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죽었다. 박환성, 김광일 두 독립PD가 목숨을 잃었다. 지난 29일 영결식장에 독립PD들의 카메라는 많았지만 방송사 로고가 붙은 카메라는 EBS 뿐이었다.

교통사고였지만 ‘사회적 타살’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다큐멘터리를 촬영하던 두 PD는 열악한 제작여건 속에서 늦은 시간까지 차를 몰다 사고를 당했기 때문이다. 박환성 PD는 출국하기 직전 불이익을 감수하고 EBS에 맞서며 열악한 제작환경 문제를 공론화했다. 독립PD들을 위해 정부가 지원한 제작비 일부를 EBS가 간접비 명목으로 요구한 사실을 폭로한 것이다.

이상하게도 갑질논란과 사고소식 모두 ‘방송뉴스’에서 찾기 힘들다. 박환성 PD와 독립PD협회가 EBS의 갑질 문제를 폭로한지 한달이 지났고, 그 열악한 여건 때문에 죽었지만 당사자인 EBS를 제외한 지상파 3사와 종편4사 메인뉴스에서는 관련 보도를 1건도 찾을 수 없었다.

물론, 뉴스가치 판단은 방송사의 고유 권한이다. 그런데 정말 뉴스가치가 없었던 것일까. 포털 네이버에는 관련기사가 60여건이 나온다.  주요 종합일간지 중 한겨레는 두 PD가 사고를 당하기 이전부터 EBS 갑질 문제를 다뤘다.

▲ 29일 오후 서울 마포구 신촌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서 고 김광일(왼쪽), 박환성 PD의 영결식이 엄수됐다. 사진=금준경 기자.
▲ 29일 오후 서울 마포구 신촌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서 고 김광일(왼쪽), 박환성 PD의 영결식이 엄수됐다. 사진=금준경 기자.

사고가 발생하자 여러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경향신문은 “빠듯한 제작비 때문에 운전기사 없이 저녁시간에 차량을 몰다가 사고를 당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면서 “두 PD는 차량을 직접 운전했으며 통역이나 가이드 등 현지인은 동승하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졌다”고 보도했다. 연합뉴스도 “박환성 PD는 방송사의 부당한 간접비 요구 관행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며 개선을 요구한 바 있다”고 보도했다.

정치권도 직접 나섰다. 빈소를 찾은 이효성 방송통신위원장 후보자는 관련 문제 개선을 약속했다. 이낙연 국무총리는 30일 페이스북에 조의를 표했다. 29일 엄수된 영결식에는 노웅래 더불어민주당 의원, 추혜선 정의당 의원 등 국회의원들도 자리를 지켰다.

그렇다면 왜 방송사 메인뉴스는 침묵을 지키고 있는 것일까. 공교롭게도 이번 논란으로 제기되는 ‘열악한 처우’ ‘제작비 후려치기’ ‘폭언욕설’ ‘일방적 저작권 귀속’ 문제는 지상파와 종합편성채널 그 어느 방송사도 예외는 아니다.

지난해 MBN에서 교양프로그램 영상 제작을 맡은 독립 PD가 MBN 소속 PD에게 얼굴을 맞아 안면골절 부상을 당하는 일이 벌어졌다. 주변에 있던 사람들의 신고로 경찰까지 출동했다. 병원에 가는 게 정상이지만 가해자와 피해자는 방송사로 돌아가 함께 시사(방송분을 미리 확인하는 것)를 진행해 논란이 됐다.

지난해 긴급 실태조사에 따르면 독립PD 123명 가운데 104명(84.6%)이 인격무시 발언을 들은 적이 있다고 답했다. 욕설을 들은 적이 있다고 답한 이는 61명이며, 이 가운데 5회 이상 욕설을 들었다고 답한 이는 19명이다. 기타 응답에는 ‘매일 시사 때마다’ ‘프로그램, 시사 때마다 무수히 많음’ 이라는 답변도 있었다. 인권침해 가해자는 주로 지금 침묵을 지키는 방송사 소속 PD나 직원이었다.

2012년 성추행에 가까운 일을 당한 여성 독립 PD가 방송사에 문제를 제기했으나 방송사는 “가해자 PD가 퇴직했다”며 되레 거짓말을 하며 가해자를 감쌌다. 한 지상파 방송사와 독립제작사 사이에 맺은 ‘프로그램 납품 계약서’에 의하면 독립제작사는 촬영원본을 포함한 프로그램과 관련한 모든 권리를 방송사에 넘겨야 한다. 

자사의 문제니 신중하게 접근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지금 침묵을 지키는 방송사 다수는 정작 자사의 이익이 걸린 사안에는 보도를 통해 핏대를 세워왔다.

지난 19일 방송통신위원장 청문회의 SBS 8뉴스 리포트 제목은 “이효성 후보자, ‘지상파 중간광고 적극 고려’”였다. UHD, 중간광고, 광고총량제 등 지상파와 종편은 보도를 통해 자사의 이익을 노골적으로 요구해왔다. 이런 자사이기주의 보도의 1할 만큼이라도 자사반성 보도를 내보낼 수는 없을까. 지금의 침묵이 무척 불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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