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오늘과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는 23일 오후 서울 프란치스코교육회관에서 6월항쟁 30년을 맞아 언론자유 투쟁을 주제로 심포지엄을 개최했다. 이채훈 PD연합회 정책국장은 민주화운동과 언론자유 투쟁 30년의 역사를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1987년 6월 항쟁을 통해 시민들은 대통령직선제를 쟁취했고, 쿠데타가 불가능한 시대를 열었다. 다음해인 1988년은 언론지형이 크게 달라졌다. 5월15일 한겨레가 출범했고, 새로운 신문사도 많이 생겼다. 군부의 언론사 통제가 풀린 것이다. 88올림픽을 앞두고 MBC노조는 방송사 최초의 파업으로 낙하산 인사를 쫓아냈다. 방송문화진흥회를 탄생시켜 공영방송의 기틀도 마련했다.

하지만 곧 반격이 들어왔다. 1989년 경향신문을 LG에 넘기려는 경영진에 노조가 파업으로 맞서자 최병렬 공보처장관은 5명의 기자를 해고한 뒤 한화에 지분을 넘기도록 했다. 80년 해직사태 이후 최초 해고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노태우 정부는 1990년 KBS를 직접 장악하기 위해 5공 청와대 출신 서기원을 새 사장에 임명하면서 노조와 정면으로 충돌했다.

정권만이 아니었다. 1991년 6월, 김중배 동아일보 편집국장은 “이제는 자본과의 싸움”이라고 선언한 뒤 손석춘 기자와 함께 신문사를 떠났다. 그는 사주와 충돌을 빚었고, ‘체제 부정과 위화감 조성’을 언급하며 사주의 비난과 편집진 교체 움직임에 맞서 야인이 됐다. 사주의 선의를 믿는 운동은 한계에 봉착할 수밖에 없는 시대가 열린 것이다.

▲ 이채훈 PD연합회 정책국장이 발제하고 있다. 사진=이치열 기자 truth710@
▲ 이채훈 PD연합회 정책국장이 발제하고 있다. 사진=이치열 기자 truth710@

방송노조도 한계에 봉착했다. 노조원인 기자가 생산직 노동자의 생존권 투쟁을 매도하는 모순적인 일이 비일비재했다. 파업했던 언론인이 사용자의 도구가 된 것이다. 1990년 우루과이 라운드를 다루려던 PD수첩이 최창봉 MBC사장 지시로 불방됐고, 이에 항의하던 노조위원장 등이 해고됐다. 1992년 MBC노조의 50일 파업 등으로 이어졌다.

이 국장은 “6월항쟁 이후 ‘죽 쒀서 개 준’ 것은 노태우 집권뿐이 아니었다”며 “학생과 시민들의 피땀어린 희생으로 시민민주주의의 틀을 확보했지만 그 내용을 채운 건 자본의 탐욕과 질주였다”고 정리했다.

문민정부-국민의정부-참여정부를 거치며 언론자유는 점차 확대됐고, 조선일보는 그 수혜를 입어 권력이 확대됐다. 강준만 전북대 교수는 “조선일보는 극우이념과 상업주의를 절묘하게 결합한 신문으로 특정 정치인에 대해 왜곡과 날조를 서슴지 않으며 이미지를 조작한다”고 지적했다. 조선일보-검찰-한나라당(새누리당)의 카르텔이 공고해졌다. ‘조중동’ 헤게모니가 공고해지면서 반작용으로 ‘안티조선운동’이 등장했다.

노무현 정부 때는 삼성의 언론장악이 수면위로 드러났다. 2005년 ‘삼성 X파일’ 사건은 삼성과 정치권의 공작이 담겨있다는 점에서 중요했다. 삼성의 언론통제는 2006~2007년을 달군 시사저널 사태로 이어졌다. 금창태 사장이 이학수 비판 기사를 삭제하면서 기자들은 천막을 치고 파업에 돌입했다. 투쟁 결과 기자들은 회사를 떠나 시사IN을 창간했다.

이명박·박근혜 정부에서 종합편성채널의 출범, 공영방송의 추락 등으로 언론환경이 얼마나 열악해졌는지는 설명이 필요없을 정도다. 이 국장은 “이번 정권교체는 마지막 기회일 수 있다”며 개혁이 좌초해선 안 된다고 주장했다. 이 국장은 “적폐세력이 다시는 민중을 기만할 수 없도록 새로운 언론지형을 확립하는” 게 가장 중요한 과제라고 강조했다.


그는 언론개혁 조건으로 기자와 PD들의 의식혁명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최순실 국정농단 정국을 돌아볼 때 “강고한 기득권 카르텔을 깬 곳도 언론이고 촛불의 구심점이 된 것도 언론”인 한편 “KBS와 MBC가 제대로 했다면 국정농단 사태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결국 30년 언론인들이 싸운 것처럼 앞으로도 언론인들이 치열하게 고민해달라고 그는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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