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인으로도 잘 알려진 정운현(중앙일보, 대한매일, 오마이뉴스, 팩트TV)은 근 30년간 친일 연구를 해 온 역사학자다. 계보로 보자면 국내 친일파 연구의 선구자인 고 임종국 선생의 뒤를 잇는 ‘2세대’ 연구가이지만, ‘1.5세대’라고 하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일 수 있다. 고 임종국 선생이 계획했던 ‘친일파 총서’가 나오지 못한 채 연구의 맥이 끊기게 됐고, 정운현은 임종국 선생의 성과를 기반으로 연구를 진행하며 자료 보급에도 힘을 기울였다. 1948-9년, 반민특위 활동의 성과로 나왔지만 목록만 전해오던 ‘민족 정기의 심판’, ‘친일파 군상’. ‘반민자 대공판기’. ‘반민자 죄상기’를 발굴해 <친일파 죄상기>(공편,94,학민사)를 냈고, 반민특위 재판기록 영인본 17권을 10년에 거쳐 풀어 <풀어서 쓴 반민특위 재판기록>을 냈다(전4권,편역,2009,선인). 이들을 포함해 정운현이 펴 낸 친일파/독립운동 관련 책들만 1990년에 시작한 친일파 시리즈로 시작해 총 24권에 달한다.
정운현은 지난해 <친일파의 한국 현대사>(개정판)를 마지막으로 친일 연구 단행본 작업을 끝내며 “집 짓는데 주춧돌 하나 보탠 정도에 불과하다. 이제 그나마도 막을 내릴 때가 된 듯 하다”는 소회를 밝히기도 했다.
2015년말 아베 신조 내각과 박근혜 정부 사이에 이뤄진 ‘위안부 합의’는, 일본 군국주의 세력과 한국 친일세력의 오랜 공생관계에 뿌리를 두고 있다. 국내 친일 연구의 1인자인 정운현을 만나 위안부 합의와 친일파 문제에 대한 의견을 들어봤다.
-친일연구에 몸담게 된 계기는?
“80년대말 주간지를 통해서 임종국을 알고서였다. 그 이전엔 친일파라 하면 을사오적 밖엔 몰랐다. 이후 춘원, 육당 등 민족지사들로 알려진 인물들이 친일파임을 알고 배반의 역사에 관심을 갖게 됐다. 이후 30년간 자료수집과 공부를 했다. 그간 10여 권의 친일파 관련 책을 펴냈는데 대략 할만큼 했다고 본다. 더 이상 친일파 관련 단행본 출간은 안 한다.”
-임종국 평전을 내신 바 있다. 임종국 선생을 간략히 소개해주신다면?
“고려대 정치학과를 나왔고 처음엔 고시 준비생이었다. 한국전쟁 당시 경찰로 근무했는데, 길거리 시체들을 보고 정치인들의 무능을 탄식했다. 집안형편과 건강문제로 고시를 포기했다. 임종국 선생은 문학적 소양이 있었다. 대학시절에 이상전집 3권을 펴냈다. 졸업 후엔 출판사에 입사했다. 한국시인전집을 펴내면서 일제 당시 문인들의 행적을 조사하게 됐다. 1965년 한일협정을 계기로 이듬해 친일문학론을 출간했는데, 문단과 지성계에 큰 충격을 던졌다. 초판 1500부를 소화하는데 13년이 걸렸다.(10.26 후에 재판 찍음). 1.000부는 일본에서 팔렸다. 이후 고단한 친일연구의 길로 들어섰다. 가난과 질병으로 고생하다가 만60세, 1989년에 별세하셨다. 금년이 28주기다.”
-박정희 관련 책을 많이 내셨다. 박정희 연구에 몰두하신 이유는?
“중앙일보 부설 현대사연구소 기자로 근무하던 시절 정치부 기자들과 특별팀을 구성해 ‘박정희 시대’라는 장기연재에 참여한 적이 있다. 이 때 나는 박정희의 출생부터 5.16쿠데타까지, 즉 박정희의 전반부 삶 전체를 맡았다. 그런데 그에겐 이 시기가 중요했다. 친일, 좌익, 쿠데타 등이 모두 포함됐다. 이를 계기로 그의 삶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됐고 당시 취재기록을 묶어 <실록 군인 박정희>를 출간했다. 금년이 박정희 탄생 100주년, 위인전 말고 좀 더 종합적인 인물탐구서가 나와야 한다.”
-박정희가 우리 현대사에 미친 영향에 대해서 말한다면?
“관점, 측면에 따라 그 시선은 다양할 것이다. 공도 있고 과도 있다. 경제건설, 자주국방 등이 공이라면 장기집권, 독재, 군사통치 등은 과다. 18년간 장기집권한 탓에 공이 커 보이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과가 훨씬 더 많다. 기성세대들은 ‘가난극복’ 하나만을 강조하는데 박정희 시대 재벌 위주의 경제정책이 오늘날 부의 편중과 극심한 빈부격차의 단초를 제공했다. 재임중 북한 김일성과 적대적 공존을 정치적으로 이용해 분단을 고착화했고, 일제시대의 경험을 통치의 기조로 삼아 제2의 일제시대를 구가했다는 비판도 있다. 이승만 독재를 무너뜨린 4.19혁명을 군홧발로 짓밟고 독재정치를 연속한 독재자다.”
-한일청구권 협정이 굴욕협정이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집권 후 가난극복이라는 시대적 과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강박관념 때문에 졸속적인 한일협정을 체결했다. 한일 국교정상화 회담은 1952년부터 시작돼 1965년까지 14년동안 일곱 차례나 열렸다. 도중에 일본 측의 망언 등으로 곡절이 여러 차례 있었다.
박 정권 출범 초기 미국의 원조가 대폭 삭감되자 민생고 해결과 경제건설을 위해 조상들의 핏값인 대일청구권 자금에 눈독을 들이고 국교정상화를 추진했다. 자신의 오른팔인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을 특사로 파견해 오히라 외상과 무상3억, 유상2억 달러로 마무리 지었다. 장면 정부 시절 제시한 23억 달러와 비교하면 턱없이 적은 금액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