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영권 승계 문제와 그룹 재편 문제를 분리하지 마십시오.”

지난 14일 열린 ‘삼성 뇌물 재판’에서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이 삼성 측의 혐의 부인 주장 대부분을 거침없이 반박했다. “재판부를 기만하는 주장”이라며 날 선 비판을 가하기도 했다. 김 위원장은 삼성그룹 현안이 경영권 승계 작업이라는 특검 측 주장에 힘을 실었다.

김 위원장은 지난 14일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7부(김진동 부장판사) 심리로 열린 ‘삼성그룹 뇌물공여 국정농단’ 사건 제39회 공판에 증인으로 출석해 ‘경영권 승계 작업’ 쟁점을 둘러싸고 삼성 측과 설전을 벌였다. 우측 피고인석으로 아예 몸을 돌려 앉아 변호인을 바라 본 김 위원장은 고개를 연신 끄덕이거나 쉴 새 없는 손짓과 상기된 어조로 자본 시장 질서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피력했다.

▲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이 14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린 삼성전자 이재용 부회장의 뇌물죄 재판에 증인으로 출석하며 질문에 답하고 있다.ⓒ민중의소리
▲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이 14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린 삼성전자 이재용 부회장의 뇌물죄 재판에 증인으로 출석하며 질문에 답하고 있다.ⓒ민중의소리

김 위원장에 따르면 이재용 부회장의 경영권 승계작업은 “결코 완성되지 않았다”. 승계작업을 ‘기승전결’로 나눈다면 지금은 승이 마무리돼 전으로 진입하는 단계라는 것이다. 삼성 측은 1996년 에버랜드 전환사채 인수, 1999년 삼성SDS 신주인수권부 사채 인수 등을 통해 이재용 부회장이 삼성전자·삼성생명 지배력을 이미 확보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김 위원장은 ‘기’ 단계가 완료된 것일 뿐이라는 입장이다.

김 위원장은 “삼성과 관련된 모든 논란은 삼성생명에서 삼성전자로 이어지는 출자 고리에서 발생한 것”이라며 “이 출자구조를 깨끗하게, 합법적이고 사회가 수용할 수 있는 형태로 정리하지 않으면 이재용 부회장의 경영권 승계는 결코 완성된다 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삼성이 이 고리를 해결할 시나리오 중 하나가 ‘삼성생명 금융지주회사 전환’이었다. 특검이 지목하는 이재용 부회장의 부정청탁 사안 중 하나다.

김 위원장은 이어 “그룹 경영권 승계는 지분 승계만으로 이뤄지지 않고 총수가 시장과 사회로부터 정당성을 인정받아야 한다”면서 “이재용 부회장은 이를 위해 새로운 사업에 도전해 성공하는 신화만들기가 필요했다. 경영권 승계 최종 작업인 ‘결’로써 삼성 바이오로직스, 미국 전장전문기업 하만(Harman) 인수를 통한 전장사업 진출이 그것”이라고 말했다. 삼성 바이오로직스 관련 현안은 이재용 부회장이 대통령을 독대한 2016년 2월16일 안종범 전 정책수석 업무수첩에 기재돼있다.

“재판부 속이고 있다” 직언 나와… ‘정당성 회복’ 강조한 김상조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으로 이재용 부회장의 지분 지배력이 0.1%도 변하지 않았다”는 삼성 측 주장에 대해 김 위원장은 “숫자는 증가하지 않았죠”라고 일축했다. 삼성물산 합병 후 제일모직(구 에버랜드)과 삼성물산 두 갈래로 나뉘어진 이 부회장의 삼성전자 지배지분 루트는 ‘신 삼성물산’ 하나로 합쳐졌다. 김 위원장은 “지배 루트가 하나로 합쳐지고 루트의 (출자) 고리가 짧아졌다”며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지배력의 강화”라고 평가했다.

김 위원장은 삼성 측 변호인을 향해 “경영권 승계 문제와 그룹 재편 문제를 분리하지 말라”고 일축하기도 했다. 그는 “우리나라 재벌은 기업집단인 동시에 특정 가문이 지배하는 패밀리 비즈니스 그룹”이라며 “두 개를 분리하는 건 인위적 주장이다. 재벌 현실을 이해하려면 특정 가문이 결합된 것을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재판부를 속이고 있다”는 직언도 나왔다. 부정청탁된 삼성 현안으로 지목된 ‘금융지주회사 전환’에 대한 삼성 측 변론에 대해서다. 삼성은 삼성생명을 지주회사와 생명보험 자회사로 쪼갤 시 생명보험사 자본 3조원을 지주회사로 옮기는 것이 국제 회계 기준(IFRS 2단계)을 맞추기 위해서라고 주장했다.

김 위원장은 “나는 정말 삼성그룹이 국민이나 보험계약자를 무서워하지 않는 것까진 이해하지만 감독당국을 아예 바이패스하는 게 아닌가 의심스러웠다”면서 “재판부를 기만하는 주장이라 생각한다”고 반박했다. ‘현금 3조원’ 이전 안은 보험계약자의 재산을 그룹 지배력 강화에 이용한다는 비판 및 생명보험사의 자본 지급 여력을 약화시킨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김 위원장은 변호인과의 오랜 설전 가운데 “질문에 대한 답에 충실해 달라”는 재판부 제지를 받기도 했다. 김 위원장이 “삼성그룹은 법을 지켰다는 것 만으로 사회적 정당성을 인정받을 수 있는 기업이 아니”라며 “우리나라 대표적인 그룹이니 법을 지키는 것은 기본이고 사회와 시장으로부터 정당성을 인정받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 그러면 이재용 부회장이 우리 사회의 존경받는 기업인이 될 것”이라고 증언한 직후였다.

이 날 김 위원장은 오후 2시부터 밤 9시40분 경까지 8시간 가량 동안 저녁 식사를 거른 채 마라톤 증인 신문에 임했다. 특검 측에서는 이례적으로 박영수 특별검사가 검사석에 나와 신문 과정을 지켜봤다.

이재용 부회장은 휴정이 선언된 후 법정을 나가는 도중 김 위원장과 박 특검 등에 살짝 머리를 숙여 함께 인사를 나누기도 했다.

삼성 측 변호인단은 재판 종료 전 “증인은 특검에 경영권 승계 프레임에 대한 아이디어를 제공했다고 알려졌다. 증인의 언론 인터뷰에서도 나온 사실”이라면서 “이건희 회장 와병 후 이뤄진 정상적인 구조개편을 모두 경영권 승계 작업이라고 한다. 비핵심 계열사 매각, 삼성SDS 상장 등을 모두 승계작업으로 보는데 삼성생명·삼성전자 지배력과 무슨 관계가 있는지 묻고 싶다”고 반박했다.

변호인단은 이어 “경영권 승계는 사실상 완료됐다”며 “증인은 시민운동가이자 학자로서 상당히 이상적인 것을 말했다. 현실에서의 경영권 승계는 그리 이상적이지 않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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