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안부 관계 조사결과 발표에 관한 고노 내각관방장관 담화’, 일명 고노 담화는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일본정부의 공식입장이었다. 식민지 지배에 대한 사죄를 담은 무라야마(총리) 담화와 달리 관방장관 담화는 각의 결정의 절차가 없지만, “역대 내각이 이(고노 담화)를 계승하고 있다”는 내용의 각의 결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고 김학순 할머니의 증언이 고노 담화를 이끌어낸 출발점이었다. 1990년 6월 참의원 예산위원회에서 나온 ‘종군위안부는 일본군과는 관계가 없는 민간업자의 활동이었다’라는 답변이 위안부 생존 피해자들의 공분을 불러일으켰고, 91년 8월 김학순 할머니가 첫 증언을 내놓게 된다. 이어 일본의 위안부 연구자인 요시미 요시아키 교수가 일본군과 관헌이 위안부 모집을 주도한 내용을 담은 문서를 공개하면서 일본 정부도 대응에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1991년 12월부터 약 1년8개월간 진행된 위안부 문제에 대한 조사 결과와 함께 발표된 고노 내각관방장관의 담화(1993년 8월4일)는 일본의 역사인식에 있어서 세 가지의 중요한 진전을 담고 있었다.

▲ 1993년 내각관방장관 시절 고노 담화를 발표한 고노 요헤이. ⓒ 연합뉴스
▲ 1993년 내각관방장관 시절 고노 담화를 발표한 고노 요헤이. ⓒ 연합뉴스

즉 △위안소의 설치, 관리 및 위안부의 이송에 관해 옛 일본군이 직간접적으로 관여했다. △본인의 의사에 반해 모집된 사례가 많았고 관헌 등이 직접 이에 가담한 적이 있다.(한반도는 우리나라의 통치 아래에 있어 그 모집, 이송, 관리 등도 감언, 강압에 의하는 등 대체로 본인들의 의사에 반해 행해졌다) △위안소에서의 생활은 강제적인 상황하의 참혹한 것이었다.

이처럼 고노담화는 위안부 제도가 일본군과 관계가 없다는 기존 주장에서 ‘군과 관헌이 관여, 가담’했다고 진일보했고 강제연행 사실도 부분적으로 인정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일본 측의 태도변화를 촉구하며 고노 담화와 함께 언급한 무라야마 담화는 1995년 8월15일 ‘전후 50주년 종전기념일을 맞아’라는 제목으로 발표됐다. 이는 “우리나라는 멀지 않은 과거의 한 시기에 잘못된 국책으로 전쟁의 길로 나아가 국민을 존망의 위기에 빠트렸으며, 식민지 지배와 침략으로 많은 나라들, 즉 아시아 여러 나라 사람들에게 막대한 손해와 고통을 주었다” “뼈에 사무치는 반성의 뜻을 표하고, 진심으로 사과의 마음을 표명한다”는 등의 내용이다.

무라야먀 담화는 위안부 문제와 직접 관련된 것은 아니며 식민지 지배에 대한 사죄를 담고 있다.

고노담화 검증은 예정된 수순

고노 담화는 그 내용 뿐 아니라 형식면에서도 매우 불완전했기 때문에 피해국이나 단체들로부터 크게 환영받지 못했다. 고노 담화는 일본정부의 공식 입장이라는 의의는 있지만, 총리가 아닌 일본의 관방장관(한국으로 치면 청와대 비서실장의 역할)의 담화에 불과하며 따라서 각의 결정도 필요로 하지 않았다.

이런 취약함 때문에 고노담화는 ‘역사개작’을 추진하는 일본 우익에 의해 사문화될 운명에 놓인다.

고노담화와 함께 호소카와 모리히로 총리의 “제2차 대전은 침략 전쟁이며 잘못된 전쟁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기자회견이 나온 1993년 8월, 자민당엔 오쿠노 세이스케 의원을 중심으로 하는 역사검토위원회(1993년 8월~1995년 2월)가 출범했다. 오쿠노 세이스케는 식민지 시기 특별고등경찰 과장과 내무성 관료를 맡았고(이후 문부상, 법무상, 국토청 장관) 조선인의 창씨개명을 추진했던 인물이다. 그는 위안부 문제에 대해 “나라가 강요한 적은 없었다. 상행위에 참가한 사람들이다”라는 등 망언을 일삼아왔다.

중의원에 처음으로 당선된 아베 신조는 역사검토위원회 위원으로 이름을 올렸다. 역사검토위원회가 1995년 8월15일 발간한 ‘대동아전쟁의 총괄’은 △태평양전쟁은 침략 전쟁이 아닌 자존, 자위의 전쟁이며 아시아 제민족의 해방을 위한 전쟁이었다, △난징대학살과 위안부 등은 날조된 것이다 △일본의 역사교과서는 편향되어 있어 ‘새로운 역사교과서 전쟁’이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역사검토위원회는 이후 ‘밝은 일본 국회의원연맹’, ‘일본의 앞날과 역사 교육을 생각하는 젊은 의원모임’ 등으로 맥을 이어가며 아베 신조의 정치적 성장을 뒷받침한다.

2012년 12월 출범한 제2차 아베 내각은, 결국 고노담화를 사문화하기 위한 작업에 돌입한다. 이들은 고노담화가 기반한 피해자 증언의 신뢰도가 부족하고 강제성의 증거를 찾지 못했다며 2014년 2월 고노담화를 검증하겠다는 방침을 밝혔고 몇 달 뒤인 6월 검증보고서를 발표했다.

검증보고서에 담긴 주요 주장은 △고노담화 발표를 앞두고 한일 간의 사전 조율이 있었다 △일본 측이 관계 문헌 조사, 청취 조사 등을 실시한 결과 강제연행은 확인할 수 없었다는 것 △피해여성들을 인터뷰한 내용에 대한 사실 확인을 하지 않았다는 것 등이다.

일본이 ‘사전 조율’을 강조하고 나선 배경은 고노담화가 ‘사실’에 근거하지 않은 양국 간 정치적 협상의 결과라고 호도하기 위한 것이다.

예컨대 고노 담화에 나오는 ‘군의 관여’라는 표현과 관련해 “한국 측은 ‘군 또는 군의 지시를 받은 없자’가 이 일을 맡았다는 문언을 제안하면서, 모집을 ‘군’이 하였다는 점과 업자에 대해서도 군의 ‘지시’가 있었다는 표현을 요청”하였고 일본 측은 “군의 ‘요망’을 받은 업자라는 표현을 제안”하여, “최종적으로 설치에 대해서는 군 당국의 ‘요청’에 의해 설치되었고, 모집에 대해서는 군의 ‘요청’을 받은 업자가 이 일을 맡았다는 표현으로 결론을 보았”다는 것이다.

검증보고서 자체에 나오듯이 한국의 입장은 “일본 측이 실시하는 발표는 한국 측과의 협의를 거쳐 이루어질 일이 아니며” “발표내용은 한국 측도 납득시킬 수 있는 내용에 최대한 가깝게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원론적 수준이었다. 양측 정부의 ‘조율’이 있었다 하더라도 이것이 강제연행의 유무와 같은 역사적 사실을 뒤바꿀 수 있는 문제도 아니다.

사실 확인이 안되었다는 주장 역시도, 일본 정부의 자체조사 뿐 아니라 위안부 문제에 대한 유엔(쿠마라스와미 보고서, 게이 맥두걸 보고서 등)과 국제사회의 많은 조사가 이뤄져왔다는 점에서 흠집내기를 위한 명분에 불과해 보인다.

법적 책임을 인정하는 것이 먼저다

고노담화는 사실 위안부 문제가 부상한 뒤 일본 정부가 내놓은 첫 번째 공식입장에 불과하다. 또한 국회 결의나 ‘법률’로서 확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일본 내부의 정치적 변동에 취약하다.

내용적으로도 고노 담화는 피해자들의 요구나 국제사회에서 정립된 기준에 비춰 매우 불완전하다. 고노 담화는 위안소 생활이 “강제적이고 참혹한 것”이었다고 했지만 성노예제라는 실상이 드러나지 않는 추상적인 수준이며, 강제연행 문제에서도 “군의 요청을 받은 업자가 주로 담당하였으나 그 경우도 감언, 강압 등에 의한, 본인들의 의사에 반하여 모집된 사례가 많다” “더욱이 관헌(官憲) 등이 직접 이에 가담한 적도 있었다”라고 했다.

특히 책임 문제에 있어서 고노 담화는 “당시 군의 관여 아래 다수 여성의 명예와 존엄에 깊은 상처를 입힌 문제” “위안소의 설치, 관리 및 위안부 이송에 대해서는 일본군이 직간접적으로 관여했다”라는 불명확한 표현으로 법적 책임을 희석하고 있다.

▲ 1938년 3월 일본군 육군성 부관이 북지방면군 및 중지방면군 참모장에게 보낸 위안부 모집에 관한 공문서. 사진제공=국가기록원
▲ 1938년 3월 일본군 육군성 부관이 북지방면군 및 중지방면군 참모장에게 보낸 위안부 모집에 관한 공문서. 사진제공=국가기록원

하종문 한신대 교수는 “고노 담화는 위안소 시스템에 일본 정부가 일정 정도 관여했다는 것을 인정했다는 면에서 획기적이었지만, 강제연행의 형해화와 민간업자의 강조라는 부정적 효과의 결정적 근거를 제공했다”며 “위안소 체계에 관한 책임 추궁이 군을 매개로 일본 정부로 나아가는 것을 차단하고 감소시키기 위해 민간업자의 책임을 가미”한 것이라고 지적한다.(‘군의 작전과 조직체계하에서의 위안소, 위안소 업자’. 2007. ‘강제성이란 무엇인가’ 토론회)

요시미 요시아키 교수는 “위안소 설치는 군의 명령에 의한 것”이며 여성을 이송할 때 군용선과 군의 트럭을 이용했고 건물, 내부 개장, 위안소 규정, 요금 등을 일본군이 정하고 통제했음을 지적한다. 군이 ‘관여’한 것이 아니라 군이 ‘지시’하고, 업자에게 운영을 맡길 때조차 군이 감독하고 통제한다는 것이다.

그는 “고노 담화가 말하는 군의 관여라는 말로는 불충분하다”며 “다수 여성의 명예와 존엄에 깊은 상처를 준 주체는 군이며, 업자는 그 수족”이라고 설명했다.(‘고노담화, 그 의의와 문제점’ 2013. ‘그들은 왜 일본군 위안부를 공격하는가’)

고노 담화는 이처럼 법적 책임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후속조치 역시 국내법의 제정, 국가배상이 아닌 도의적 수준에서의 ‘국민기금’을 통한 피해자 지원 정도였다. 이는 법적 책임을 인정하지 않은 상태에서 일본 스스로에게 면죄부만 주는 방식이었기 때문에 피해자들에 의해 거부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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