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취록서 드러난 국정원 언론통제

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이 재임 당시 노골적인 언론 통제를 시도했음이 전 부서장 회의 녹취록을 통해 드러났다. 검찰이 24일 ‘국정원 댓글’ 사건 파기환송심 결심공판에서 공개한 녹취록에는 원 전 원장이 4대강 사업과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비준안 통과 등 정부 정책에 비판적인 보도를 한 언론에 대해선 선제적 대응을 주문한 것으로 나온다.

2009년 12월18일 원 전 원장은 전 부서장이 참여한 회의에서 언론 대응에 소극적인 직원들에게 “잘못할 때마다 (언론을) 쥐어패는 게 정보기관의 역할”이라고 다그쳤다. 이날 녹취록을 보면 원 전 원장은 “내용이 문제가 아니고 잘못 나면 그것을 어떻게 죽이려고 해야지 어떻게 기사가 났는데 다음 보도를 차단시키겠다 이게 무슨 소리야. 기사 나는 걸 미리 알고 기사를 못 나가게 하든지 안 그러면 기사 잘못 쓴 보도 매체를 없애버리는 공작을 하는 게 여러분이 할 일이지 이게 뭐냐. 잘못할 때마다 쥐어패는 게 정보기관이 할 일이지 그냥 가서 매달리고 어쩌고 하면 안 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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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전 원장은 또 2011년 11월18일 녹취록에서도 “한-미 FTA를 물리적으로 처리한다면 한나라당이나 우리 정부 비난하는 일이 벌어질 텐데 그 일이 벌어지고 난 다음에 대처하지 말고 지금부터 칼럼이고 신문 곳곳에 가서 다 준비해 놓았다가 그날 땅 하면 바로 그날 아침 신문에 실리도록 준비하는 치밀함이 있어야 되는데, 원장 입에서 얘기 안 하면 그런 생각도 안 하고 있잖아요”라고 부서장들을 질책했다.

이어 “뭐든지 선제 대응을 해야지 하고 난 다음에 비난 기사 실리고 양비론 비슷하게 해가지고 다음에 칼럼 몇 개 실려봐야 무슨 의미가 있어요. 지방이든지 중앙이든지 미리 사설도 쓰고 그다음 칼럼 하나 실리고 그다음에 잘했다고 하는 광고까지 들어가서 국론이 분열되지 않도록 대비를 해야지”라고 적극적인 언론 통제를 주문했다.

이에 대해 검찰은 “(원 전 원장이) 국정원 등에 대한 보도, 특정 여론이나 언론매체에 적극적으로 공작 정치를 지시한 게 명백하다”고 주장했다. 한겨레는 “공개된 국정원 전부서장회의 녹취록에선 민주주의의 기반인 국회와 언론도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다는 원 전 국정원장의 인식을 엿볼 수 있다”며 “민주주의의 핵심 축인 ‘언론’과 ‘의회’마저 통제의 대상으로 본 것”이라고 지적했다.

더 노골적인 원세훈 선거개입 지시

아울러 이날 검찰이 재판부에 제출한 ‘국정원 전 부서장 회의’ 녹취록을 보면, 원 전 원장이 노골적으로 국내 정치와 선거 개입을 지시하는 내용이 다수 담겨 있어 파기환송심에서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까지 유죄로 인정할 수 있을지 주목된다.

특히 녹취록 중엔 원 전 원장 등 기소의 발단이 된 지난 2012년 대선에 국정원 전 직원이 동원돼 영향을 줘야 한다는 원 전 원장의 지시사항까지 나온다.

[한겨레] 2011년 11월18일 _총선·대선 온오프 대처 전직원이 나서라__종합 03면_20170725.jpg
2011년 10·26 재보선에서 정부·여당이 서울시장 선거에서 패한 후 2011년 11월18일 회의에서 원 전 원장은 “내년도에 더군다나 큰 선거가 두 개나 있는데, 선거나 이런 걸 볼 때 정확한 사실, 그러니까 사실이 아닌 것으로 해서 선거에 영향을 주게 되는 것은 우리 원이 역할을 제대로 못 하고 있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그러면서 그는 “온라인, 오프라인 대처에서, 특히 여기 있는 지부장들께서 관계되는 단체들이랄까 중간지대 있는 사람들 만나고 대화하느냐에 따라서 (선거를) 바꿀 수도 있고, 직원들 전체가 IT라든가 이쪽에 관계되는 부서만 보는 게 아니고 전 직원이 업무수행 과정에서 (신경을 쓰라)”라고 지시했다.

원 전 원장은 또 2009년 교육감 선거에서 진보진영 후보가 대거 당선된 사례를 언급하며 후보자 선정부터 사후 관리까지 선거 전반을 관리하라는 지시도 내놓았다. 그는 “제대로 된 인물이 발굴될 수 있도록 노력할 필요가 있다. 교육감 선거도 분열 때문에 (여권이) 졌잖아요. 지금부터 흐트러지지 않게 신경 쓰자. 지금 현 정부 대 비정부의 싸움이거든. 시간이 얼마 남지도 않았고. 12월부터는 (총선 후보) 예비등록 시작하지요? 특히 지부장들은 현장에서 (후보들) 교통정리가 잘 될 수 있도록 여러 가지 챙겨줘요”라고 주문했다.

한겨레는 “총선 예비후보를 교통정리 하라는 것이어서 사실상 국정원이 정당 공천에 사전개입하라는 지시”라며 “그러면서 그는 마지막으로 ‘우리가 했다고 하지 않으면 확인이 안 되도록 하는 게, (즉) 꼬리를 안 잡히도록 하는 게 정보기관’이라고 강조했다. 이미 불법적인 선거개입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이른바 ‘범행 모의’ 수준의 지시”라고 꼬집었다.

한겨레는 원 전 원장이 2009년 “지자체 선거가 11개월 남았는데, 우리 지부에서 지방자치단체장이라든가 의원들, 앞으로 후보 있잖아요. 이런 부분도 지금부터 잘 검증해야 한다. 95년 선거 때도 본인들이 원해서 민자당 후보로 나간 사람들은 없고 국정원에서 다 이렇게 나가라 해서 한 것”이라고 말한 것에 대해서도 “선거 개입을 넘어 국정원이 여당 후보 선정에까지 관여했을 가능성이 엿보이는 대목”이라고 지적했다.

박근혜 정부 때 은폐됐던 녹취록, 새 정부 국정원TF가 복구

검찰이 원 전 원장의 파기환송심 재판에 제출한 녹취록은 사실 박근혜 정권 시절 국정원 댓글 사건 재판 과정에서 공개될 기회가 있었다고 여러 신문은 분석했다.

2013년 채동욱 당시 검찰총장과 윤석열 특별수사팀장이 이끌었던 국정원 대선 개입 사건 수사 때 검찰은 원 전 원장 주재 전부서장회의 녹취록을 국정원에 요구했다. 하지만 당시 국정원은 보안상 이유로 일부분을 삭제해 검찰에 제출했다.

한겨레는 “현 정부 들어 꾸려진 국정원 적폐청산 테스크포스팀(TF)에서 과거 삭제됐던 부분을 복구해 검찰에 넘기면서 비로소 당시 무슨 일이 논의됐는지를 알 수 있게 된 것”이라며 “조기 정권교체가 이뤄지지 않았다면, 그래서 박근혜 정부에서 원 전 원장의 파기환송심이 마무리됐다면 녹취록이 제대로 빛을 보지 못했을 수 있었던 셈”이라고 밝혔다.

[세계일보] 문무일 _국정원 SNS 장악 문건, 靑에 반납과정 조사__종합 05면_20170725.jpg
원 전 원장의 파기환송심을 맡은 재판부는 애초 지난 10일 결심으로 재판을 끝낼 예정이었다. 하지만 이날 세계일보가 국정원이 작성한 ‘SNS 국정원 장악문건’을 보도하면서 검찰이 이 문건의 검토 시간을 요청해 결심이 미뤄졌다. 한겨레는 “그 사이 국정원 TF가 녹취록을 복구해 검찰에 전달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번에 공개된 녹취록이 다음달 30일로 예정된 원 전 원장의 선고 결과에 결정적인 증거가 될 수 있을지도 주목된다. 검찰 관계자는 중앙일보와 인터뷰에서 “이미 원 전 원장이 국내 정치와 선거에 개입했다는 증거와 법리가 완성돼 있다”며 “파기 환송했던 대법원도 무죄 판단을 하라는 게 아니라 일부 증거의 증거력을 문제 삼았던 것뿐이다. 유죄 판단이 내려질 것으로 예상한다”고 말했다.

중앙일보는 “녹취록이 원 전 원장 재판보다 향후 검찰 재수사에서 더 위력을 발휘할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며 “현재 진행 중인 국정원 적폐 청산 TF의 조사에서 이명박·박근혜 정부의 국정원 불법행위가 드러나면 검찰이 관련자들에 대한 수사에 나설 가능성도 있다”고 내다봤다.

“문무일, 검찰개혁 의지 있기는 한가”

문무일 검찰총장 후보자도 이날 열린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이명박 정부 시절인 2012년 검찰이 국정원의 정치 개입 정황이 담긴 ‘SNS 장악’ 문건을 확보하고도 수사 없이 그냥 청와대에 이첩한 사안을 조사하겠다고 밝혔다.

문 후보자는 관련 내용을 묻는 질문에 대해 “현재로선 관련 내용을 정확히 모른다”면서도 “취임하면 경위를 낱낱이 파악해 책임을 물을 것은 엄중하게 묻겠다”고 말했다.

세계일보는 “특검 수사 종료 후 해당 문건을 포함해 모든 자료를 넘겨받은 검찰은 김아무개 행정관만 대통령기록물 유출 혐의로 약식기소했을 뿐 당시 진행 중이던 원 전 원장의 국정원 댓글 및 대선 개입 사건 재판엔 활용조차 하지 않았다”며 “또 어떤 이유에선지 해당 문건을 2014년과 2015년 모두 청와대에 반납했다. 검찰 관계자는 ‘(당시 수사팀이) 왜 그렇게 했는지 알 수 없다’고 말했다”고 밝혔다.

[한국일보] ‘文정부 검찰 개혁’과 거리 두는 문무일_종합 01면_20170725.jpg
한편 문무일 후보자가 문재인 정부의 검찰개혁 과제에 대해 사실상 반대 입장을 밝혀 청와대와의 갈등이 예상된다는 지적도 나온다. 문 후보자가 검·경 수사권 조정과 고위공직자비리수사처(공수처) 설치 등 문 대통령 공약과 거리를 두는 태도를 보여 여야 정치인에게 “검찰개혁 의지가 없다”는 질타를 받았기 때문이다.

문 후보자는 박지원 국민의당 의원의 “(검찰개혁과 관련한) 문 대통령 선거공약을 지키도록 노력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검찰 수사의 중립성을 해치지 않는 한 (노력하겠다)”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검찰개혁과 관련된 민감한 질문에는 즉답을 피했다.

한국일보는 “문 후보자는 이날 청문회 내내 검찰개혁과 관련된 민감한 질문에는 즉답을 피했다”며 검·경 수사권 조정과 관련해선 검찰의 직접수사 기능을 유지해야 한다며 사실상 반대 입장을 보였다”고 전했다.

문 후보자는 “서면질의 답변서에서 검찰의 수사·기소 완전 분리 반대 입장을 표명한 것 맞냐”는 백혜련 더불어민주당 의원의 질문에 “수사권 조정 문제는 범죄로부터 국민과 국가공동체를 얼마나 효율적으로 잘 지켜내고 막아낼 수 있느냐의 문제”라며 “경찰 수사기록만 보고 기소 여부를 판단하기는 쉽지 않다”고 말했다.

공수처 신설에 대해서도 그는 “새로 논의되고 있는 공수처에 관해 다양한 의견이 있어 검찰 입장에서는 어느 의견이 옳다고 말씀 드리기 성급하다”면서 “성공한 특별검사 시스템을 제도화하는 방안을 강구해볼 필요가 있다”고 우회적으로 반대 의견을 피력했다.

이에 대해 한국일보는 사설을 통해 “검찰개혁에 대한 열망이 어느 때보다 높은 가운데 열린 청문회였지만 문 후보자는 공정하고 중립적인 검찰이 되겠다면서도 개혁의 청사진을 밝히지 않은 채 모호하고 원론적인 답변으로 일관해 적잖은 실망을 샀다”고 비판했다.

한국일보는 “문 후보자가 소신을 밝히지 못한 것은 검찰 내부의 반대가 그만큼 심하기 때문일 것”이라며 “검찰총장 후보자로서 언행에 신중할 필요는 있지만 이렇게 불분명한 답변에 미루어 그에게 분명한 검찰개혁 의지가 있기나 한 것인지가 의심스럽다”고 지적했다.

경향신문도 “문 후보자는 현재 시민들이 느끼는 검찰에 대한 분노와 불만부터 제대로 인식해야 한다. 새 정부의 검찰총장은 검찰 조직이 아닌 시민을 위한 검찰총장이어야 한다”면서 “검찰개혁에 신명을 바칠 각오가 돼 있지 않다면 문 후보자는 지금이라도 자신이 적임인지 재고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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