은 녹취록 형식이 아닌 일반적인 내부 보고서 형식을 갖추고 있었으며, 민주당 비공개 회의 참석자 이름과 발언 내용이 담겨있었다.

진상조사위원회가 해당 간부 증언을 의미있게 보는 이유는 고위급 간부 입장에서 자신이 본 문건이 여러 보고서 형식 중 하나였을 수 있다고 평가하는 부분 때문이다.

해당 고위급 간부는 진술과정에서 이 문건이 실제로 한선교 당시 한나라당 의원이 확보한 녹취록과 동일한 문건은 아니라고 밝혔으며, 민감한 문건이므로 이미 폐기됐을 수 있다고 전했다. 다만 원문이나 회람용 보고서, 혹은 사장보고용 문건 등 자신이 본 문건 이외에 다른 형식의 문건이 존재할 수 있다는 가능성은 열어뒀다.

진상조사위원회는 이번에 두 가지 진술 이외의 관련 정황은 확인 중이라고 말을 아꼈다. 특히 당사자들이 적극적으로 당시 정황 진술에 응하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덧붙였다.

진상조사위원회는 도청 의혹이 불거진 직후부터 ㄱ기자와 사안 관련 대화를 주로 나눴다는 당시 고참 선배기자에게도 조사에 응해달라는 요청을 해놓은 상황이지만 명확한 답변을 받지 못했다. ㄱ기자를 상대로 한 민주당 비공개 회의 취재 과정 조사도 충분히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게 진상조사위원회 설명이다. 

다만 진상조사위원회는 두 가지 진술을 공개한 이유에 대해 “(비공개 회의 녹취를 요구하는) 취재 지시가 강하게 있었고 그에 따라 어떤 식으로든 회의 내용을 입수했을 가능성이 크고, 관련 내용을 내부 문건으로 작성했다는 점”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설명했다. 향후에도 관련자를 대상으로 조사를 진행해 결과를 공개할 예정이다.

박종훈 KBS기자협회장은 이번 진상조사 발표에 앞서 “국민들께 사죄의 말씀을 드린다”며 “불미스러운 일이 KBS 울타리 내에서 벌어졌고 저희도 국민들 비난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고 밝혔다. 박 회장은 이어 “(민주당 도청 의혹) 진상 규명은 KBS기자 모두가 새롭게 태어나 기자로서의 사명감을 다하겠다는 노력의 시발점”이라고 설명했다.

사건 당시 정치외교부장이었던 이강덕 KBS대외협력실장은 지난달 미디어오늘과의 인터뷰에서 민주당 도청의혹이 사실무근이라고 해명한 바 있다. 이 실장은 “KBS 기자가 도청하지 않았다는 사실만 확인하면 녹취록이 있다느니 그걸 누구에게 줬다느니 하는 것은 성립되지 않는다”며 “그 문제를 자꾸 노조가 다른 의도를 갖고 거론하는 데 부당한 것이다. (KBS 조사위의 조사 요구도) 기본 전제가 성립이 안 되기 때문에 내게 요구할 자격이 없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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