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이 지난 2011년 10·26 재보선 이후 2012년 총선과 대선을 앞두고 전부서장 회의를 통해 신문과 방송에 기사가 실리기도 전에 내용을 확보하도록 하는 등 총체적 여론 개입을 지시한 것으로 밝혀졌다.

23일 오후 서울고등법원 형사7부(김대웅 부장판사)에서 ‘국정원 댓글’ 사건으로 기소된 원세훈 전 국정원장 등에 대한 파기환송심 결심공판이 열렸다. 재판부는 변호인의 동의를 받아 검찰이 제출한 추가 증거 전체를 채택해 증거 조사 절차를 진행했다.

이날 공판에서 검찰은 대통령기록물 관리법 위반 사건 관련 문서에 대해 국정원이 청와대에 보고한 문건이라고 확인해준 내용과 원 전 원장이 주재한 회의 녹취록 등 기존 증거 자료에서 삭제된 부분을 국정원이 복원해 줬다며 문건 내용을 공개했다.

검찰에 따르면 원 전 원장은 2011년 10·26 재보선에서 정부·여당이 서울시장 선거에서 패한 후 전부서장 회의에서 언론에 대한 국정원의 선제적 대응을 강조했다. 이를테면 신문과 방송에 기사가 실리기 전에 미리 확보해 사설과 칼럼이 실리도록 하고 사설·칼럼에서 보수 단체가 잘됐다고 광고하도록 하는 등 총체적으로 여론 개입을 지시한 것으로 드러났다.

▲ 원세훈 전 국정원장. ⓒ 연합뉴스
▲ 원세훈 전 국정원장. ⓒ 연합뉴스
검찰이 국정원으로부터 원 전 원장 발언이 삭제된 문건을 복원해 받은 내용 중 언론 장악 관련 부분은 다음과 같다.

“언론에 내용이 잘못 나오면 다음 보도를 차단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기사를 미리 알고 못 나가게 할 건지, 기사를 잘못 쓴 매체를 없애 버리는 게 여러분이 할 일이다. 사전에 선제 대응해야 한다. 잘못할 때마다 줘 패야지 정보기관이 가서 매달리면 안 된다.”

“한·미 FTA를 여당이 물리적으로 처리하게 되는데 한나라당이나 정부가 비난받는 일이 벌어질 거다. 그렇게 일이 벌어지고 난 후 대처하지 말고 지금부터 모든 중앙과 지방, 신문·방송에 칼럼 등을 준비해 ’땅‘하면 바로 그날 아침 조간에 실리도록 준비하는 그런 치밀함이 있어야 한다. 원장 입에서 나오기 전에는 그런 생각도 안 하고 있다. 선제적으로 대응해야 한다. 오늘 예를 들어 빨리 처리해야 한다며 지방이든 중앙이든 미리 준비해서 사설도 어떻게 쓰고 칼럼 하나도 실리고 (보수 단체가) 잘했다는 광고까지 들어가게 해서 국론이 분열되지 않도록 대비해야 한다.”

앞서 지난 10일 세계일보가 보도한 ‘SNS의 선거 영향력 진단 및 고려사항’ 보고서와 관련해서도 검찰은 “원 전 원장은 향후 대선과 총선이 예정된 2012년도 상황에서 2011년 재보선 패배 분석 후 젊은 층의 SNS상 언론 흐름에 잘 착안해 향후 총·대선에 보수가 승리할 수 있는 방향성을 제시했다”며 “2012년 대선에 대한 선거운동 목적성이나 국정원법을 위반한 정치관여 고의와 직접 관련이 있다고 본다”고 주장했다.

세계일보 보도에 따르면 국정원 문건에는 “범여권 주요 단체·인물들의 홈페이지·블로그 등 인터넷과 SNS 간 실시간 링크·소통공간 확대 등 연동 기능 강화로 사용자 접근성을 제고해야 한다”고 기재돼 있다. 또 보수진영이 운용할 수 있는 매체들을 전부 연계해 보수 여론을 총결집, 확산하기 위해 “뉴스○○○·○○신문·○○○미디어협회 등 온라인 보수진영 시스템 연동 및 역량 결집을 통해 SNS 허브로 기능할 수 있도록 측면지원을 강화해야 한다”는 보수 언론 활용책도 나와 있다.

이날 검찰이 밝힌 국정원 심리전단 보고서 복원 내용에선 해당 언론사는 ‘뉴스파인더’와 ‘독립신문’인 것으로 드러났다. 아울러 국정원 심리전단 보고서에는 이들 매체에 인터넷 칼럼이 5건이 게재됐다는 내용과 함께 트위터·4대 포털·다음 뉴스·아고라 등에서의 활동도 상세히 기재돼 있었다.

한편 원 전 원장은 지난 2012년 4월 총선 이후 전부서장 회의에서 국정원 심리전단 활동을 보다 더 강화해야 한다고 강조하며 “사실상 우리 (국정)원이 하지만 지부도 심리정보국과 다 연결돼 하고 있다”면서 “대북심리전도 중요하지만 우리 국민에 대한 심리전이 꽤 중요하다”고 말했다고 검찰은 밝혔다.

원 전 원장은 취임 당시에도 심리전단 주요 업무 보고 문건을 보고 받았다. 검찰은 복원한 문건 내용을 소개하며 “국정 현안 대응 활동 보고와 정부 입장을 옹호하고 좌파세력 무력화 등 내용을 제작, 전파하고 있다는 내용이 기재돼 있다”며 “사이버 모니터링 강화와 좌파에 대한 이슈 선점, 원내 사이버 대응팀 보강과 원외 인력·조직 활용, 보수 파워 블로거와 사이버 논객을 육성 활용한다는 내용도 있었다”고 밝혔다.

한편 검찰은 이날 결심공판에서 국정원 심리전단을 동원해 국내 정치와 선거에 개입한 혐의로 기소된 원 전 원장에게 파기환송심에서 징역 4년과 자격정지 4년을 구형했다. 원 전 원장과 함께 기소된 이종명 전 국정원 3차장과 민병주 전 국정원 심리정보국장에 대해서는 각각 징역 2년 및 자격정지 2년을 구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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