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일 연합뉴스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사드(THAAD·고고도 미사일방어체계)의 한국 배치 문제를 둘러싼 논란에 ‘격노’했다고 보도했다. 연합뉴스뿐 아니라 19일과 20일 이틀 동안 수많은 언론이 ‘트럼프 격노’ 기사를 썼다.

트럼프 대통령은 정말 ‘격노’ 했을까? 격노했다면 무엇 때문에 격노한 것일까? 그리고 트럼프의 격노가 문정인 특보의 발언 때문이라면, 그 발언은 잘못된 것일까? ‘트럼프 격노 기사를 두고 짚어봐야 할 네 가지 포인트를 정리했다.

1. 트럼프 대통령은 무엇 때문에 ‘격노’했나

연합뉴스는 “트럼프, 사드 한국배치 둘러싼 논란에 격노했다”에서 ‘한 고위관계자’를 인용하며 “이 관계자는 연합뉴스 기자와 만나 트럼프 대통령이 지난 8일 백악관 집무실인 오벌오피스에 렉스 틸러슨 국무장관과 제임스 매티스 국방장관을 불러 한반도 안보현황 등을 논의하는 자리에서 사드 지연 논란에 크게 화를 낸 것으로 알고 있다고 전했다”고 보도했다.

▲ 19일 연합뉴스 기사.
▲ 19일 연합뉴스 기사.
연합뉴스 보도 이후 ‘트럼프 격노’ 기사가 계속해서 쏟아졌지만 연합뉴스가 밝힌 ‘트럼프 격노’ 시점은 지난 8일이다. 적어도 연합뉴스가 보도한 ‘트럼프 격노’ 시점은 문정인 특보 발언과는 동떨어진 셈이다.

하지만 19일과 20일 국내언론은 마치 ‘트럼프의 격노’가 문정인 특보 발언과 연관이 있는 것처럼 보도했다. 지난 16일 문정인 통일외교안보 특보가 워싱턴에서 ‘북한이 핵미사일 활동을 중단하면 한미연합군사훈련을 축소할 수 있다’고 발언한 것에 격노한 것처럼 전한 것이다. 또한 트럼프 대통령이 격노한 것을 어디서 들었는지 취재원조차 밝히지 않은 보도도 많았다.

조선일보는 “韓·美정상회담 코앞인데… 3연속 악재에 마음 급한 靑”(6월20일)에서 “그 시간 동안 미국에서는 '트럼프 대통령이 사드 배치 지연 소식을 듣고 격노했다' '방한했던 미국 인사들이 청와대에 홀대 당했다'는 소식이 이어졌다”고 보도했다. 하지만 이 같은 내용의 출처에 대해서는 정확히 밝히지 않았다. 

동아일보도 “사드→6·15→문정인 연쇄논란…트럼프 백악관 회의중 ‘버럭’”(6월20일)에서 “트럼프 대통령은 최근 렉스 틸러슨 국무장관, 제임스 매티스 국방장관과 회의 도중 한국의 사드 배치 논란에 크게 화를 냈고, 욕설까지 나왔던 것으로 전해졌다”고 썼는데, ‘격노’의 시점을 밝히지 않았다. 문제는 다음 문단에서 바로 문정인 특보의 발언을 언급했는데 마치 문 특보의 발언 때문에 트럼프 대통령이 격노한 것처럼 보이게 했다는 점이다. 동아일보 기사 역시 특정한 취재원을 밝히지 않았다.

▲ 20일 조선일보.
▲ 20일 조선일보.
2. 외신은 ‘트럼프 격노’ 기사를 썼나

연합뉴스 기사가 나간 뒤 해당 기사가 ‘가짜뉴스’이며, 트럼프 대통령이 격노한 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주장도 제기됐다. 21일 현재 구글에서 ‘Trump’, ‘Thaad’, ‘Korea’를 넣고 검색하면 트럼프 대통령이 격노했다는 외신기사가 몇 가지 검색되기는 한다. 그러나 ‘트럼프 격노’ 기사는 코리아헤럴드나 코리아타임스와 같이 한국 기자들이 영어로 낸 기사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연합뉴스 기사를 받아쓴 기사다.

▲ 21일 구글에서 ‘Trump’, ‘Thaad’, ‘Korea’ 를 넣고 검색한 결과.
▲ 21일 구글에서 ‘Trump’, ‘Thaad’, ‘Korea’ 를 넣고 검색한 결과.
뉴시스 등 통신사가 ‘트럼프 격노’ 기사를 쓰며 인용한 일본 아사히 신문 기사도 한국기자가 썼다. 아사히신문이 20일 보도한 “한국 정부에 트럼프 ‘배은망덕’이라고 호통”은 아사히 신문 서울지국장이 쓴 기사이고 연합뉴스를 인용했다.

때문에 ‘트럼프 격노’ 외신 기사는 대부분 한국 기자들이 작성하고, 영어와 한국어로 기사를 쓴 ‘주고 받기’식 기사로 볼 수 있다.

월스트리트저널, 뉴욕타임스, 워싱턴포스트와 같은 미국 언론에서는 ‘트럼프 격노’ 기사를 찾아볼 수 없다. 워싱턴포스트가 21일 문재인 대통령이 “트럼프와 나는 같은 목표를 가지고 있다”라는 발언을 기사화했을 뿐이다.

▲ 21일 월스트리트저널 기사 검색 결과.
▲ 21일 월스트리트저널 기사 검색 결과.
3. 트럼프 대통령은 정말 ‘격노’했나

믈론 주요 외신들이 트럼프 대통령이 격노했다는 기사를 쓰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트럼프 대통령이 격노하지 않았다’고 단정짓기는 어렵다. 트럼프 대통령이 격노했을 수도 있지만, 믿을 만한 취재원이 확인해주지 않는 이상, 그것이 사실이거나 거짓임을 알 수 있는 방법은 없기 때문이다.

최경영 뉴스타파 기자는 자신의 페이스북에 “팩트로 확인되지 않고, 앞으로도 확인할 길이 없는 사실에 대해, 한국 관료(연합뉴스 취재원으로 추정되는)가 한국기자들에게 장난치고, 이제 조용히 결과를 주시할 것”이라고 썼다. 최 기자는 “트럼프처럼 짜증 잘 내는 인물이 짜증냈을 수도 있다. 중요한 건 기존의 이너서클들이 정권을 안팎에서 흔들고 있다는 사실”이라고 주장했다.

결국 문제는 트럼프 대통령이 정말로 격노를 했는지, 무엇 때문에 격노를 했는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연합뉴스가 한 명의, 익명의 취재원의 말을 받아 기사를 썼다는 점이다. 더 큰 문제는 이를 확인 없이 다수의 한국언론이 확대재생산했다는 사실이다.

4. 그렇다면 왜 언론은 ‘트럼프 격노’를 확대재생산할까

왜 한국언론은 서로 ‘주고받기’ 보도를 하며 ‘트럼프 격노’를 강조할까.

‘트럼프 격노’ 보도는 마치 한국은 절대 미국의 심기를 건드려서는 안되는 것처럼 보이게 한다. 경향신문은 ‘보수들의 조국은 어디인가’(20일)라는 칼럼에서 “보수층은 마치 양국 간 중대한 균열이 발생한 것처럼 침소봉대하고 있다”며 “보수층의 반정부 연대가 위험한 이유는 미국을 상전처럼 받드는 뿌리 깊은 사대주의가 배경에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 한국 언론의 '사대주의'를 꼬집은 경향신문의 '장도리' 만평.
▲ 한국 언론의 '사대주의'를 꼬집은 경향신문의 '장도리' 만평.
한·미간 이견이나 갈등이 불거질 때 한국 언론이 미국 측의 입장을 지나치게 보도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한 것이다.  

이재명 성남시장은 자신의 페이스북에 언론의 이 같은 보도행태에 대해 “대한민국, 자주독립 주권국가 맞느냐”며 “트럼프가 한국내 사드 논란에 격노했다는데 그가 격노하는 것도, 노했다고 한국 언론이 보도하는 것도, 노했다고 우리가 안절부절 못하는 것 모두 자존심 상한다”고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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