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공범자들’의 마지막은 2012년 MBC파업 당시 조합 집행부의 법원 출석 장면이다. 그 위로 암막이 덮히면서 우리의 아픔이고 미안함이기도 한 징계자들의 이름이 말없이 흐른다. 애써 억눌렀던 내 시선도 이 지점부터 흔들리기 시작했다. 어쩌면 나만의 기억이 당시 현장 속 찰나의 내 모습을 발견해서고, 또 지역의 상처받은 이름들을 찾아내기 위해서다. “이거 서울 얘기네, 지역은 안 싸웠어?” 영화가 끝나기도 전에 직면한 물음에 과거의 내 기억과 현재의 증거만이 답이 됐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영화가 따로 보여주지 않았을 뿐 지역MBC도 철저하게 망가졌다. 영화가 비추는 파업의 현장에서 해고 1명과 정직을 포함해 지역 징계자 55명이 저 명단에 섞여있다. 노동조합을 했다는 이유로 다시 현업으로 복귀하지 못하고 사업부서나 송출MD로 격리되는 일은 지금도 아무렇지도 않은 듯 자행되고 있다. 보직 등의 인사 배제 사례는 사안의 민감성과 은밀함에 비춰 그저 짐작만 할 뿐이다. 서울에서 밝혀진 블랙리스트의 음험한 단어 배제와 차별, 격리의 논리는 지역에도 그대로 판박이인 셈이다. 오히려 지역에서는 그 부당함을 따지고 싸워보지도 못할 정도로 아예 ‘무시’되고 있어 더 비참한 꼴이다.

김재철 사장 이후 지역사에 가장 두드러진 변화는 서울의 직할체제 강화이다. 170일 파업 기간 김재철은 지역사에 이사회 규칙 개정이라는 또 하나의 싸움을 걸어왔다. 지역MBC의 중요 의사결정 기구인 이사회를 지역 사장의 대표성과 소집권한 등을 무력화시키는 개악을 통해 장악해버린 결과다. 이렇게 지역사의 이사회는 다수를 차지하는 서울의 임원들이 실질적으로 지배할 수 있게 됐다. 이후 지역사 사장은 부역자들의 낙하산이 노골화하더니 누군가는 서울 사장 내연녀의 입김으로, 또 누군가는 하숙집 친구여서 낙점받았다는 설까지 공공연하게 나돌만큼 참담한 지경이 되고 말았다.

▲ 영화 ‘공범자들’ 스틸컷.
▲ 영화 ‘공범자들’ 스틸컷.


이렇게 내리꽂힌 지역사 사장들이 지역에 애정이나 관심이 있을 리 만무하다. 서울과 광고배분율을 정한 합의서가 있는데도 낙수효과라는 궤변으로 눈을 감아버린 게 다반수였다. 지역의 몫이어야 할 재전송료를 서울에 가져다 바치는 굴욕적인 협상을 하고도 부끄러움조차 몰랐다. 지역사의 수익기반을 흔들어 생존을 위협하는 중대한 배임행위였지만 죄의식은커녕 대표이사 사장으로서 최소한의 염치마저 들어본 적이 없다. 이들은 그저 충성경쟁의 도구였고 지역사들은 한계기업의 상황으로 방치되고 있다.

언론인으로도 경영자로도 검증된 적이 없는 지역사 사장들은 사원들의 밥그릇인 임금까지 훼손하려는 만행을 저질렀다. 정기적으로 중단 없이 지급받아온 특별상여금을 임금이 아니라며 성과와 연동하려는 저의를 노골화한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지역의 임금체계를 흔들고 서울과 갈라치기해 단일 노조를 깨트리려는 의도가 있었음은 나중에 간파했다. 결국 사장을 상대로 한 초유의 소송을 통해 특별상여금의 임금성을 거듭 확인받았지만 역시 누구도 책임지지 않았다. 오히려 안광한 체제 이후 단체협약이 무효화된 틈을 노려 임금인상 차별화로 지역사 끼리도 갈라치려는 져열한 반노동적 행태만 갈수록 더 노골화하고 있다. 수익이 났음에도 “내 임기 중에 임금인상은 없다”는 말을 자랑으로 아는 자질 미달의 사장을 두고도 분노만을 곱씹고 있을 수밖에 없을 정도로 지금 지역사는 처절하게 추락했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촛불 민심을 더욱 위대하게 각성시킨 헌법 1조 1항 못지 않게 소중한 지역성과 다양성의 헌법 조항이 있다. 이 헌법 조항은 지역MBC의 존립근거이자 지역방송이 구현해야 할 책무이기도 하다. 그 대척점에 지역사 통폐합의 망령이 도사리고 있다. 통폐합은 오직 자본과 시장의 논리만으로 무장했기에 그 끝은 민영화와 맞닿아 있고 네트워크체제를 흔들 수 있기에 어쩌면 지역만이 아닌 MBC 전체 위기의 본질이기도 하다. 서울과 지역의 수직계열화는 자본의 욕구일 뿐인데 김재철 이후 통.폐합이라는 반 공영의 길이 고착화하면서 지역MBC는 정체성의 고민까지 떠안은 채 표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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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유 주파수를 갖고 반세기 넘게 공영성을 쌓아온 지역사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자율경영이다. 지역사 구성원들이 재허가 조건으로까지 걸어 요구한 자율경영을 김재철, 안광한 체제는 상무이사제로 무력화시키고 있다. 옥상옥의 대표적 적폐로 오랜 투쟁 끝에 어렵게 폐지했는데 이들은 통.폐합 성과에 임원 자리를 연동시키는 조삼모사의 기만책으로 상무제를 부활시켜 다시 지역사를 옥죄고 있다. 김장겸 체제에서는 같은 요구를 이미 장악한 이사회에 사외이사를 덧붙여주는 꼼수와 농간으로 우회하면서 지역사는 지배와 관리에 길들여지고 있다.

지금 지역MBC는 지침으로 운영되고 있다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노동조합과 갈등하는 사장이 좋은 평가를 받는 것도 이 지침이 작동한 결과다. 임금 인상을 결정하는 것도, 지역사 통.폐합 같은 지역사의 명운이 걸린 중요 의사결정도 서울의 지침만이 기준이다. 지역사 사장들은 지침을 충실하게 받드는 영혼 없는 대리인이자 총독 역할일 뿐이다. 서울MBC를 망가트린 적폐에 빌붙었다 낙하산으로 지역에 내려와 부역의 양지만을 걸으며 적폐를 확대 재생산하고 있는 청산의 대상들일 뿐이다. 그렇게 쌓이고 쌓인 공영방송 말살의 폐단을 아무런 잘못 없이 온몸으로 받아내면서 망가져버린 게 지금 지역MBC의 역설이자 시스템의 숙명 같은 것이다.

사실 세월호 참사 당시 MBC의 ‘전원구조’라는 희대의 오보는 언제든 터져나올 잠재된 비극 같은 것이었다. 상생과 협력의 네트워크체제가 보도 부문에서마저 일방적, 갈등적 구조로 무너져 내리면서 신뢰라는 가치가 자리할 공간이 사라져버린 탓이다. 이렇게 우려가 가장 잔인한 현실로 드러났는데도 지역사는 또 제작자율성 침탈에 신음하고 있다. 적폐와 부역을 학습한 지역사 사장들은 말 한 마디로 프로그램을 새로 만들고 없앨 정도로 제왕적 전횡을 서슴지 않고 있지만 견제조차 받지 않는다. 책임은지지 않고 누리기만 하는 이런 지역사 사장들이 김재철, 안광한 이후 내걸린 임기 3년에 1년 연장이라는 기형적인 당근책을 쫓아 내달리는 사이 지역은 프로그램도 조직도 끝 모를 추락을 거듭하고 있다.

“지역은 안 싸웠어?”라는 처음 물음에 답은 이 지점으로 수렴한다. 하청, 재하청의 구조로 적폐와 부역의 온갖 폐단은 이렇듯 지역에 켜켜이 쌓였고 하나하나가 싸워 넘어야 할 대상이었다. 지역 역시 단 한 순간도 싸움을 멈출 수 없었고 싸움을 마다한 적도 없었다. 어쩌면 마지막 기회일 지도 모르는 이번 파업은 단지 동조 투쟁이 아니라면 공정방송 쟁취라는 공동의 목표 위에 지역MBC의 정상화라는 대의를 동시에 거는 바로 우리의 싸움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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