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정의의 사도나 투사도 아니고 언론인으로 36년간 있다가 떠날 사람이라 조심스럽다. 어떻게 보면 비겁해서 살아남은 것이다.” 황호택 동아일보 고문이 웃으며 말했다. 그는 1987년 박종철 탐사보도 주역 중 한 명이다. 당시 동아일보는 중앙일보에 1보는 뺏겼지만 이후 고문치사 사건을 끈질기게 보도했다. 

당시 법조팀장이었던 황 고문은 햇수로 겨우 6년차 기자였다. 다른 언론사 법조팀장이 10년 이상의 차장급 기자들이었던 것과 비교해보면 상당히 어린 편이다. 법조팀에 있으면서 ‘유시민 항소이유서’ 등을 단독보도하는 역량을 보여 낮은 연차에도 불구하고 덜컥 팀장을 맡게 됐다고 황 고문은 설명했다. 

지난 5월 황 고문은 묵혀둔 ‘숙제’를 해결했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당시 상황을 재구성해 기록으로 남기는 일이다. 제대로 기록하기 위해 사건의 당사자들을 수차례 만나 인터뷰를 진행했고 당시에는 차마 공개하지 못했던 내부제보자들의 이야기도 담았다. 이는 ‘박종철 탐사보도와 6월 항쟁’으로 출간됐다. 

저서에는 당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조작하고 은폐하려 했던 이들의 이름도 모두 담겼다. 이에 황 고문은 “한편으로는 당사자들이 명예훼손 소송을 제기하지 않을까 걱정했다”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소송 좀 해줬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다. ‘당신 그때 그러지 않았냐’고 묻고 싶은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 30년 동안 동아일보도 우여곡절이 많았다. 사건 당시 “하늘이여, 땅이여, 사람들이여”라는 칼럼으로 독자들에게 울림을 준 김중배 전 동아일보 편집국장은 “이제 언론은 권력과 의 싸움이 아니라 자본과의 싸움을 해야한다”며 1991년 회사를 떠났고 동아일보의 위상도 이전 같지 않다. 

이에 대해 황 고문은 “아직도 동아일보의 ‘야성’ 살아있다고 생각한다”며 “김중배 선생은 내가 편집국장으로 모셨던 사람이다. 생각이 같은 부분도 있고 다른 부분도 있다. 말하기가 참 어렵다”고 말을 아꼈다. 황 고문을 11일 동아일보 사옥에서 만났다. 아래는 황 고문과의 일문일답이다. 

▲ 황호택 동아일보 고문. 사진=이치열 기자
▲ 황호택 동아일보 고문. 사진=이치열 기자
-1987년 1월 당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처음으로 보도한 곳은 중앙일보였다. 당시 중앙과 동아가 석간에서 경쟁을 하던 상황에서 소위 ‘물을 먹은 것’인데 당시 상황이 어땠나?
“처음에는 중앙일보 경찰 출입 기자가 쓴 기사인줄 알았다. 그런데 알고 보니 중앙일보 법조팀에서 썼다고 하더라. 많이 아팠다. 시작부터 물을 먹긴 했지만 결과적으로 1년 가까이 관련 기사를 쓰면서 특종도 여러 건 했고 기사도 많이 썼다. 기자로서는 행운이었다.” (황 고문은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탐사보도로 한국기자상을 두해 연속으로 수상했다.)

-당시 신성호 중앙일보 기자가 어떻게 특종을 했는지 궁금하지는 않았나?
“신성호 기자가 25년 동안 취재원을 밝히지 않았다. 어디서 이걸 특종을 했을까 늘 궁금했다. 나는 박종철군 아버지를 통해 중앙일보에 근무하던 친척에게 ”종철이가 어떻게 됐는지 알아봐달라“고 부탁했다는 이야기를 들어서 제보가 있었을 것이라 생각했다. 나중에 신 기자는 이홍규 당시 공안4과장이 취재원이라고 밝혔다. 그럼에도 여전히 나는 제보 가능성도 있다고 본다. 제보가 있었다고 해서 1보 특종의 가치가 떨어지거나 명예가 떨어지는 건 아니다. 물론 물 먹은 기자가 핑계거리 찾는다고 할 수도 있겠다.(웃음)” 

-당시 언론통제 상황에서 기자들은 ‘제도 언론’이라고 비판받았다. 그럼에도 기자들이 한 노력이 있다면?  
“보도지침 때문에 학생들 데모나 구속, 재판 선고 기사는 다 크기가 제한돼 있었다. 그럼에도 기자들은 1단, 두줄 짜리 기사라도 쓰려고 했다. 어느 날은 사회면 3분의 2가 1단짜리 기사로 채워졌다. 얼마나 많이 구속되고 선고됐으면 그랬겠나. 당시 한 판사가 기자들에게 밥을 사면서 기사에 자기 이름은 빼달라고 했다. 전두환 정권 하에서 민주화를 요구했다는 이유로 징역 2년, 3년 선고하는 게 그 사람들로서는 자랑스럽지 않았을 것이다.”

-당시 동아일보를 포함한 언론계 분위기는 어땠나? 
“다른 언론사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고문해서 학생을 죽였는데 그 진실을 밝히자고 생각하지 박수 칠 언론이 어디 있겠나. 다만 정권의 압박이 너무 심하니까 다들 주저하고 겁냈다. 숨죽이고 눌려 있었지만 ‘(전두환 정권) 진짜 나쁜 놈들이네’ 이런 분위기였다. 한편으로는 자포자기 하는 기자들도 있었다. 어차피 기사를 써도 나가지 않으니 아예 취재를 가지 않는 것이다. 박종철군 화장터 취재도 중요한 취재 거리임에도 동아일보와 한국일보 기자만 갔다.”

▲ 황 고문이 전두환 정권 당시 1단 짜리 기사를 보여주고 있다. 사진=이치열 기자
▲ 황 고문이 전두환 정권 당시 1단 짜리 기사를 보여주고 있다. 사진=이치열 기자
-그런 상황에서 동아일보가 박종철 사망 이후 적극적으로 보도했다. 정권 차원의 압박이 있거나 기자 개인으로 느끼는 두려움은 없었나? 
“87년 1월에 고문근절 캠페인 시리즈에서 내가 첫 기사를 썼다. 하지만 기자 이름은 나가지 않았다. 기자를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당국이 김중배 논설위원을 연행할 움직임이 보이자 기자들이 댁에 전화해서 상황을 알린 적도 있다. 끌려가면 수모, 모욕은 물론이고 개박살나게 맞았다. 국가안보를 위해서 했다? 웃기는 이야기다. 국가안보를 자기들만 하나. 정권을 지키기 위해서 한 짓이지.”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취재하던 기자들이 취재가 끝나고 회사로 돌아가지 않는 일종의 ‘파업’을 했다고 들었는데 자세히 설명해달라.
“경찰서 출입하던 사건 기자들의 스트라이크였다. 동아일보가 석간이었기 때문에 취재를 끝내고 오후6시 즈음에 회사로 돌아와 회의를 했다. 1월17일에 기자들이 취재를 굉장히 열심히 했는데 취재한 것의 반의 반도 기사로 나가지 못했다. 그래서 기자들이 회사로 돌아오지 않았다. 이 사건이 시경캡, 사회부장, 편집국장에게 보고됐고 ‘내일부터는 확인된 팩트는 다 실어준다’는 답을 받았다. 대신에 하나라도 사실관계가 틀리면 큰일난다는 경고도 있었다.”

-그래서 실제 이후에는 관련 기사가 많이 보도됐나?
“1월19일 신문은 총 12개 지면 중에 5개 면이 박종철 관련 기사로 채워졌다. 당시 사장이 지면을 보고 ‘지구 최후의 날 같다’고 할 정도였다. 회사에 많은 압박이 가해졌을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회사가 하루는 치고 하루는 빠지고 했던 방식이 현명했다고 본다. 계속 치고 나갔다면 더 고위층을 통한 압박이 들어올 수도 있었고 편집국장이나 사회부장이 안기부에 끌려갔을 수도 있었다.”

-당시 동아일보 가판이 40만부가 팔렸다고 알려졌다. 
“당시 동아일보가 배달하는 부수가 60만부였다. 그러니 40만부가 가판에서 나갔다는 건 어마어마 한 것이다. 신문을 더 달라고 하는데 윤전기 용량 때문에 신문을 더 못 찍을 정도였다. 당시 동아일보 신문을 보고 ‘신문이 아니라 대학가 찌라시를 보는 것 같다’고 한 사람도 있었다. 그 정도로 민주주의에 대한 시민들의 갈증이 심했다. 분명히 엄청난 사건이 터졌는데도 다른 신문에서는 관련 기사를 잘 찾을 수 없고 방송뉴스는 ‘땡전뉴스’만 하던 시절이었다.”

▲ 1987년 1월16일자 동아일보 지면
▲ 1987년 1월16일자 동아일보 기사
-고문추방캠페인 시리즈가 나갔지만 약간 소강 국면에 접어들었고 북한의 김만철 일가가 들어오면서 세간의 관심도 낮아졌다. 동아일보도 호외를 냈다. 이에 역사학자 서중석은 “기성언론으로 돌아왔을 뿐” 이라고 비판했다. 
“김만철 일가 11명이 탈북한 사건은 그 자체로 충격이었다. 일단 사람들의 관심이 높았을 뿐더러 박종철 사건은 정부 간섭이 심했는데 김만철 사건은 간섭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정부로서는 백만원군을 얻은 셈이었다. 물론 박종철은 박종철대로 쓰고 김만철은 김만철대로 쓰면 되지 않냐는 비판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당시 고문경찰 두 명이 구속됐고 사인도 고문치사로 밝혔졌고 그 이상의 취재가 어려웠던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아쉬운 부분은 있다. 당시 구속된 고문경찰 두 명이 계속 억울하다며 가족들에게 하소연을 했는데 그 가족을 취재했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그리고 87년 5월에 동아일보 기자 132명이 편집국에서 “민주화를 위한 우리의 주장”을 발표했다. 지금 동아일보와는 분위기가 조금 다르게 느껴지기도 한다. 
“당시에는 한겨레도 없었던 시대라 동아일보가 야당지 역할을 많이 했다. 당시 90%에 가까운 기자들이 성명에 서명을 했다. 나는 기사 쓰느라 정신이 없었는데 서명 하라고 찾아왔더라. ‘언론자유나 민주화 다 맞는 이야기인데 기자는 기사를 쓰고 봐야지’ 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서명은 했다.”

-박종철 사건 당시 칼럼을 썼던 김중배 전 편집국장이 1991년 이른바 ‘김중배 선언’을 하고 회사를 떠났다. 동아일보의 야성이라고 해야 하나. 이런 게 점점 줄어드는 느낌이 들었다. 
“아직도 동아일보의 야성이 살아있다고 생각한다. 김중배 선생은 내가 편집국장으로 모셨던 분이다. 말하기가 조심스럽다. 선생과 생각이 같은 부분도 있고 다른 부분도 있다. 당시 손석춘 기자 등 몇몇 기자들이 선생을 따라 회사를 떠났다.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을 수 있지만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다만 나는 혁명가도 아니고 혁명가 깜도 못 된다.”

-동아일보 이야기를 하나만 더 하자면, 74년에 동아투위 사건이 있었고 아직도 해결되지 않고 있다. 동아일보에 몸 담고 있는 사람으로서 이는 어떻게 보나. 
“동아사태 당시 제작거부파와 제작참여파가 있었다. 나는 동아투위 사건 뒤에 입사했지만 제작참여파를 선배로 두고 일한 사람이다. 제작참여파들은 ‘고기가 물을 떠나서는 살 수 없다’는 입장이었고 제작거부파는 ‘안기부가 들락거리는 이런 분위기에서 뭘 하겠나’ 라는 입장이었다. 언론의 역할에 관한 가치관이 달랐다. 동아투위 선배들이 민주화에 공헌한 바가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때 나갔던 사람들만 ‘선’이고 남은 사람들은 ‘악’ 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반대의 도식도 마찬가지다.” 

▲ 황 고문이 지난 5월 출간한 '박종철 탐사보도와 6월 항쟁'
▲ 황 고문이 지난 5월 출간한 '박종철 탐사보도와 6월 항쟁'
-다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으로 돌아가 보자면, 당시 사건이 87년 6월 항쟁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예상했나. 
“당시 나는 갓 서른을 넘긴 기자였다. 그 나이에 세상을 알면 얼마나 알겠나. 고문치사 사건이 터졌을 때만 해도 전두환 정권이 무너지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다만 동아일보 간부들 중에서는 ‘정권이 88올림픽일 치러야하기 때문에 80년 광주에서처럼 싹쓸이는 못할 것’ 이라고 생각한 이들이 있었다. 그런 판단 하에서 보도가 가능했다고 생각한다.”

-‘박종철 탐사보도와 6월 항쟁’은 벌써 증보판 5쇄에 들어갔다고 들었다. 달라지거나 추가된 내용이 있나?
“1판을 쓰면서 고려 끝에 쓰지 않은 사실이 있다. 박종철군 아버지가 경찰로부터 합의금 9500만원을 받은 사실이다. 당시에 집 한채 값이 2000만원에서 3000만원 수준이었다. 왜 9500만원이가 생각을 해보니 ‘경찰이 억대 합의금을 줬다’는 비판을 안 들으려고 그랬던 것 같다. 유족들이 합의금을 받은 게 나쁘다고 볼 수도 없다. 그래도 1판에는 안 썼는데 이번에5쇄(2판 1쇄)를 찍으면서 이 내용을 썼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언론이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언론 혼자서만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진상을 파헤쳤다고 생각 하면 큰 착각이다. 당시 고문의 현장을 기자에게 이야기 해준 의사들, 시신을 바로 화장하지 못하게 한 검사, 교도관 신분이면서도 내부 고발자 역할을 한 사람들, 이를 폭로한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신부 등 그런 사람들이 없었다면 '박종철'은 없었다. 다른 의문사들처럼 묻혔을지도 모른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6월 항쟁으로 꽃 핀 데는 그런 양심들이 큰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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