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리기사-남부고발-철저 수사 지휘. 다그치도록.’ 청와대가 지난 14일 공개한 박근혜 정부 민정수석실 캐비닛 문건과 메모 중 고 김영한 전 민정수석이 작성한 것으로 보이는 내용 중 일부다.

박수현 청와대 대변인은 이 메모에 대해 “대리기사 건은 아마도 당시 세월호 유가족대책위원회의 대리기사 폭행 사건 관련 내용으로 보인다”며 “당시 민정수석실 관계자가 사건을 관할하던 서울남부지검에 무리한 수사를 요구했다면 직권남용 혐의가 적용될 여지가 있다”고 말했다.

이와 비슷한 내용은 지난해 말 언론에 보도된 김영한 전 수석의 업무수첩에도 기록된 것으로 드러나 당시 청와대가 세월호 진상규명 활동을 방해하고 유가족에게 부정적인 여론을 조성하기 위해 얼마나 적극적으로 개입해 왔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줬다.

김 전 수석이 2014년 9월19일 작성한 업무수첩에는 ‘대리기사 폭행-남부지검 고발-엄정’이라고 적혀 있다. 이 외에도 ‘김혜경(유병언 전 세모그룹 회장 측근) 신병 관련 방침. 대외 공개는 곤란-선처 가능성 상존’, ‘전교조 국사교과서 관련 조직적 움직임에 모든 역량 결집하여 대응-다각적 방안 마련’ 등 14일 청와대가 공개한 메모와 거의 동일한 내용이 기록돼 있었다.

또한 김 전 수석의 메모와 업무수첩 모두 관련 내용 앞에 장(長)이라는 글씨에 동그라미 표시가 돼 있는데 아마도 김기춘 전 비서실장의 지시사항임을 뜻하는 것으로 보인다.

세월호 가족대책위원회 간부의 대리기사 폭행사건 관련 김영한 전 민정수석 업무수첩 메모. 사진=이치열 기자 truth710@
세월호 가족대책위원회 간부의 대리기사 폭행사건 관련 김영한 전 민정수석 업무수첩 메모. 사진=이치열 기자 truth710@
지난 2014년 9월17일 새벽 발생한 세월호 가족대책위원회 간부의 대리기사 폭행 사건은 보수 성향의 ‘행복한 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행변)에서 대리기사 측 무료 변론을 맡으면서 논란이 커졌다. 행변은 당시 사건 현장에 함께 있었던 김현 전 의원(현 더불어민주당 대변인)까지 공동폭행 혐의자로 고소했고 서울남부지검은 가족대책위 간부들과 김 전 의원을 기소했다.

그러나 지난해 2월 1심 법원은 가족대책위 간부 일부의 폭행 혐의만을 인정하고 김 대변인은 대리기사 폭행에 가담하지 않았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이에 검찰은 항소했지만 11월 항소심에서도 김 대변인에게 무죄 판결을 내리자 상고하지 않아 무죄가 확정됐다.

김 대변인은 이에 대해 “검찰은 통상 무죄 판결에 대해 예외 없이 상고하는데 나에 대한 무죄 판결에 불복하지 않은 것은 검찰 스스로도 고발인에 대한 공소유지에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라며 “애초에 나에 대한 기소가 검찰 스스로의 판단이 아니고 김기춘 전 실장의 지시에 따른 것이라는 점을 강력하게 방증한다”고 지적했다.

실제 김영한 전 수석의 업무수첩을 보면 청와대는 당시 새정치민주연합 소속 국회의원으로서 ‘세월호 국정조사 특별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한 김 대변인을 대리기사 폭행사건 주범으로 지목해 첫날부터 관련 정보를 수집하고 검찰 수사를 지시한 것으로 나온다.

사건이 발생한 2014년 9월17일 당일에는 김 대변인은 목격자 신분으로 경찰 조사를 받았을 뿐이지만, 김 전 수석의 이날 업무수첩에는 ‘김현 의원, 폭행 건-세월호 가족 선동·조종’이라는 메모와 함께 사건에 연루된 세월호 가족대책위 간부와 대리기사 이름까지도 정확히 적혀 있다.

청와대는 사건 초기부터 꾸준히 관련 정보를 보고 받으면서 이 사건을 김 대변인이 세월호 가족을 선동해 벌어진 폭행 사태로 규정했다. 이후 대리기사 변호인 측의 고발 등 형사절차도 청와대가 지시한 방향대로 흘러갔다.

9월17일 이후에도 김 전 수석의 업무수첩에는 ‘대리기사 폭행-검찰 고발’(9월18일), ‘유가족 폭행사건-철저 지휘-치아 파손(9월20일), ‘세월호 유가족 폭행-월요일 지휘→지휘권 확립도록-기민하게 일하도록’(9월21일), ‘⑤세월호 유가족 폭행사건(김현 의원)’(9월22일), ‘김현 의원 사건 송치 시기-국감일자’(10월7일) 등 청와대가 해당 사건에 집요하게 개입했음을 보여주는 정황이 나와 있다.

▲ 김현 더불어민주당 대변인. 사진=이치열 기자 truth710@
▲ 김현 더불어민주당 대변인. 사진=이치열 기자 truth710@
김현 대변인은 지난해 12월 최순실 등 국정농단 사건 박영수 특별검사팀에도 김기춘 전 실장 등을 고발하며 “세월호 사건은 박근혜 재임 중 최대 아킬레스건이었고, 마침 나는 제1야당 소속 국회의원이자 국회 세월호 특조위 활동과 민주당 세월호대책특별위원회 상황실장으로 세월호 유가족들과 깊은 유대감을 갖고 있었다”며 “나에 대한 수사와 기소는 그 자체만으로도 세월호 파문에 대한 여론을 희석할 수 있는 좋은 소재였다”고 술회했다.

이어 “김기춘 전 실장은 민정수석의 통제를 받는 검찰로 하여금 대리기사 폭행사건의 정확한 진상과 사실관계를 파악하지도 않은 채 ‘세월호 가족 선동·조종’이라고 사건을 규정해 유죄로 몰아갔다”면서 “남부지검 고발을 민간에서 하도록 공작하는 것이 결코 적법한 공무집행이라고 할 수 없음은 당연한 일”이라고 지적했다.

김 대변인은 17일 미디어오늘과 인터뷰에서 “자유청년연합(대표 장기정)이 나를 고발한다고 한 순간 청와대 지시에 의한 공작이라는 것을 직감했다”며 “당시 사건 현장에서 내 명함을 가져가고 폭행 피해자로 지목됐지만 한 번도 등장하지 않은 정체 미상의 괴청년과 보수적 변호사 단체 ‘행변’이 대리기사를 무료 변론하겠다며 접촉하게 된 과정, 청와대가 사건을 어떻게 바로 알고 지시를 내렸는지 등은 여전히 밝혀야 할 의혹”이라고 말했다.

김 대변인은 지난 2012년 대선 직전 국가정보원 직원이 서울 강남의 한 오피스텔에서 댓글 공작을 벌이고 있는 것을 발각해 경찰과 선거관리위원회 측에 신고했다가 되레 ‘감금’ 혐의로 재판에 넘겨지기도 했다. 최근 항소심까지 무죄 판결을 받았지만 검찰은 대법원에 상고했다.

김 대변인은 “대리기사를 변호했던 행변의 주축인 강래형 변호사는 국정원 댓글 직원 감금 재판의 국정원 측 변호인이기도 했다”며 “가녀린 여성을 감금했다는 프레임을 만들어 선거에 이용했고 검찰이 나를 감금 혐의로 기소하기까지 당시 청와대와 새누리당 네거티브 대응팀, 국정원의 연결고리 찾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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