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많이 포함돼 있습니다.)

‘혹성탈출’의 마지막 시리즈인 ‘종의 전쟁’은 고대와 현대의 이야기가 뒤섞여 있다. 전체적인 스토리와 인물 설정은 세계의 고전인 성경을 따랐다. 구약성경 출애굽기의 유인원 버전이라고 볼 수 있다. 성경의 스토리와 캐릭터를 차용한 점 외에 이 영화가 선택한 주제는 ‘혐오’라는 현대적 주제다.

유인원들의 우두머리인 시저는 출애굽을 하는 모세이기도 하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예수이기도 하다. 다만 민족과 함께 이집트를 탈출하는 모세와 달리 시저는 민족들을 안전한 곳으로 가라고 명한 뒤 자신의 싸움을 펼친다. 시저의 유인원 민족이 안전한 곳으로 가는 길엔 기나긴 고난이 따른다. 안전한 곳으로 가던 도중, 유인원들은 유인원들과 전쟁을 진행 중이던 한 군대의 기지에 잡힌다. 유인원들은 그곳에서 군대를 지켜주기 위한 벽을 세우는 강제노역을 하게 된다.

시저 역시 이곳에 갇힌다. 시저의 아들과 부인을 죽인 맥컬러프 대령(우디 해럴슨)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 시저가 그를 찾아왔기 때문이다. 시저는 이곳에서 적나라하게 예수의 역할을 한다. 십자가와 비슷한 형상에 매달리고, 민족을 구하고 결국 죽음을 맞이한다. 이런 시저의 곁에는 위기 상황에 그를 구하는 ‘마리아’ 같은 여성 유인원 캐릭터가 등장하기도 한다.

▲ '혹성탈출: 종의전쟁'. 사진출처=네이버 영화.
▲ '혹성탈출: 종의전쟁'. 사진출처=네이버 영화.
‘종의 전쟁’에서 ‘혐오’라는 주제를 드러내는 인물은 맥컬러프 대령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맥컬러프 대령은 파시스트다. 그는 결벽증이다. 그가 사는 사회에서는 알 수 없는 바이러스가 퍼져 인간들은 말을 잃는다. 언어라는 인간의 특성을 잃은 인간은 동물처럼 여겨진다. 반면 과학실험을 통해 인간의 언어를 얻은 시저를 비롯해 동물원을 탈출한 유인원은 인간의 언어를 구사한다.

이 영화의 시대 배경은 유인원은 인간이 되고, 인간은 동물이 되는 과도기다. 맥컬러프 대령은 이러한 상황에 분노하는 인간이다. 그는 인간을 동물로 만드는 바이러스를 저주한다. 이 바이러스를 옮기는 개체는 자비 없이 죽인다. 인간을 열등하게 만드는 것에 극심한 혐오를 보인다.

이런 그의 파시즘적 혐오는 결국 그를 군대에서도 고립되게 한다. 정부는 바이러스를 약을 사용해 치료하자고 제안하지만 그는 바이러스 숙주를 깨끗하게 제거해야 한다는 신념 아래 바이러스에 걸린 사람을 모두 죽인다. 이런 신념 아래 그는 바이러스에 걸린 자신의 아들까지 죽인다.

맥커러프 대령이 가진 혐오는 혐오의 아주 전형적인 사례다. 마사 너스바움 시카고대 석좌교수는 저서 ‘혐오와 수치심’에서 혐오의 특성을 설명하는데 혐오라는 감정이 생기는 데에는 ‘혐오의 대상이 나에게 닿아 나를 더럽게 만들 것’이라는 감정이 작용한다고 한다. 특히 혐오의 대상이 동물적인 특성을 가진다면 더욱 그렇다.

“인간의 신체 분비물 중에서 눈물만이 혐오를 유발하지 않는 이유는, 추정컨대 눈물이 유일하게 인간적인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눈물을 통해 우리가 동물과 같은 존재하는 사실을 떠올리지 않는다. 반면 배설물, 콧물, 정액, 다른 동물적 신체 분비물은 우리를 오염시킨다고 여겨진다. (중략) 혐오에 담긴 핵심적 사고는 동물성을 간직한 동물의 분비물을 섭취하면, 우리 자신이 동물의 지위로 격하될 수 있다는 생각이다. (혐오와 수치심, 170p)”

▲ '혹성탈출: 종의전쟁'의 맥컬러프 대령. 사진출처=네이버 영화.
▲ '혹성탈출: 종의전쟁'의 맥컬러프 대령. 사진출처=네이버 영화.
결국 이런 혐오의 결과는 그 자신에게 돌아왔다. 바이러스에 감염된 노바가 소지하던 인형에 의해 바이러스가 퍼진 것인지, 시저가 대령을 죽이러 방에 들어왔을 당시 그는 언어를 잃은 상태가 된다. 그는 스스로 “바이러스에 걸린 사람은 여과 없이 죽어야 한다”는 신념을 자신에게도 적용한다. 그는 시저의 방아쇠를 건네받아 자신에게 쏜다.

맥컬러프 대령은 자신이 혐오하던, 유인원(시저)의 손에 죽는 게 아니라 자신이 당긴 방아쇠에 죽는다. 그는 죽지 않을 기회가 있었다. 정부의 제안대로 바이러스에 걸린 이들을 약으로 치료하는데 동의했다면 그의 군대는 고립되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그 역시 바이러스에 걸렸다한들 약으로 치료가 됐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의 결벽증적 혐오는 결국 스스로를 죽게 만들었다.

혐오는 결국 자기 자신에게 돌아온다. 이는 그 어떤 대단한 인간이라도 어떤 모자람은 있을 수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마사 너스바움은 ‘혐오와 수치심’의 마지막을 이렇게 정리했다. “누구나 아마 어떤 면에서는 장애를 안고 있다고 할 수 있는 사람들이, 함께 자유주의 사회를 형성하고자 할 때, 삶이란 불완전하고 불확실하다는 사실을 솔직하게 받아들이는 데에서 시작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혐오와 수치심, 62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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