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첫 폭염주의보가 내려진 17일 오후 청와대 분수대 광장에는 뜨겁게 햇살이 내려꽂혔다. 대여섯 명 정도의 사람들은 각기 자리를 잡고 빨갛고 파란, 혹은 검은 색 글씨로 쓰인 피켓을 들고 섰다. 누군가는 그늘에 자리를 잡고 피켓을 잠시 옆에 둔 채 앉아 쉬었고 누군가는 흔들림 없이 청와대를 등지고 서서 ‘피켓시위’를 이어갔다. 더운 날씨 탓에 참가자들은 연이어 물을 들이켰고 얼음이 든 페트병을 안고 있는 이도 있었다.

국민의 목소리를 억누르는 탄압이 이어졌던 지난 정권이 지나가고, 문재인 정부가 들어선 이후 청와대 앞 분수대 광장과 청운효자동 주민센터 앞 신교동 사거리는 문재인 대통령을 향해 사회의 문제를 해결해달라는 국민들의 목소리가 분출하는 공간이 됐다.

정권이 바뀌었지만 청와대 앞 경찰의 경계태세는 유사했다. 다만 경찰들의 ‘태도’는 이전 정부 때와 많이 달라졌다. 집회에 참여한 이들도 “경찰들이 예전보다 많이 친절해졌다”고 입을 모았다. 한 경찰은 집회에 참여한 한 중년 여성에게 다가가 “식사는 하셨냐”고 묻기도 했다.

▲ 17일 오후 청와대 분수대 앞 광장 앞의 1인시위 현장. 사진=차현아 기자.
▲ 17일 오후 청와대 분수대 앞 광장 앞의 1인시위 현장. 사진=차현아 기자.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은 20일째 청와대 앞 피켓시위를 이어가고 있다. “법외노조 철회, 해직교사 복직”이라고 쓰인 하늘색 피켓을 든 김학한 전교조 정책실장은 “앞으로 인선된 노동부장관과 교육부장관이 전교조의 법외노조 문제를 해결해줄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전교조는 20일째 청와대 앞 1인시위를 이어가고 있다.

김 실장은 “전교조의 법외노조화는 박근혜 정부의 대표적인 교육적폐”라며 “김영한 민정수석 비망록에 보면 전교조 법외노조화는 긴 프로세스를 얻은 성과라고도 나온다. 국제노동기구(ILO)와 OECD가 전교조의 법외노조화 철회를 요구하고 있는 만큼 문재인 정부가 교육적폐를 청산해주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지난 5월1일 삼성중공업 크레인 사망사고 이후 책임자 처벌과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목소리도 있었다. 전국금속노동조합 경남지부 거제통영고성조선하청지회 이김춘택 사무장은 “진상조사결과는 15일 발표됐지만 수사 내용이 부실했다”고 비판했다. 이김춘택 사무국장은 “조선소는 대표적인 다단계 하청업체로 운영되며 해양 플랜트 업계에 무리하게 인력이 투입되고 있는 현장”이라며 “어떻게 크레인끼리 부딪혀서 사고가 났는지는 조사됐지만 왜 그렇게 사람들이 많이 죽을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구조적 문제에 대해서는 조사가 안됐다”고 지적했다.

▲ 삼성중공업 크레인 붕괴 사고 이후 책임자 처벌과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1인피켓시위를 진행하고 있는 현장. 사진=차현아 기자.
▲ 삼성중공업 크레인 붕괴 사고 이후 책임자 처벌과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1인피켓시위를 진행하고 있는 현장. 사진=차현아 기자.
또한 “경찰은 8명에게 구속영장을 청구했는데 그 중 현장 노동자가 5명이었다. 그렇지만 삼성중공업의 사장은 책임을 지지 않았다”고 꼬집었다. 이김 사무국장은 “문 대통령이 후보 시절 유가족을 만나 삼성중공업의 책임을 묻겠다고 했는데 아직 문재인 대통령과 얘기를 나눠 본적 없다”고 덧붙였다.

경상북도 봉화군에서 올라온 ‘봉화 재산 영농발전법인 대표’라고 자신을 소개한 임진명(56)씨는 목에 ‘단식 8일째’라고 쓰인 이름표를 걸고 나무 옆에 누워있었다. 기자라고 밝히자 주변에서 집회를 하고 있던 이들이 너도나도 모여 임씨의 말을 경청했다. 역시 청와대 인근에서 1인시위를 하고 있다는 한 40대로 보이는 남성은 “일단 저는 괜찮으니 이 분(임씨) 말씀 먼저 들으시라”며 임씨가 하는 말에 “속이 다 후련하다”며 맞장구를 치기도 했다.

임씨가 청와대 앞에서 단식 농성과 1인시위를 하게 된 이유는 지난 1일 경북 봉화에 쏟아졌던 골프공 크기의 우박 때문이다. 봉화 지역 농가가 이로 인해 회복하기 어려울 만큼 큰 피해를 봤기 때문에 정부가 즉각 국가재난지역을 선포해 농가의 생계 보장을 해달라는 요구다.

임씨에 따르면 우박으로 피해를 본 도내 농지 면적은 약 6600ha다. 특히 피해가 컸던 봉화 지역은 고추와 수박 등을 재배하는 지역인데, 자동차 본네트가 찌그러질만큼 큰 ‘슈퍼우박’이 느닷없이 쏟아져 피해가 이만저만이 아니라고 호소했다. 임씨는 “아직도 경북지역은 초토화돼있다. 인력이 모자라서 아직도 피해난 밭을 걷어내질 못하고 있어 정확한 피해액도 집계를 못하고 있는 판”이라고 말했다.

▲ 경북 봉화군에서 봉화지역에 대한 국가재난지역을 선포해달라고 요구하고 있는 임진명 '봉화재산영농발전법인대표'. 사진을 찍겠다고 하자 청와대가 보이는 앞에서 피켓을 옆에 두고 누웠다. 사진=차현아 기자.
▲ 경북 봉화군에서 봉화지역에 대한 국가재난지역을 선포해달라고 요구하고 있는 임진명 '봉화재산영농발전법인대표'. 사진을 찍겠다고 하자 청와대가 보이는 앞에서 피켓을 옆에 두고 누웠다. 사진=차현아 기자.
임씨는 “정치인들은 대안 마련을 위해 토론하고 입법 준비를 하고 있지만 지금 당장 피해가 돌아온 농민들을 돕기에는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린다. 봉화는 농사를 망쳐서 고령의 할배들이 노가다라도 해야 할 판”이라며 “대통령이 나서서 국가재난지역을 선포해달라”고 요구했다.

좋은 일자리를 만들겠다고 나선 문재인 대통령에게 비정규직들의 삶을 실질적으로 개선해달라는 목소리를 내고 있는 이들도 있었다.

청운효자동 주민센터 앞 신교동 사거리에 위치한 농성장에서 만난 전국금속노조 기아자동차비정규직 김수억 지회장과 유홍선 현대자동차비정규직지회 지회장은 “문재인 대통령을 만나 현대자동차 비정규직 문제의 책임을 지고 있는 정몽구 회장을 처벌하겠다는 입장을 들을 때까지” 농성을 이어갈 예정이라고 말했다.

김수억 지회장은 “정부에서 비정규직 문제를 해결하고 일자리를 창출하겠다고 의지를 밝히고 있다. 좋은 일자리를 만들고 재벌개혁을 하겠다고 한다. 제대로 개혁하려면 현대차 비정규직 문제와 노조 파괴 행위 등 노동 적폐에 대해 실질적인 처벌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최근 검찰은 현대자동차 직원들을 유성기업 노조파괴 혐의로 기소한 바 있다.

▲ 청운효자동 주민센터 앞 신교동 사거리에서 농성을 이어가고 있는 현대기아차 비정규직지회. 사진=차현아 기자.
▲ 청운효자동 주민센터 앞 신교동 사거리에서 농성을 이어가고 있는 현대기아차 비정규직지회. 사진=차현아 기자.
김 지회장은 “지난 10년 동안 비정규직들이 고통을 받아왔다. 청와대 앞에서는 보이지 않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여전히 문제를 안고 있다. 비정규직의 삶이 실질적으로 개선될 수 있도록 당사자들의 목소리를 들어달라”고 말했다.

대통령 취임 후 ‘민원 1호’였던 스텔라 데이지호 선원 가족들은 청운효자동 주민센터 앞 신교동 사거리 앞과 광화문 앞 4.16연대 천막을 동시에 오가고 있다. 허영주 스텔라 데이지호 가족 공동대표(허재용 2등 항해사의 누나)는 광화문 앞 4.16연대 컨테이너 박스 안에서 리본 제작에 열중하고 있었다.

스텔라 데이지호 선원 가족들은 세월호를 상징하는 노란색 리본과 스텔라 데이지호를 상징하는 주황색 리본을 함께 만들고 있었다. 주황색은 스텔라 데이지호 실종 선원의 생존 가능성을 상징하는, 아직 찾지 못한 구명벌의 색깔이다.

허 대표는 정권이 바뀐 이후 정부의 태도가 크게 바뀌었다고 말했다. 허 대표는 “전 정부 때는 국무총리에게 면담을 요청했는데 만나주지도 않았다. 4월17일에 총리 공관에 가서 실종자 가족이라고 했더니 경찰들이 모여들어 한 명씩 들어 날랐다. 그 와중에 두 명이 뇌진탕이 왔다”고 말했다.

덕분에 전 정권에서 중단됐던 집중수색이 지난 16일 재개돼 수사는 다시 속도를 내고 있지만 아직 성과를 내고 있지는 못하다. 스텔라 데이지호 가족들이 새 정부에 바라는 것은 두 가지다.

“찾지 못한 구명벌을 끝까지 추적해 실종자들의 생존 여부를 확인해줘야 한다. 또한 사고 원인과 진상규명이 반드시 필요하다. 단일선체 유조선을 화물선으로 개조한 노후 선박이 스텔라 데이지호였고, 이런 선박이 국내에 28척이나 더 운영되고 있는 상황이다. 언제 또 똑같은 사고가 날지 모른다. 스텔라 데이지호 사건이 ‘제2의 세월호’라고 불리고 있는데, ‘제3의 세월호’가 없으려면 진상규명은 철저히 돼야 한다. 이걸 가족들이 할 수는 없다. 국가가 해줘야 하는 일 아닌가.”

평일에는 문재인 대통령이 숨가쁠만큼 한국 사회 곳곳에 남아있는 적폐청산과 진상규명,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는 이들이 더 많이 모인다는 전언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정부 동안 유난히 힘겨웠던 이들의 손을 잡아주기를 바라는 기대감은 청와대 앞에서 응축되고 있었다. 평일에 모이는 이들은 적게는 20여명, 많게는 40명에 달한다. 한 경찰은 기자에게 “평일에 다시 오면 더 많은 사람들을 볼 수 있다”고 귀띔했다.

▲ 청와대 인근에 붙어있는 스티커. 사진=차현아 기자.
▲ 청와대 인근에 붙어있는 스티커. 사진=차현아 기자.
김수억 지회장은 “청와대 주변은 세월호, 스텔라데이지호를 비롯해 환경단체와 철거민 등 수많은 이들이 다 모이는 곳”이라며 “그동안 한국 사회가 많이 힘들었다는 증거 아니겠나”라고 했다.

물론 청와대 앞에 모인 이들 중엔 가끔 애매한 요구 조건과 모호한 책임자를 문제로 들이대는 경우도 있었다. 전북 군산에서 온 자신을 60대라고 밝힌 한 여성은 “희대의 인권유린과 성폭력“이 벌어졌다며 한 기업 직원과 정부를 ‘규탄’했다.

이 여성은 자신이 살고 있는 아파트를 지은 기업의 직원이 같은 아파트에 거주하며 자신의 집 벽에 여러 구멍을 뚫어 독극물을 뿌리고 자신을 엿보았으며 성폭행까지 일삼는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 직원이라고 주장한 사람이 진짜 그 회사의 직원인지, 그 사람이 구멍을 뚫은 것이 맞는지, 실제로 같은 아파트에 거주하고 있는 것이 맞는지 등을 묻는 질문에 명확히 답하지 못하고 “확인해보니 정황상 그렇다”고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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