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철 막판이 되면 ‘믿거나 말거나’식의 주장과 조작이 반복되는 흑역사가 한국의 민주주의를 병들게 하고 있다. 이런 유사 상황이 반복되지만 법은 당선자에게는 무력하고 낙선자에게는 무심하여 ‘조작의 유혹’은 한국선거역사의 전통이 되고 있는 안타까운 모습이다.

국민의당 박주선 비상대책위원장은 뒤늦게 기자회견을 열고 “당시 제보된 카카오톡 캡처 화면과 녹음파일이 조작된 것으로 밝혀졌다”며 공개 사과했다. 문 대통령의 아들 문준용씨와 미국 파슨스 디자인스쿨 대학원을 함께 다닌 동료의 육성이라며 녹음파일 공개를 통해 특혜채용 주장을 펼쳤던 국민의당이 검찰의 수사가 좁혀지자 50여일 만에 백기를 든 것이다.

▲ 박주선 국민의당 비상대책위원장이 6월26일 국회 정론관에서 지난 대선 때 제기했던 문재인 대통령의 아들 준용 씨의 고용정보원 입사 의혹과 관련, “제보된 카카오톡 화면 및 녹음 파일이 조작된 것으로 밝혀졌다”는 내용의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 연합뉴스
▲ 박주선 국민의당 비상대책위원장이 6월26일 국회 정론관에서 지난 대선 때 제기했던 문재인 대통령의 아들 준용 씨의 고용정보원 입사 의혹과 관련, “제보된 카카오톡 화면 및 녹음 파일이 조작된 것으로 밝혀졌다”는 내용의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 연합뉴스
문제는 과연 이유미씨 단독범행인지, 윗선은 어디까지 연결된 것인지 여부다. 이 부분이 아마 검찰 수사의 쟁점이 될 것이다. 선거막판이 되면 상대후보에게 치명적 타격을 주는 흑색선전이 난무하다는 사실을 잘 아는 언론들마저 의혹제기라는 이름으로 대서특필하며 조작의 유혹에 힘을 싣는다. 무책임한 주장, 무책임한 보도, 무책임한 망각의 역사가 반복된다. 이는 곧 유권자의 혼란과 여론왜곡으로 이어지는 중대범죄가 된다.

1989년 7월 24일, 전 언론사가 1면 톱으로 “김대중 총재 대북친서전달 가능성”이란 제목으로 당시 김대중 총재를 ‘빨갱이’로 색칠했다. 연합뉴스가 청와대 출입(?) 안기부 직원의 익명 제보를 바탕으로 사실상 조작보도를 내보낸 것이다. 이를 모든 언론사가 받아서 보도했다. 그러나 이 조작 소동의 결과는 예상대로 조용하게 김대중 총재 무혐의로 끝났다.

고인이 된 김 전 총재가 정계를 은퇴한 뒤 1993년 월간조선 10월호에서 자신에 대한 정치인과 언론의 용공음해에 대해 참담한 심정을 이렇게 밝힌 바 있다.

“나는 목숨을 걸고 4천만 국민을 다 사랑했는데... 그런 국민들이 ‘김대중이는 과격하다, 용공이다, 김대중이는 안된다’고 오해할 때는 피눈물이 났습니다...선거 때만 되면 나를 빨갱이라고 몰아붙이고 선거가 끝나면 ‘잘못했다’고 비는 이런 부도덕한 행위를 나는 도저히 용서할 수 없습니다.”

그가 모든 것을 용서해도 선거철 조작으로 자신을 빨갱이로 매도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고 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제대로 된 단죄 없이 넘어가다보니 선거철 승자독식 구조 속에 조작은 반복된다. 반복된 조작의 힘이 얼마나 강한지 경상도 지역을 가면 상당수 사람들이 여전히 그를 빨갱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 1988년 10월25일 국회 본회의장에서 김대중 당시 평민당 총재가 대표연설을 하고 있다. ⓒ 연합뉴스
▲ 1988년 10월25일 국회 본회의장에서 김대중 당시 평민당 총재가 대표연설을 하고 있다. ⓒ 연합뉴스
파면 당한 전 대통령 박근혜씨의 후보시절, 이명박 정부의 국군 사이버 사령부는 심리전단 요원을 61명에서 선거를 앞두고 갑자기 132명으로 배 이상 늘렸다. 증원 인원을 댓글, 트위터 작업을 벌이는 심리전단에 집중배치한 것으로 드러났다. 댓글 조작을 통해 여론을 왜곡하고 선거에 개입한 사실이 만천하에 드러났지만 누가 어떤 처벌을 받았나.

국방부는 “정치에 관여했지만 대선 개입은 아니다”는 식의 황당한 해명을 내놓았다. 국정원 대선공작은 선거결과를 바꿔놓았다는 주장이 나왔지만 박근혜 대통령은 ‘나는 몰랐다’ ‘나는 도움을 받지 않았다’는 주장만 늘어놓았을 뿐 진상규명에 적극적으로 나서지도 않았다. 오히려 진상규명에 나선 검찰총장을 쫒아내는 폭력을 저질렀다.

선거사범들에 대한 관용, 당선자의 빗나간 ‘포용심’, 낙선자에 대한 위로차원의 모든 소송취하 등은 한국 선거의 또 다른 전통이다. 새로운 정치를 열겠다는 전도유망한 젊은 정치지망생이 조작의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은 바로 이런 전통과 문화도 한 몫 했다. 물론 그 개인의 삐뚤어진 가치관, 조작의 부도덕성을 옹호할 이유는 없다. 그런 조작에 사실관계 확인은 뒷전이고 ‘터뜨리고 보자’는 식의 국민의당은 이미 스스로 존재이유를 상실했다. 이제 유권자들의 심판만 남았다.

법이 정치를 옥죄어서는 안된다. 반면에 정치가 법을 무력화, 희화화 하면 사회 질서가 무너진다. 조작과 거짓, 여기에 쉽게 지면과 방송시간을 할애하는 무책임한 언론에 대해서도 비판이 가해져야 한다. 특히 이미 선거막판이 되면 믿거나말거나 식의 조작이 횡행한다는 것을 잘 아는 언론인들조차 여기에 놀아난다는 것은 어리석거나 교활하거나 둘중 하나다.

국회의원의 주장이라고 무조건 기사화하는 기자는 기자가 아니라 중개인일 뿐이다. 그것을 기사로 더 키우는 언론사는 언론사가 아니라 정치집단이다. 의혹제기는 누구나 할 수 있지만 그것을 검증하고 타당성을 따져 보도할 것인지 말 것인지, 어느 정도 비중으로 할 것인지가 바로 저널리즘의 핵심이다.

조작에만 흥분하지 말고 조작의 메커니즘을 알면서도 쉽게 이용당하는 언론사의 무책임함을 되돌아보라. 기초적인 사실관계, 제보자의 신뢰성 확인은 저널리즘의 기초다. 검찰의 조작수사와 함께 법원이 어떤 식으로 허망한 판결을 내리는가도 주요감시 대목이다. 이제 조작의 역사를 엄정하게 단죄해야 법이 살고 정당이 살고 유권자가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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