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3일 오후 서울중앙지법 소법정 510호 방청석에서는 간간이 웃음이 터져나왓다. 김신 삼성물산 사장이 특검 측 주장을 거세게 반박할 때마다 나온 우호적인 웃음이었다. 김 사장은 ‘삼성물산 가치를 제대로 산정하기 위해 노력했냐’는 특검의 끊임없는 질문에 급기야 “질문이 뭔지 잘 못 알아 듣겠다”고도 말했다.

김 사장의 말에 웃을 수 없었던 이유는 3시간에 달했던 그의 증언이 ‘대표이사’의 입에서 나올 말인지 의심이 들었기 때문이다. 재판 종료 후 ‘삼성 vs 특검’ 프레임으로 기사가 다수 나갔지만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김신 사장의 증언과 특검 측 주장을 동등하게 다루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봤기 때문이다.

▲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5월25일 오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린 뇌물공여 혐의 관련 18회 공판에 출석하며 가벼운 미소를 짓고 있다.ⓒ민중의소리
▲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5월25일 오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린 뇌물공여 혐의 관련 18회 공판에 출석하며 가벼운 미소를 짓고 있다.ⓒ민중의소리

삼성물산이 제일모직에 ‘주식 교부’ 방식으로 합병된다. 구 삼성물산 주주들은 합병대가로 신 삼성물산 주식을 지급받게 된다. 이때 대표이사에게 중요한 것은 뭘까? 가장 공정하면서도 최대한으로 삼성물산의 가치를 산정해 신 삼성물산 지분율을 최대한 많이 확보하는 것이다. 그래야 회사와 주주의 이익을 보호할 수 있다. 이를 보호하지 않으면 ‘배임’이다.

지분율은 합병비율에서 정해진다. 합병비율은 자본시장법에 따라 합병 이사회 결의일 이전의 1개월, 1주일, 1일 전의 주가 평균을 기준 시가로 정해 계산한다. 법으로 정해져도 대표이사는 가만히 있을 수 없다. 주가는 단기적으로 기업가치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할 수 있어 반드시 기업가치를 분석한다. 합병하는 회사든, 합병되는 회사든, 자신과 상대방에 대한 기업가치 분석을 꼼꼼히 해 ‘적정 합병비율’을 산정한다. 거듭된 논의를 통해 기업가치 산정에 합의하면서 합병 여부, 시기, 방법 등이 결정된다. 대표이사는 배임하지 않게 위해 기업가치를 심사숙고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김신 사장은 지난 23일 법정에서 자신의 직무유기를 확인했다. 그의 증언 어디에도 ‘회사와 주주의 이익을 보호해야 할’ 대표이사로서 노력한 사실을 찾을 수 없었다.

그는 2015년 5월26일 제일모직 1주 당 삼성물산 0.35주로 책정된 ‘1:0.35’ 합병비율에 대해 “자본시장법에 따라 정해지는 것”이라고만 말했다. 삼성물산에 불리하게 책정됐다고 알려진 비율이다. 상식적인 대표이사라면 이보다 더 할 말이 많을 수밖에 없다. 합병 과정에서 최소한의 손해와 최대한의 이익을 찾기 위해 자신과 상대기업 가치를 수차례 검토하고 협의도 진행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김 사장은 ‘삼성물산 주주의 지분율을 높이기 위해 얼마만큼 노력했는지’를 밝혀야 했다.

김 사장은 “양사가 TF를 구성했고 회계법인, 법무법인을 각각 고용해 점검하고 서류상 제출할 게 뭔지 검토했다. ‘과연 이 밸류에이션이 맞냐’ 부분도 내부적으로 회계법인을 통해 다 검증 받았다”고 말했다. 더 구체적인 증언은 나오지 않았다. 추상적이면서도 원론적인 답이다.

이사회가 합병을 결의한 과정은 더 허술하다. 삼성물산이 한국기업지배구조원에 회신한 바에 따르면 5월26일 이사회엔 기업가치를 검토한 자료가 제출되지 않았다. 사외이사 4명은 이사회 개최 불과 하루 전인 25일, 사내이사 3명은 심지어 개최 다음 날인 27일 관련 검토 자료를 전달받았다. 김 사장은 “법무법인이 이사회에 ‘법률적으로 전혀 문제없는 자본시장법 의한 거래’라고 보고했다”며 비율 조정 논의를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삼성물산 주가 저평가 논란이 거셌던 상황인 만큼 대표이사는 ‘자본시장법’에 따라 기준시가에 10% 할인(감소)이나 할증(추가) 조정을 할 수 있었다. 즉 삼성물산 주가를 10% 할증, 제일모직 주가를 10% 할인하는 방법이 있었다는 뜻이다. 김 사장은 이 법을 “당시에 몰랐다”고 일관했다. 그는 특검이 ‘합병 비율 적정성 논의가 있었냐’고 묻자 “이미 실무진이 회계·법무법인을 통해 검토한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기억이 잘 안난다”는 취지로 답했다.

삼성물산은 이 과정에서 ‘상대 회사 2대 주주’에게 자사주 전량을 매각하기도 했다. 삼성물산은 추가 자금 확보와 합병에 찬성할 우호 지분을 얻기 위해 제일모직 지분 10.18%를 확보한 2대 주주 KCC에 자사주 전량(5.76%)을 팔았다. 특검이 “이해관계가 상충될 수 있는 제일모직 2대 주주에게 자사주를 매각하는건 주주 이익을 대변하는 대표이사의 임무를 위배하는거 아니냐”고 묻자 그는 “잘 모르겠다”고 답했다.

▲ 홍완선 전 국민연금공단 기금운용본부장이 6월21일 오전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재판에 증인으로 출석하기 위해 법정으로 향하고 있다. ⓒ 연합뉴스
▲ 홍완선 전 국민연금공단 기금운용본부장이 6월21일 오전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재판에 증인으로 출석하기 위해 법정으로 향하고 있다. ⓒ 연합뉴스

근본적인 문제는 대표이사가 자기 회사의 기업가치가 ‘필요 이상’ 저평가되고 제일모직 가치가 고평가되는 상황을 두고만 본 것이다. 2015년 3월 말 연결재무상태 기준으로 삼성물산 자산은 15조 원, 제일모직 자산은 4.7조 원이었다. 2014년 기준 영업이익도 삼성물산은 6524억 원, 제일모직은 2134억 원이었다. 3배 차이다. 2015년 1분기에도 영업이익은 8배 차이가 났다.

삼성물산의 이사회는 주가가 하락세로 치닫던 5월26일 합병을 결의했다. ‘자본시장법’에 따라 최저 합병비율이 나오기 최적의 상황이다. 상식적인 대표이사라면 더 나은 주가가 책정될 때까지 논의를 이어가는게 맞지 않을까. 5월26일은 공교롭게도 이사회가 합병 논의를 시작했다고 밝힌 지 한 달 여가 된 때였다. 김 사장은 ‘한 달 만에 이사회 결의가 가능하냐’는 재판부 질문에 “관계사 간 합병이라 장부·시스템에 대해 확신했고 가격 협상 등 이슈도 전혀 없었다”면서 “(기간이) 길어질수록 여러 문제가 생겨 전광석화처럼 끝낸 것”이라 말했다.

적정 합병비율에 대해 ISS는 ‘1:0.95(제일모직 1주 당 삼성물산 0.95주)’, 국민연금 리서치팀은 ‘1:0.46’을 제시했다. 삼성물산 합병 이슈를 추적해온 홍순탁 ‘내가만드는복지국가’ 회계사가 “제일모직에 유리한 입장에 서서” 제일모직이 보유한 ‘취득가 기준 4800억 원’ 삼성바이오로직스 지분을 성장성을 감안해 ‘4.1조 원’으로 잡고, 영업가치를 계산할 때 활용하는 배수(multiple)로 삼성물산에는 10, 제일모직에는 30을 곱한 결과 주당 가치는 ‘1:1’ 수준까지 나왔다. 제일모직 기업가치를 최대치로 올려도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간 기업가치가 비슷했다는 뜻이다.

정상적인 삼성물산 대표이사라면 ‘0.35’보다 높은 가치 산정에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다. 김신 사장은 관심을 두지 않았다. 김 사장은 딜로이트 안진회계법인이 ‘1:0.38’, 삼정KPMG 법인이 ‘1:0.40’을 제시한 점을 들며 합병비율이 적정 비율과 큰 차이 없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삼성 측 변호인단이 1회 공판 때부터 유지한 주장이다.

이와 관련해 삼성 측 변호인단은 ‘세부 쟁점’을 파고 있다. 변호인단은 기관 간 적정 비율 차이가 나는 것을 두고 ‘기업가치 산정 방식이 DCF(이익접근법)냐 EV/EBITDA(상대가치법)냐’, ‘비지배지분을 공제했느냐’ 등을 따지고 들었다. 기자들 사이에서 “회계학교실인지 법정인지 헷갈린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지난 21일 재판을 지켜 본 홍 회계사는 “변호인이 지엽적인 부분만 파고 든다”고 일축했다. 홍 회계사는 “중요한 것은 두 회사에 동일한 평가방법을 적용하여 범위를 구하는 것”이라며 “동등한 방법으로 평가하면 합병비율이 1대1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1대0.35라는 비율을 제시하면 찬성할 수가 없는 것”이라 지적했다.

김신 사장은 ‘무엇이 삼성물산에 최선인지’ 관심을 두지 않았다. 회사와 주주의 이익을 보호할 의무를 지닌 대표이사로서 의무를 져버린 것이다. 실제로 참여연대는 지난해 6월15일 업무상배임, 주가조작 혐의로 삼성그룹 총수 일가를 비롯해 삼성물산 공동대표이사 3인을 고발했다.

김신 사장은 “합병은 경영상 판단에 따른 것”이라고 일관되게 주장했다. 김신 사장의 증언은 향후 법정에서 수차례 반복될 것으로 보인다. 삼성 측 임원 관계자, 피고인 등의 신문이 다수 남아있다. 삼성 측 변호인도 매 재판마다 같은 변론을 취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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