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5일 프랑스 마크롱 후보 소속 정당인 ‘앙마르슈’ 관계자 이메일과 회계 문서 등이 대량으로 유출됐다. 9기가바이트(GB)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이었다. 프랑스 대선 결선투표를 만 하루 남겨둔 시점. 당시 마크롱 후보는 대선 후보 지지율에서 1위를 달리고 있었다. 방대한 양의 자료가 유출된 만큼 ‘민감한 자료’가 포함됐을 가능성이 높았다. 경쟁자와 상대 후보 진영에서 봤을 땐 호재임이 분명했다. 프랑스 대선판 자체가 흔들릴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대량의 문서유출 파문은 프랑스 대선에서 주요 변수가 되지 못했다. 프랑스 언론이 보도에 소극적이었기 때문이다. 프랑스 언론은 해킹 파문을 다루면서도 유출된 문서가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지 구체적인 건 보도하지 않았다. 극우파 정치인 르펜 지지자들이 SNS 등을 통해 유출된 문건을 공유하며 여론화를 시도했지만 대세를 흔들지는 못했다. 마크롱은 선거 막판 악재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대통령에 당선됐다.

비슷한 시기 한국에선 국민의당이 문재인 대통령 아들 준용씨 특혜 입사 의혹을 제기했다. 문준용씨와 함께 미국 파슨스스쿨 대학원을 다녔던 동료의 증언을 확보했다며 녹음 파일과 카카오톡 캡처 화면을 증거로 제시했다. 대선을 불과 나흘 정도 앞둔 시점이었다. 당시 제보자 신빙성 등에 의문이 제기됐지만 국민의당은 대대적인 공세를 이어갔다. 대선판 자체를 흔들지는 못했지만 선거 직전까지 관련 내용은 언론을 통해 보도가 됐고 이슈로 부각됐다. 지난 27일 녹음파일과 캡처화면이 조작된 것으로 밝혀지면서 국민의당은 대국민사과문을 발표했다.

▲ 4월25일 오후 충북 음성군 한국고용정보원 앞에서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대선후보 후보 아들 준용 씨의 특혜채용 의혹과 관련, 국민의당 의원들이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 연합뉴스
▲ 4월25일 오후 충북 음성군 한국고용정보원 앞에서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대선후보 후보 아들 준용 씨의 특혜채용 의혹과 관련, 국민의당 의원들이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 연합뉴스
프랑스와 한국에서 발생한 두 사건은 전혀 다른 사안이지만 묘하게 닮은 구석이 있다. 대선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시점에서 발생했다는 점, 제대로 검증하기엔 시간이 부족했다는 점에서 그렇다. 상대 진영에서 정치쟁점화를 통해 대선판을 흔들려 했다는 점도 비슷하다. 하지만 명백히 다른 부분도 있다. 특히 언론의 보도태도는 확연한 차이를 보였다. 프랑스 언론은 문건 유출보도에 신중을 기한 반면 한국 언론은 제대로 된 검증 없이 ‘국민의당발’ 기사로 관련 내용을 보도했다.

물론 이 같은 차이가 프랑스와 한국 언론의 태도나 수준 차이에서 비롯되는 건 아니다. 두 나라의 선거법 자체가 다른 측면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프랑스 선거법은 한국과 달리 투표일 전날부터 모든 선거운동과 선거 판세를 흔들 수 있는 언론 보도를 금지하고 있다. 불확실한 정보가 언론을 통해 투표 결과에 영향을 미치는 것을 방지하는 차원이다. 실제 문건유출 사건이 발생했을 때 프랑스 선거관리위원회는 5월6일 공식입장을 통해 “해킹한 자료에 거짓 정보가 섞여 있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언론이 자료를 공개할 경우 처벌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해킹 문건유출’에 대한 프랑스 언론의 신중한 태도는 이런 측면을 고려한 것이기도 하지만 단순히 그것만으로 설명되지 않는 무엇이 있다. 바로 검증보도의 책임성과 윤리의식이다. 프랑스 유력지 르몽드는 △해킹 자료의 분량이 방대해 제한된 시간 내에 내용을 확인하기가 어렵고 △특정한 목적을 가지고 유출된 자료에 대해 당사자인 마크롱 측이 제대로 해명하기가 어렵다는 점 등을 들어 자체적인 확인 작업과 검증을 한 후 보도하겠다고 밝혔다. 법적인 측면 외에 언론으로서 최소한의 윤리를 지키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었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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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igcaption>▲ <yonhap photo-2934= 국민의당 문준용 관련 조작된 제보국민의당 박주선 비상대책위원장이 6월26일 국회 정론관에서 지난 대선 때 제기했던 문재인 대통령의 아들 준용 씨의 고용정보원 입사 의혹과 관련, “제보된 카카오톡 화면 및 녹음 파일이 조작된 것으로 밝혀졌다”는 내용의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 연합뉴스
한국 언론은 어떤가. 프랑스 언론과 많은 점에서 다르다. ‘문준용 녹취조작’ 파문이 단적인 예다. 당시 많은 언론이 의혹제기라는 이름으로 검증되지 않은 일방적인 주장을 인용 보도했다. ‘국민의당 측이 의혹을 제기했고 더불어민주당이 이를 반박했다’ 따위의 기사가 넘쳐났다. 자체적인 확인 작업과 검증과정을 통해 보도하겠다는 입장을 밝힌 언론사는 없었다. 그런 시도조차 하지 않은 언론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랬던’ 언론이 이젠 ‘문준용 녹취조작 국민의당 곤혹’ ‘녹취조작, 취업특혜 의혹과 특검해야’ 따위의 기사들을 남발하고 있다. 과거나 지금이나 최소한의 자기반성 하는 모습을 찾기가 어렵다. 뉴스수용자들 수준은 점점 높아지고 있는데 언제까지 ‘따옴표 저널리즘’에 갇혀 있을 것인가. 한국 언론의 미래가 어둡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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