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즈만큼 경제와 밀접한 연관을 갖는 음악도 드문 것 같다. 1차 대전 종전 이후 물질적 풍요 속에서 거대한 경제 블록을 형성한 미국의 1920년대는 ‘재즈의 시대’라고 불린다. 물론 재즈가 큰 돈을 벌게 해주는 문화산업이 되면서 대중의 계몽의식을 가로막는다고 독일의 마르크스주의 철학자 아도르노는 비판하기도 했다. 여기서 한가하게 재즈의 역사에 대해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재즈가 디지털 경제를 설명하는 키워드가 되고 있는 현실이 재미있다. 긱 이코노미(Gig Economy)가 그것인데, 긱은 재즈연주자가 공연장소에서 필요한 연주자를 그때그때 단기계약으로 섭외하는 방식을 말한다. 긱은 모바일 산업이 발전하면서 플랫폼 내 단기계약을 의미하는 용어가 되고 있다.

오늘 플랫폼기업은 정규직 노동자를 고용할 필요가 없다. 별도의 공장이나 사무실에서 일하지도 않는다. 예컨대 대리운전 플랫폼 ‘카카오 드라이버’는 자동차 한 대 보유하지 않고 돈을 번다. 음식배달 앱 ‘요기요’에는 배달원 한 명 없다. 카카오드라이버의 원조인 우버의 시가총액은 650억 달러라고 한다. 자동차 한 대 보유하지 않고도 제너럴모터스의 시가총액인 500억 달러를 넘어섰다. 세계 최대 호텔 체인 힐튼의 기업 가치를 넘어선 에어비앤비도 객실 하나 갖고 있지 않다. 이 플랫폼들은 낯선 솔로(Solo)들의 서비스를 상호 교환시키고 사용자들의 ‘좋아요’를 끌어들여 거대한 커뮤니티를 만들어낸다. NASA와 구글이 투자해 설립한 세계적인 창업학교 ‘싱귤래리티대학’의 초대 상임이사인 살림 이스마일은 그의 저서 ‘기하급수 시대가 온다(Exponential Organizations)’에서 이런 회사를 기하급수적 기업이라고 정의한다. 그는 한계비용 없이 엄청난 수익을 내는 실리콘 밸리의 비밀을 들려준다.

▲ ‘카카오 드라이버’ 홍보 동영상 갈무리
▲ ‘카카오 드라이버’ 홍보 동영상 갈무리
노동의 미래는 천국이라고 실리콘 밸리는 믿는다. 누구나 원하면 언제 어디서든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실리콘 밸리발(發) 공유경제(Sharing Economy)가 처음 나왔을때만 해도 사용자들간 자유로운 노동의 공유가 확산되는 천국이 도래한다는 찬사가 난무했었다. 하지만 자본주의 형식 속에서 이루어지는 플랫폼 경제는 비정규직과 실업자라는 내용으로 채워지고 만다. 이 솔로들의 집단은 크라우드 워커(Crowd Worker)라고 불린다. 배달이든 운전이든 스마트폰에 장착된 플랫폼 앱으로 수요가 있는 곳에 곧바로 투입되는 크라우드 워커들은 물론 직장 상사의 눈치를 안봐도 되고 원하는 시간도, 원하는 보수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 플랫폼 자본의 입장에선 엄청난 노동력을 손쉽게 사용할 수 있다. 가령 서울과 맨해튼이나 인도 또는 방글라데시에 사는 웹디자이너들을 쉽게 단기고용할 수 있다.

다만 이 솔로들은 서로 얼굴도 모르는 멀리 있는 나라의 디자이너와 경쟁해야 한다는 점이 문제라면 문제다. 미국 아마존의 수용자-공급자 간 연결 웹서비스인 메커니컬 터크(Mechanical Turk)는 공급자간 경쟁을 유도해 쓸만한 소프트웨어 솔루션이나 웹디자인을 개발한 자에게 보상금을 주거나 단기 계약을 맺는다. 여기 경쟁자들은, 임금노동자들은 서로 치열하게 경쟁하지만 대부분 안정적인 고용관계에서 멀어지게 된다.

이렇게 보면, 구글, 페이스북, 아마존 등 실리콘밸리 독점기업들의 만다라(眞言)는 기술혁신이 아닌 기존 시장의 파괴에 가깝다. 디지털 스타트업과 리스크자본의 창업·투자전략에도 불구하고, 새로 생긴 일자리보다 더 많은 일자리가 없어지고 고용은 불안정해진다. 더구나 실리콘밸리의 구루이자, IT 거물인 피터 틸은 인간이 생존하기 위해서 뿐만 아니라 태양계 자체를 식민화시키기 위해선 독점기업이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야만 테크놀러지 개발이 가능하다는 말씀이다.

▲ 서로 얼굴도 모르는 노동자들은 서로 치열하게 경쟁하면서 안정적인 고용관계에서도 멀어지게 된다. 사진=pixabay
▲ 서로 얼굴도 모르는 노동자들은 서로 치열하게 경쟁하면서 안정적인 고용관계에서도 멀어지게 된다. 사진=pixabay
자본의 독점 문제를 배제한 관념적인 디지털 사유를 보여주는 사례는 또 있다. 예컨대 옥스퍼드대학의 트랜스휴머니스트인 닉 보스트롬은 슈퍼인텔리전스를 통해 인간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다고 한다. 몸 속에 온갖 장치를 집어넣고 뇌마저 컴퓨터로 돌아가는 존재를 통해서 말이다. 이것은 테크노크라시를 넘어선 일종의 로보크라시가 되겠다. 독점자본에 놓인다는 사실은 물론 그대로다.

경제순환에 맞게 노동 시스템을 계획하고 조율하는 것은 오늘 디지털 기술로 인해 훨씬 더 쉬워졌다. 하지만 자본주의의 역사가 잘 보여주는 것은 기술 발전이 단 한 번도 인구의 대부분인 노동자들에게 유리하게 이루어진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8시간 노동, 일요일 휴무는 자본으로부터 얻어낸 기나긴 계급투쟁의 산물이지 않은가. 디지털 자동화 시스템이 된들 자본이 이윤을 거부하겠는가.

사정이 그렇다면 질문은 이렇게 바뀌어야 한다. 크라우드 워커, 솔로들은 어떻게 최소임금을 보장받을 수 있겠는가? 로봇과 알고리즘이 만들어내는 생산성과 그 수익은 대체 어디로 흘러 들어가는가? 자본 속으로인가, 복지시스템 속으로인가? 재즈의 긱은 유감스럽게도 연주자의 삶에 한정되지만, 플랫폼의 긱은 우리 삶 전체를 ‘긱’스럽게 만든다. 다음 긱을 찾아, 다음 일을 찾아 스마트폰을 확인하는 우리의 모습이 미래일지 모른다. 그렇다면 플랫폼의 진정한 만다라는 무엇이 되어야 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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