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정부나 자유한국당·바른정당이 여당일 때도 협치는 없었고 탕평도 없었는데 왜 이제 와서 협치 타령인가? ‘내로남불’은 순서가 바뀌었을 뿐이다.”

국회 인사청문회를 언급한 들머리 문장은 청와대나 민주당의 논평이 아니다. ‘진보’ 언론의 기사도 아니다. 조선일보 고문 김대중의 ‘감상’이다.

일찍이 오월의 민주시민을 살천스레 ‘총을 든 난동자’로 몰아세운 그가 늦게나마 ‘정론’을 펴려는 걸까. 환상은 금물이다. 김대중의 그 말은 문재인 정부를 조준해 ‘국가 정체성’ 논란을 불 지피는 수순일 따름이다. 곧바로 “중요한 것은 그런 청문이나 인준 문제가 아니라 문 정권이 이 나라의 정체성에 어떤 변화를 가져올 것인가”라고 단언한다.

▲ 6월20일 조선일보 김대중 칼럼 ‘보수는 궤멸의 길로 가고 있나’
▲ 6월20일 조선일보 김대중 칼럼 ‘보수는 궤멸의 길로 가고 있나’
무릇 언론의 권력 비판은 의무다. 하지만 언론이 특정인의 사상을 검증할 자격까지 갖춘 것은 아니다. ‘나라의 정체성’이라는 잣대를 들이대려면, 적어도 자신이 생각하는 ‘정체성’이 무엇인가부터 말해야 한다. 케케묵은 낡은 머리로 ‘대한민국 정체성’을 고집하고 그에 맞춰 생각이 다른 이를 ‘나라 정체성’ 훼손으로 비난하는 작태는 ‘언론 자유’가 아니다. 정반대다. 언론의 이름으로 언론자유를 죽이는 ‘파쇼 언론’이다.

물론, 김대중은 고루한 언론인일 뿐이다. 하지만 그가 대변하는 세력이 있다. 자신들만 ‘애국자’인 듯 부르대는 정치모리배들이다. 촛불혁명으로 입지가 좁아졌지만 바로 그렇기에 ‘빅브라더’를 더 갈구한다. 촛불혁명 과정에서 미국 성조기를 흔들며 ‘계엄령’을 요구하는 눈 먼 대중들만이 아니다. 미국 정치의 민낯, 트럼프를 한국 정치에 끌어들이려 안간힘을 쓴다.

“트럼프, 사드 한국 배치 지연 논란에 격노…욕설까지 했다.” 이 나라에서 발행부수 가장 많은 신문의 기사 표제다. 그 기사는 문정인 특보에 대한 날 선 공격과 이어져 있다. 한미정상회담을 앞두고 문 특보가 워싱턴특파원들과의 간담회에서 “북한이 핵·미사일 활동을 중단하면 미국의 한반도 전략자산과 한미합동군사훈련을 축소할 수 있다”, “사드 문제로 한미 동맹이 깨진다면 그게 무슨 동맹이냐”고 말했다며 ‘흥분’한다. 심지어 황교안까지 ‘페이스북 정치’로 거들고 나섰다.

여기서 이 나라의 모든 언론인들에게 충심으로 묻고 싶다. “북한이 핵·미사일 활동을 중단하면 미국의 한반도 전략자산과 한미 합동군사훈련을 축소할 수 있다”거나, “사드 문제로 한미 동맹이 깨진다면 그게 무슨 동맹이냐”는 말이 잘못인가? 더구나 문 특보는 지나칠 정도로 ‘미국과 협의아래’라는 전제까지 달았다.

▲ 문정인 외교안보 특보. 사진=노컷뉴스
▲ 문정인 외교안보 특보. 사진=노컷뉴스
문 특보의 그 말로 ‘동맹’이 위험해졌다며 길길이 날 뛰는 언론계와 정계의 부라퀴들을 보노라면 새삼 매국과 사대에 찌들대로 찌든 조선왕조의 벼슬아치들이 떠오른다. 한미동맹을 ‘우려’하는 매국과 사대주의자들의 속내는 그들의 대변자 김대중의 글에 ‘호주머니 속 송곳’처럼 나타난다. 김대중은 “나라를 바꾸는 변화의 조짐에 유의하고 대처”해야 한다며 그 보기로 사드와 한·미동맹 따위를 나열한 뒤 마침내 “대기업 문제와 불평등 문제는 어떻게 다뤄 나갈 것인가 등등 대한민국의 미래 즉 안보와 경제와 사회 구조에 닥쳐올 좌파적 변화”를 적시한다. 문재인 정부를 보며 “우리 경제와 사회 구조에 닥쳐올 좌파적 변화”를 우려하는 ‘언론계 원로’는 언제쯤 자숙할 수 있을까. 북유럽 복지국가들은 차치하고 대학생 등록금 없는 독일이나 병원비 없는 영국, 한 달 안팎 휴가를 즐기는 프랑스는 죄다 ‘포퓰리즘 나라’인가. 사영신문들의 작태에 맞서 건강한 여론을 형성해가야 마땅한 두 공영방송은 견제는커녕 되레 가세하거나 방조하고 있다.

외교에는 여야, 보수·진보가 없다고 말끝마다 떠벌이다가 한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국가정체성을 들먹이며 정부를 공격하는 저들은 누구인가. 우리 안의 트럼프인가. 우리 밖의 매국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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