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역 10번 출구에서 여성혐오 범죄를 규탄하는 시위가 열렸다. 온라인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모인 익명의 참가자들이 여혐 범죄를 비판하기 위해 모인 자리였다. 최근 발생한 ‘왁싱샵 살인사건’을 계기로 시작된 집회 자리가 아니냐는 질문이 이어졌지만 참가한 이들은 모두 고개를 저은채 가면을 쓰고 마스크를 낀 채 여성혐오 범죄를 막아달라는 호소를 이어갔다.

서울 서초구 강남역 10번 출구에 6일 오후 12시부터 약 100여명이 모여 여성혐오살인 공론화 시위를 진행하고 있다. 시위를 진행하는 스텝 예닐곱명 정도는 있었지만 주최 단체가 별도로 있지는 않았다. 시위가 시작된 12시에 약 20명 정도가 모였던 참가자 규모는 2시간 가량 지나자 세 배 이상으로 늘어났다. 참가자들은 대체로 20대 여성들로 보였지만 간간이 남성도 있었다. 이날 시위는 오후 9시까지 이어질 예정이다.

‘온갖 여성혐오적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모든 콘텐츠 중단하라.’

‘우리는 여성혐오 없는 세상을 바라고 바래서 모였다.’

‘남자천국 여자지옥’

‘생활 곳곳 스며있는 여성혐오 문화’

‘화장실 길거리 심지어 집까지 어딜가나 남성들이 설치한 몰래카메라’

‘얼마나 더 조심해야 하냐. 정말로 조심해야하는 건 가해자 남자들이다.’

‘여성에 이름 매기는 남자들. 여성을 프레임화하는 남자들. 우리가 죽길 원하는 것은 오직 가부장제뿐이다.’

이들이 외친 구호에는 여성을 대상으로 한 범죄를 여성혐오 범죄로 규정하고 이를 비판하는 목소리가 담겼다. 한 명이 마이크를 들고 배포된 프린트에 적힌 구호대로 선창하면 참가자들은 이를 따라했다. 구호를 외치는 것 이외에도 이들은 ‘개똥벌레‘, ‘세일러문‘, ‘반짝반짝 작은별‘ 등의 노래를 여성혐오를 규탄하는 내용으로 개사해 불렀다.

이들의 시위는 특정 단체가 주도해 보도자료를 배포하고 주최한 단체 관계자들이 돌아가며 규탄 발언을 이어가는 일반적인 시위와는 달랐다. 대체로 참가자들은 검은 색 마스크와 선글라스를 끼고 자신들의 얼굴을 가렸다. 지나가는 일반 시민들 중 사진을 찍으려하는 사람들에게 스탭들은 일일이 다가가 사진 촬영을 자제해 줄 것을 부탁했다. 기자들에게도 참가자들의 얼굴은 철저히 모자이크 처리를 해줄 것을 부탁했다. 주최 단체나 책임자도 없었고, 온라인 카페를 통해 모인 익명의 참가자들이 자발적으로 모인 집회라는 설명이 뒤따랐다.

철저하게 익명성을 유지한 이유에 대해 집회의 한 스탭은 “집회한다는 기사에 달린 댓글을 보시면 이유를 알 수 있다. 강남역에 와서 참가자를 두드려 팬다는 얘기부터 시작해 말로 담기 어려울 정도의 욕이 댓글로 달려있다”고 설명했다.

▲ 6일 오후 서울 서초구 강남역 10번 출구에서는 여성혐오 살인 공론화 시위가 열렸다. 사진=차현아 기자.
▲ 6일 오후 서울 서초구 강남역 10번 출구에서는 여성혐오 살인 공론화 시위가 열렸다. 사진=차현아 기자.
심지어 사진을 몰래 찍으려는 이들과 이를 막으려는 집회 스탭들 간 마찰도 빚어졌다. 오후 1시 경 어떤 남성이 집회현장 사진을 찍고 도망가는 일이 발생해 스탭들이 뒤를 쫓았으나 찾지 못했다. 현장 영상과 사진을 찍으려던 한 유튜버도 스탭들의 강한 항의를 받았다. 자신을 정치·사회 분야 영상을 주로 업로드하는 유튜버라고 밝힌 황아무개씨(31)는 “일반적으로 집회는 사진 촬영이 가능한데 저한테 오더니 사진을 찍지 말라고 했다. 기자는 되는데 일반인은 촬영이 안된다고 하더라”며 불쾌감을 감추지 못했다.

황아무개씨는 “여혐 살인사건 때문에 이번 집회를 여는 것이라고 들었는데, 최근 발생한 사건과 (집회에서 주장한) 여성혐오는 별개 아니냐”며 “너무 크게 확대해석한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나 정작 이번 집회의 스탭들은 왁싱숍 살인사건과 이번 집회와의 연관성을 부인했다. 집회가 열린 장소가 지난해 발생한 강남역 여성 살인사건을 계기로 ‘여성혐오 살인’ 규탄 집회가 열렸던 강남역 10번 출구라는 점과, 왁싱숍 살인사건이 발생한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의 여혐 범죄 규탄 집회라는 점에서 왁싱숍 살인사건을 여혐 살인사건으로 보고 이를 규탄하기 위한 집회가 아니냐는 기자들의 질문이 이어졌지만 스탭들은 한결같이 아니라고 답했다.

자신을 이번 집회의 언론 인터뷰 담당이라고 밝힌 활동가명 ‘총대’씨는 “이번 시위를 특정 사건과 연결지어 해석하는 것을 자제해달라”고 말했다. 또한 “장소는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투표를 통해 정해진 것이며 이번 시위는 어떤 단체와도 연관이 없다”고 밝혔다. 다른 단체들과의 연대가 시위를 원래 의도와 달리 변질시킬 우려가 있다는 것이었다. 왁싱숍 살인사건에 대한 입장을 묻는 질문에도 “복잡한 상황이고 지금은 확실히 말씀드릴 수 없다”라며 정확하게 답변하지 않았다.

이러한 답변은 최근 발생한 왁싱숍 살인사건의 유가족으로 추정되는 이들이 더 이상의 사건 공론화를 멈춰달라는 요구가 있었던 배경에 기인하는 것으로 풀이된다. 

왁싱숍 살인사건은 지난달 5일 오후 10시 경 서울 강남구 역삼동 미용업소에서 벌어진 여성 왁싱사가 살해당한 사건이다. 왁싱사를 살해한 것은 30대 남성이었으며, 가해자는 여성 왁싱사를 촬영한 인터넷 방송을 본 뒤 피해 여성을 범행으로 삼았던 사실이 알려졌다. 이 때문에 온라인 상에서는 지난해 강남역에서 발생한 여성 살인사건에 이어, 이번에도 여성이기 때문에 표적 살해를 당한 것이라며 ‘여성혐오 범죄’ 논란이 불거졌다. 온라인 상에서 여성혐오 규탄집회가 추진된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자신이 유가족이라고 주장한 이가 “공론화시키는 것도 무지막지한 상처로 다가온다”며 “저희 유족들은 왁싱샵이니 미용업소니 이런 단어조차도 순간 움츠러든다”며 더 이상의 공론화를 자제해달라는 글을 올리면서 의견이 엇갈리기 시작했다. 특정 사건만을 거론하지 않고 우리 사회 일반에 퍼진 여성혐오적 인식을 규탄하고 여성혐오 범죄를 근절해야 한다는 공론화를 위한 집회로만 진행된 배경이다.

집회 현장에서 만난, 해당 1인 인터넷 방송 BJ를 잘 아는 지인이라고 밝힌 이필립씨(35)는 “여성혐오살인, 왁싱샵을 포털에 검색해보면 바로 BJ이름이 뜬다“며 “피해자 측도 공론화를 자제해달라고 한 것이 사실이다. 피해자와 합의 하에 홍보를 위해 방송을 진행한 것인데, 범죄를 저지른 가해자에게 초점이 안 맞춰지고 지금은 BJ도 함께 욕을 먹고 있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 6일 오후 서울 서초구 강남역 10번 출구에서는 여성혐오 살인 공론화 규탄시위가 열렸다. 사진=차현아 기자.
▲ 6일 오후 서울 서초구 강남역 10번 출구에서는 여성혐오 살인 공론화 규탄시위가 열렸다. 사진=차현아 기자.
다만 집회에 참가한 이들의 주장은 명확했다. 여성들이 대상화되지 않고 안전하게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 달라는 것, 그리고 여성들이 더 이상의 강력범죄의 피해자가 되는 것을 막아달라는 호소였다. 특히 몰래카메라 촬영 등과 같이 주로 여성들이 대상이 되는 범죄를 비판했고, 이러한 범죄에 대한 주가해자인 남성들의 인식 개선을 요구했다. 이들은 “강력범죄의 가해자는 남성이 98%로 압도적으로 많았다”, “여성 1인 가구는 사회의 가장 주된 불안요인으로 범죄발생, 남성 1인 가구는 국가안보를 꼽았다” 등의 피켓을 들었다.

‘총대’씨는 “우리나라에서 여성은 남성과 동등한 인격체로 취급받지 못한다”며 “역사를 통틀어 봤을 때 남성에 의해 여성은 객체화되고 소비돼왔다. 그런 부분에서 여성혐오 범죄의 원인을 읽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

시간이 갈수록 참가자들은 늘어났다. 구호를 외치는 목소리가 커진 만큼 지나가는 시민들의 시선이 쏠렸다. 이들의 주장에 공감하는 시민들도 많았지만 어떤 것이 여성혐오 범죄인지, 여성이 피해자가 된 범죄가 모두 여성혐오 범죄인지에 대해서는 공감하기 어렵다는 의견도 적지 않았다. 

20대라고 밝힌 한 여성 시민은 “여성이 아무래도 약자니까 범죄 대상이 되기는 쉽지만 그것이 혐오에 근거해 범죄 대상이 된다고 볼 수 있는지는 의문”이라고 말했다.

특히 이들의 주장에 대해 불편함을 느낀다고 답한 시민들은 남성만 가해자라는 시선이 공감하기 어렵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또다른 여성 시민(27)은 “남녀를 가르는 주장이 큰 의미가 없다”며 “남자들이 범죄를 저지르는 비율이 많긴 하지만 범죄를 예방하자는 주장을 해야 하지 남자들을 규탄하기 위한 주장은 큰 의미가 없다. 오히려 남자를 적대시하고 남자들이 갖는 여성에 대한 안 좋은 의식만 강해지는 것 아니냐”는 의견을 제시했다.

회사원 이동영(48)씨도 “여성이 피해자가 된 범죄는 안타깝고, 약자를 대상으로 한 범죄는 나쁘다”면서도 “여성만 피해자로 단정할 수 없으며 남자가 남자를 죽이는 일이 더 많다”고 공감하기 어렵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역설적으로 이들이 시위를 진행하는 동안 가면을 쉽게 벗지 못한 것도, 이들의 주장처럼 ‘여성혐오’ 범죄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되지 못했다는 현실 때문이다.  ‘총대’씨는 “여성혐오는 공기와 같다. 그래서 여성혐오가 뭔지 공론화하고 여성혐오로 인해 불거진 범죄의 심각성을 알리기 위해 집회를 연 것”이라고 설명했다.

‘총대’씨는 이번 집회를 진행하는 과정의 고충도 털어놨다. 여성혐오 범죄 규탄 집회에 쏟아진 온라인 상의 비난과 협박 댓글 때문에 이들은 가면을 벗을 수도, 적극적으로 인터뷰에 응하기도 어려워보였다. ‘총대’씨는 “익명으로 집회에 참여한 개개인들의 목소리를 소중히 함과 동시에 (집회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들었던) 인터넷 상의 심각한 협박 등을 충분히 감안하면서 진행하고자 노력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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