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기록된 글을 읽는다는 것은 누군가의 가슴에 묻어둔 속말을 듣는 일과 같다. 누군가의 말을 들으면서 더 크게 열리는 세상을 보는 눈. 열린 만큼 더 뚜렷해지는 우리의 삶. 말한다는 것은 어쩌면 인간이 가진 소통의 최후수단은 아닐까.

말하지 않아도 타인이 우리네 속사정을 알아주면 좋겠지만 대부분 그렇지 않아 끝에 가서야 말문을 열곤 한다. 말할 수 없어서 말을 하지 못하기도 하고, 말을 해도 들어주지 않아서 말은 힘을 잃어버리고 나락으로 떨어진다. 어쩌면 기록이란 말의 힘에 대한 믿음에서 출발하는 선언문이자 소통의 힘과 연결의 가능성을 염원하는 소원지인지 모른다. ‘들꽃, 공단에 피다’(한티재, 2017)도 그렇다. 책을 읽으며 비정규직 노동자의 삶은 숨어있는 꽃이 아니라 무심히 지나친 꽃이었음을 깨닫는다.

이 책은 구미공단에서 최초로 비정규직 노조를 만들고 해고된 아사히글라스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이야기다. 단지 아사히글라스노동자들만이 아니라 2017년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삶의 이야기다. 20분 만에 점심을 먹고 다시 작업을 해야 하는 비인간적 노동착취만이 아니라, 저임금으로 생활도 빠듯했던 빈곤의 다른 이름인 비정규직이 무엇인지를 낱낱이 보여준다. 21명의 노동자가 써내려간 글 속에서 우리는 비정규직 노동자라는 사실이 그들의 생애와 가족과 친구들 속에 어떤 그림자를 드리웠는지 마주하게 된다. 비정규직 노동자 조직률이 2%도 안 되는 현실에서 그들이 왜 노동조합을 만들었고, 노동조합은 그들에게 어떤 의미인지도 짐작한다. 그들이 싸우는 이유와 삶의 이유가 다르지 않다.

▲ 들꽃, 공단에 피다/ 아사히 비정규직지회 지음/ 한티재 펴냄
▲ 들꽃, 공단에 피다/ 아사히 비정규직지회 지음/ 한티재 펴냄

어딜 가나 똑같은 비정규직

학교에서 현장실습을 하던 곳이지만 제대 후 동일한 회사에서 비정규직으로 일해야 했던 최진석은 “인생 뭐 있나? 다 비정규직인데 열심히 일만 하고 돈만 벌자고 마음먹었다.” 아사히글라스 공장에 첫 출근하던 날 식당까지 10분을 걸어야했다. 초단위로 체크되는 노동강도에 맞추기 위해 정신없이 일해야 할 뿐 아니라 생산시간은 점점 줄어들었다. 15초 안에 글라스 한 장을 생산라인에 투입해야 하고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면 관리자들에게 야단맞아야 했다. 상여금이 올랐지만 기본급을 삭감해서 똑같은 금액을 받아야 했던 일까지 기분 나쁠 때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런 취급을 받는 이유는 비정규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지금까지 “비정규직이고 싶어서 비정규직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실제 아사히에는 삼성코닝 하청업체에서 일하다가 온 사람, 삼성휴대폰 하청업체와 엘지용역업체를 떠돌던 사람까지, 이전에도 그들은 비정규직이었다. 임금도 적고 비정규직의 노동권을 보장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에서 기업주들은 비정규직을 선호하니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비정규직이 될 수밖에 없다. 글을 읽으며 눈앞이 흐려진 적이 여러 번 있었다. 문자해고를 당한 기륭전자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떠오르고, 저임금과 산재에 분노해 노조를 만들면서 자신들이 비정규직인지 알게 됐다던 동양시멘트 비정규노동자들이 겹쳤기 때문이다. 무시당하는 인생은 아사히만의 문제가 아니다. 기업이 불법파견, 불법도급, 합법과 불법을 넘나들면서 비정규직을 대량 고용할 수 있도록 정부가 뒷받침 한 덕에 기업에는 언제나 부가 넘쳐흘렀다. 다만 그 부는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노동자에게 흘러가지 않았다.

구미공단에 20005년 ‘아사히글라스화인테크노코리아’라는 자회사로 들어온 일본기업은 ‘50년간 토지무상임대, 5년간 국세 전액감면, 15년간 지방세 감면’이라는 특혜로, 연평균 매출 1조, 연평균 당기순이익은 800억, 사내유보금 7,200억의 이익을 취했다. 그에 반해 노동자들은 최저임금만 받으며 365일 3교대, 주야 맞교대로 장시간 일해야 했다. 기업이 어려워서 노동자들을 비정규직으로 고용하거나 해고하는 게 아니었다.

노동조합으로 새로운 세상을 기대하다

노동자들은 16명에 대한 권고사직 강요를 겪으면서 2015년 아사히비정규직노조를 만들었다. 노조를 만들고 나서야 처음으로 회사의 일방적인 조회를 거부할 수 있었고 관리자들도 쓸데없는 잔소리를 하지 않았다. 그러나 해방감은 잠시, 노조결성 한 달 만에 170명은 문자해고를 당한다.

해고돼서 월급도 받지 못하는데 투쟁하느라 다른 일도 하지 못하니 생계가 어렵다. 가족들의 삶이 곤궁해지는 건 당연지사. 생활이 어려우니 서로 짜증이 날 일도 많아진다. 그래서 가족들에게 미안해서 어쩔 줄 모르지만 때로는 가족들의 지지로 싸울 힘을 이어가기도 한다.

▲ 아사히 사내하청노동조합 차헌호 위원장이 2015년 6월27일 오후 서울역 광장에서 민주노총이 연 '최저임금 1만원 쟁취 노동시장 구조개악 저지 전국노동자대회'에서 구호를 외치고 있다. 사진=민중의소리
▲ 아사히 사내하청노동조합 차헌호 위원장이 2015년 6월27일 오후 서울역 광장에서 민주노총이 연 '최저임금 1만원 쟁취 노동시장 구조개악 저지 전국노동자대회'에서 구호를 외치고 있다. 사진=민중의소리

“다치지 마래이” 툭 던지던 박성철의 딸이 아빠의 호주머니가 걱정돼 “세뱃돈 받은 거 있는데” 용돈 주겠다는 대목에서 갑을오토텍 노동자들과 그의 가족들이 떠올라 가슴이 더 갑갑해졌다. 아, 한명의 노동자가 탄압받는 건 그들의 가족의 삶이 함께 가시밭길을 걷는 거구나. 노조파괴로 고통 받는 유성기업 노동자들과 그의 가족들이 떠올라 숨을 쉬기 어려웠다. 자결해야 했던 한광호 열사, 42%가 심각한 우울증으로 겪어야 했던 유성기업노동자들. 이렇듯 기업이 하는 부당노동행위, 노조 파괴는 사실 사람 여럿을 절망으로 집어넣는 일이다. 그래서 때론 왜 싸움을 했는지, 왜 노조활동을 했는지 흔들리기도 한다.

아사히노동자들 대부분이 노조활동은 처음이다. 길거리에서 데모를 하고 무엇 때문에 싸우는지 모르지만 노동조합은 나쁜 것으로 알았던 김정태도 노조활동은 처음이다. 이전 회사에서 노조에 가입한 적은 있지만 노조활동을 하지는 않았다. 차헌호 지회장이 “새로운 세상을 알게 해주겠다”며 그를 데려간 곳은 KEC 농성장이다. 처음 본 KEC노조원들이 그의 눈에는 약간 무섭고 투박하고 슬퍼보였지만 ‘단결’의 모습으로 기억된다. 그는 노조활동을 하면서 때론 후회도 하고 모든 걸 내려놓고 싶을 때도 많지만 기대를 내려놓지는 않는다.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새로운 세상은 ‘허름한 농성장이 꿈이고 희망’이라는 이민우에게서 얼핏 보인다.

그들이 말한 새로운 세상은 무엇일까. 아직 공장에 들어가지 못했지만 아무런 이해관계가 없는 사람들이 자기 일처럼 연대하는 모습에서, 다른 투쟁사업장에 연대하며 비슷한 처지라는 사실에 놀라기도 하고 공감하면서, ‘새로운 세상’을 그려나가는 게 아닐까. 또한 다른 투쟁사업장에 가서 이발을 해주는 조남달, 몸짓패로 연대하면서 호응하고 환호하는 동지들과 교감하는 순간의 희열을 느끼는 장명주, 밥하는 것이 투쟁이라는 조리담당 짬장에게서 우리는 ‘새로워진 세상의 주체’를 만나게 된다.

아사히노동자들이 내게 보낸 “저희가 선택한 투쟁이 옳았음을 증명하고 싶습니다”란 메시지의 의미를 책을 읽고서야 어렴풋 알게 됐다. 그들이 피운 꽃이 얼마나 아픈지, 얼마나 아름다운지, 얼마나 슬픈지를 그래서 더 궁금해졌다. 후원주점 때문에 ‘레즈비언상담소’에 전화를 걸면서 그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레즈비언을 비롯한 성소수자의 인권에 얼마나 관심을 갖게 됐을까? 성소수자를 차별하고 착취하는 세상이 비정규직을 차별하고 착취하는 사회구조와 다르지 않을 텐데, 그것은 그들에게 어떤 모양으로 그려졌는지 말이다.

평등한 세상, 모두가 인간답게 사는 세상에 대한 그림이 얼마나 채워졌는지 궁금한 분들께 권한다. 비정규직에 연대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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