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계 블랙리스트(정부 지원 배제 명단)’ 피해자가 김기춘 전 대통령 비서실장을 향해 “거짓말하지 말라”고 소리치며 오열해 블랙리스트 재판 법정에서 일대 소란이 벌어졌다.

28일 오전 11시25분 경,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30부(황병헌 부장판사) 심리로 열린 김기춘 전 실장, 조윤선 전 문체부 장관 등의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 사건 재판에서 김 전 실장에 대한 피고인 신문이 진행되던 중에 “뭘 몰라요! 거짓말하지 마세요!”라는 외침이 방청석에서 터져나왔다.

이날 방청을 온 임인자 전 ‘변방연극제’ 예술감독은 중법정 내 모든 사람이 들을 수 있을 만한 크기로 소리쳤다. 재판부는 즉각 퇴정조치를 명했다. 임씨는 퇴정 명령 후에도 4분 가량 자리에 앉은 채로 오열했다.

결국 법원 직원 3명이 임씨의 팔다리를 붙들고 그를 법정 밖으로 끌어냈다. 임씨는 법정 밖으로 나온 후에도 십여 분간 울음을 멈추지 못했다.

소란을 일으킨 이유에 대해 임씨는 “공판을 자주 오는데 증거로 나오는 명단 자체를 보는 게 힘들다”며 “처음 공판에 내 이름이 수기로 쓰여져 있는 것을 보는 것도 힘들었고 가까운 동료들의 이름이 계속 나오는 것도 괴롭다”고 말했다.

임씨는 이어 “그런 상태에서 (김 전 실장이) 계속 모른다고 하니까…”라면서 “(블랙리스트는) 단지 지원배제가 아니라 예술활동을 한다는 것은 사실 우리에게 생명과도 같다”며 “그런 것을 쥐고 있었는데 일말의 반성도 없고 이 사건의 심각성도 모르고 그런 모습이 화가 났다”고 밝혔다.

김기춘 “전혀 몰랐다”

김 전 실장은 ‘피고인이 블랙리스트를 관리한 게 사실이냐’는 특검 측 질문에 “명단을 만들거나 내려보내고 적용하는 과정에 대해 보고를 받거나, 명단을 보거나 한 적이 없다”며 “재임 중 알지 못했다”고 답했다.

김 전 실장은 ‘블랙리스트’라는 개념에 대해서도 “검사님이 자꾸 블랙리스트라고 말하는데 ‘무슨 배제 지원 명단’, ‘블랙리스트’는 언론 보도로 처음 들었다”며 “내가 근무할 당시 청와대에 블래리스트 명단이라는 말은 없었다”고 주장했다.

김 전 실장은 1시간30분 가량 피고인 신문 동안 특검 측이 제시한 모든 문화계 블랙리스트 관련 문건에 대해서도 “전혀 몰랐다” “기억에 없다”고 일관했다.



▲ ‘블랙리스트’ 작성 및 관리에 관여한 혐의로 기소된 김기춘 전 대통령 비서실장이 28일 오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리는 3차 공판에 출석하기 위해 법정으로 향하고 있다. ⓒ 연합뉴스
▲ ‘블랙리스트’ 작성 및 관리에 관여한 혐의로 기소된 김기춘 전 대통령 비서실장이 28일 오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리는 3차 공판에 출석하기 위해 법정으로 향하고 있다. ⓒ 연합뉴스

특검이 국가정보원이 작성해 청와대에 보고한 ‘시도 문화재단 좌편향 일탈 행태 시정 필요’ 문건에 대해 “피고인이 지시했냐”고 묻자 김 전 실장은 목소리를 높이며 “국정원 자체의 일이다. 내가 이래저래라 한 일이 없다”고 반박했다.

김 전 실장은 해당 문건에 ‘건전 언론·단체와 협조해 국민적 공분 조성’이 적힌 것에 대해서도 “전혀 모르는 일이고 국정원의 일”이라고 일축했다.

“그럼 국정원이 정부 방침과 무관하게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이런 문건을 작성해 청와대 비서실에 보냈다는 말이냐”는 특검 측 질문에 그는 “뭐라 답해야 할지 모르겠다. 박근혜 정부 하의 국정원은 박근혜 정부 국정철학에 따라 운영되지 않느냐”고 말했다.

김 전 실장은 청와대가 국정원이 작성한 보고문건을 문화체육관광부에 내려 보낸 것에 대해서도 “내가 내려 보낸 적 없다”며 “누가 보냈는지 알지 못한다”고 답했다.

청와대 비서관의 ‘상부’가 누군지 모르겠다는 김기춘

김 전 실장은 청와대 수석비서관이 언급한 ‘상부’도 누군지 알 수 없다고 말했다.

김 전 실장 아래 직원으로 일했던 모철민 전 교육문화수석비서관과 김소영 전 문화체육비서관 등은 특검 조사에서 “상부에 문건을 보고했다”고 진술했다. 김 전 실장은 “상부가 누구를 의미하는지 모르겠다”고 증언했다.

김 전 실장은 청와대가 ‘좌파 성향’ 단체에 대한 지원금 현황을 조사한 ‘민간단체보조금 TF’에 대해서도 ‘문체부·청와대 실무진들이 알아서 한 것’이란 취지로 증언했다.

그는 “청와대 수석비서관은 차관급이고 나머지 행정관·비서관들도 각 부처에 나가면 실국장 급”이라며 “상당한 책임감을 가지고 일한다. 그런 정도의 일은 할 수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특검이 “청와대에선 말단 직원인데, 비서실장 의중과 무관하게 저런 걸(TF) 전면에 내세운다는 것이냐”고 반문하자 김 전 실장은 “비서관·행정관은 상당한 재량을 가지고 자기 의견을 말한다”며 “수석비서관이 모르는 사이에 자기 나름의 재량으로 일하는 비서관들이 많다”고 말했다.

특검은 ‘대통령 비서실, 비서실장이 알지 못하는데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게 가능하냐’ ‘이런 일 벌어진다는 국정원 보고서가 올라오지 않았느냐’고 거듭 확인 질문을 던졌다.

김 전 실장은 이에 “비서실장은 알지 못했고 수석도 알지 못했다” “나나 수석들이 아는 것은 안다,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답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 “보고받은 기억이 없다”고 답했다.

“조국 해방 후 6·25때 피흘려 지킨 자유민주주의… 우리 체제 수호해야”

김 전 실장은 자신이 비서실장 시절 ‘좌편향’에 대한 우려를 자주 언급했다는 지적에 대해 “사회가 상당히 좌경화됐다는 그런 인식은 갖고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박준우 전 정무수석이 ‘비서실장이 나라가 많이 좌평향됐다는 언급을 수석비서관회의 때 많이 했다’고 진술한 것에 대해 “종북 좌파, 그런 데가 상당히 힘을 받고 있었다”며 “이런 얘기는 노무현·김대중 정부를 거치면서 그런 인식 가지게 된 건 사실”이라고 말했다.

이와 관련 ‘김 전 실장 취임 후 청와대 분위기가 바뀌었다’는 지적에 대해 그는 “우리가 조국 해방 후 3년 간 해방공간에서 좌우익 투쟁이 격렬했고 6·25 전쟁 때 피를 흘려 자유민주주의 지켜냈다”며 “자유민주주의 체제가 우월하다. 이 전엔 압록강에서 전기를 끌어다 썼는데 지금은 훨씬 잘 산다. 우리 체제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개인적으로 생각을 많이 하곤 했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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