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이 갑자기 대출금리를 12.5%로 올리자고 했다. 5%대 금리에서 갑자기 7%포인트 이상을 올리자는 연락이었다. 적자가 늘어난 탓에 기업신용도가 낮아진 결과였지만, 대표는 억울했다. 경영을 잘못해서 발생한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여전히 세계 패러글라이딩 시장 60%를 점유한 1위 기업이지만 갑작스럽게 늘어난 적자를 메우기는 어려웠다.

한때는 200여명에 가까운 직원들과 함께 일했다. ‘그날’ 이후 경기도 용인시에 위치한 진글라이더는 현재 15명만 남은 작은 기업이 됐다. ‘그날’은 3시간을 줄테니 당일 안에 개성공단에서 모두 철수하라는 정부의 통보가 있었던, 3월 시즌을 대비해 출시를 앞두고 있던 새 모델을 모두 개성공단에 놓고 나와야 했던 2016년 2월10일이다. 미디어오늘은 지난 16일 진글라이더 사옥에서 송진석 대표(60)를 만나 이야기를 들었다.

-진글라이더는 어떤 기업인가.

“패러글라이딩을 처음 한 건 21살 때였고, 올해로 40년이 됐다. 회사를 다니던 중 아는 사람을 따라 패러글라이딩 하는 모임에 참여하게 된 것이 계기였다. (송 대표는 지금도 일주일에 두 세 번 이상은 회사 인근에서 직접 패러글라이딩을 한다. 송 대표의 오른쪽 뺨에는 패러글라이딩을 하다가 사고로 크게 다쳐 깊게 파인 상처가 남아있다. 대표는 사고를 당하고 1년 뒤 다시 패러글라이딩을 시작했다.)

▲ 송진석 진글라이더 대표. 사진=이치열 기자.
▲ 송진석 진글라이더 대표. 사진=이치열 기자.
진글라이더를 만든 건 1998년이지만 국내에 에델이라는 브랜드 회사에서 일한 적 있다. 낙하산 제조를 주로 하던 회사였다. 스위스나 독일 쪽에서 OEM(위탁생산)을 했었는데, 나는 그 회사에서 직접 제작했다. 덕분에 에델이라는 회사가 전 세계적으로 대단해졌다. IMF때 회사에서 나와 함께 일하던 R&D팀원들과 함께 새로 회사를 차려 일본 선수들 패러글라이더를 만들어준 것이 시작이었다.

우리는 매출이 크지는 않은 회사다. 1년에 1000만 달러(한화 113억 4000만원) 정도의 매출을 갖고 있는 중소기업이다. 다만 우리가 만드는 제품은 세계 시장에서 상당히 브랜드 가치가 높다.

지난해 개성공단 닫히고 난 뒤 우리 브랜드를 다시 전세계에 알릴 수 있는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해마다 패러글라이딩 월드컵이 네 다섯 번씩 있는데, 여기서 몇 명이 또 뽑혀 슈퍼 파이널이라는 대회를 한다. 최종 경기가 올해 1월에 있었는데 여기서 개인 종목에서 우리 선수가 1,2등을 차지했다. 프랑스 경기에서도 1등했다. 1998년 창업한 이후부터 계속 우승해온 트로피가 있다. 우리 선수들이 우승한 것도 있고 제가 출전해 받은 것도 있다. 우린 돈은 없어도 저건(트로피를 가리키며) 있다.

우리 같은 회사는 정말 그동안 가슴에 태극기 달고 일만 했는데 개성공단에서 벌어진 일련의 과정을 보면 대한민국 떠날 생각밖에 안 들었다. 적지만 우리도 천만 달러를 벌어들이고 있고, 인천공항을 나설 때마다 자부심 갖고 일하고 있었는데.“

(편집자주: 진글라이더의 시제품을 테스트하는 파일럿들과 ‘팩토리팀’ 직원들은 실제 패러글라이딩 선수들이다. 국가대표로도 활동했던 송 대표 뿐만아니라 진글라이더에서는 비행을 좋아하는 독일, 영국, 중국 등 세계 각국에서 온 젊은이들이 패러글라이더 설계부터 시합 준비까지 모두 하고 있다.)

▲ 송진석 진글라이더 대표. 사진 속 트로피는 올해 진글라이더의 선수가 받은 세계 대회 트로피. 사진=이치열 기자.
▲ 송진석 진글라이더 대표. 사진 속 트로피는 올해 진글라이더의 선수가 받은 세계 대회 트로피. 사진=이치열 기자.
-이미 오랜 기간 동안 세계 시장에서도 브랜드 가치를 인정받아온 회사였는데, 개성공단이 만들어졌을 때 들어가야겠다고 생각한 이유가 있었나?

“2005년에 처음 개성공단에 입주했는데, 통일부에서 먼저 제안했다. 작지만 이름 있는 회사니까 제안한 것 같다. 생각해보면 중국이든 어디든 다른 나라에 가서 (공장도 세우고) 일하고 있는데 북한에 가서 일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서 참여하게 됐다. 당시 정동영 통일부 장관 때였는데, 정부가 해주는 지원들이 상당히 좋았다.

개성공단에 들어간 이후 특별히 매출이 오른건 없었다. 국내 기업에 납품하는 다른 개성공단 입주업체들과 달리 우리는 유럽으로 수출하는 제품의 비율이 90%가 되다보니 어디서 만들든 크게 상관은 없었다. 다만 개성은 같은 언어권이고 해외 공장보단 가까우니까 좋았다. 2013년에 잠시 중단됐다가 5개월 뒤 열릴 때 새누리당에서도, 박근혜 대통령도 앞으로 다시 이런 일 없을 거라고 했다. 마침 중국 인건비는 점차 올라가고 있던 차라, 중국 공장 비중을 줄이고 개성 쪽 인원을 100여명 늘렸다.“

-개성공단 공장 운영할 때 어려운 건 없었는지.

“우리는 이미 중국에 공장이 있는 상태여서 개성공단에 ‘올인’을 할 수는 없는 입장이었다. 다만 첫 날 북한 근로자들과 상견례하던 첫날, 여기서 뭔가 해봐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몸이 똑바로 서있는 사람이 없었다. 미싱 작업을 해야 하는데 허리를 똑바로 세우지를 못하는거다. 영양실조 때문에 손톱도 깨져있고 울퉁불퉁했다. 냄새가 정말 심했다. 상견례를 위해 양복을 입고 갔는데 몸에 냄새가 뱄다. 개성공단에서 돌아오니 사람들이 대체 어디 갔다왔냐고 할 정도였다. 처음에 공장을 지을 때 목욕탕을 지으라고 한 이유가 그거였다.

그래서 남측에서 전기와 물이 들어가고, 대형 세탁기도 들여보냈다. 일주일에 두 번씩 목욕도 시켜주고 세탁도 해줬다. 캐터링 회사에서 단백질도 공급해줬다. 근데 문제는 해주면 더 해달라고 하니까 그것 때문에 매번 싸웠다. 초코파이도 하나를 주면 두 개 달라고 했다.

월급은 개성공단 북측 총국에 줬고 인사권도 그쪽에 있었다. 인사권이 없는게 불편했다. 북한 측 총국에서 필요하면 사람을 마음대로 바꿔버렸다. 정치 상황에 따른 불안감도 항상 어려웠다. 우리는 나름 정치하고 관련 안 시키려고 노력했지만 이명박 정부 들어서 호락호락 하지 않았다. 다만 (그때까지만해도) 정치적인 것 때문에 피해는 없었다.

개성에 들어갔던 (업체 운영하는) 사장들의 생각은 대체로 비슷했다. 나중에 통일이 되면 우리가 분명히 할 일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10년 남짓 개성공단에 있어보니 (북한 근로자들이) 변하는게 보였다. 처음에는 긴장감도 돌았는데 나중에는 서로 경계심도 줄어들었다. 물론 당에서는 매일매일 교화시키니까 (정치적 사상 등은) 어떻게 할 수 없다. 개인적으로는 대화가 조금 있었다. 여자 근로자들이 남한 아줌마들이 어떻게 사는지 많이들 궁금해하더라. 일상생활도 (서로) 물어봤다. 이런 변화들이 굉장히 잘 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통일로 가는 결정적인, 제일 좋은 방법이라고 봤다.”

▲ 경기도 용인시에 위치한 진글라이더 사옥에서 진글라이더 직원이 패러글라이더를 만들고 있다. 사진=이치열 기자.
▲ 경기도 용인시에 위치한 진글라이더 사옥에서 진글라이더 직원이 패러글라이더를 만들고 있다. 사진=이치열 기자.
-일각에서는 개성공단 북한 근로자들에게 지급되는 임금 등 개성공단에 들어가는 돈이 북한의 핵 개발 비용으로 들어간다는 주장을 하는데.

“정확히 아는 사람은 없는 것 같다. 저도 일단 잘 모른다. 임금을 일인당 얼마씩 총액을 북한 측 직장장한테 주면 그것이 북한 측 총국으로 들어간다. 총국으로 돈이 들어가면 북한 돈으로 환전해서 인민들에게 줄텐데 어떻게 환율이 적용돼서 들어가는지는 정확히 모르겠다.

분명한건 개성공단이 운영되면서 이 사람들이 잘 먹고 옷도 잘 입고 다니는 변화는 틀림없이 있었다. (핵 개발 등 군사 비용으로 들어가는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모든 개성공단의 돈이 다 그쪽으로 들어가는 건 아니다. 근로자들에게 돈이 들어가니까 얼굴도 뽀얘지고 예뻐지고 웃음이 많아지는게 보였다. 어디서 해왔는지 몰라도 쌍커풀 수술한 사람도 봤다. 우리는 이런 변화들이 좋다고 생각했다.”

▲ 송진석 대표(왼쪽에서 두 번째)가 패러글라이더 제품을 살펴보고 있다. 사진=이치열 기자.
▲ 송진석 대표(왼쪽에서 두 번째)가 패러글라이더 제품을 살펴보고 있다. 사진=이치열 기자.
-2016년 갑작스럽게 개성공단에서 철수됐던 그 날 얘기가 궁금하다.

“그때가 설 구정 휴가(2월10일)였다. 남측 직원은 한 명 남아있고 나머지는 다 휴가를 간 상태였고 저는 일본에 출장을 갔다. 오후 3시 쯤 직원에게 전화가 왔는데, 다섯 시에 폐쇄한다는 공식 발표가 있을 예정이니 다섯시 전에 전면 철수하라고 관리위원회에서 통보를 했다는 것이다. 그 전에 어떤 언질도 없었다. 즉시 한국에 있는 임원진에게 전화해서 방북 신청하고 차를 다 몰고 들어가자고 했다. 설마 이튿날에라도 들어갈 수 있게 해주겠지 싶었다.

다섯시가 되고 나니 북한 측에서 아예 다 못 갖고 나가게 하더라. 나가려면 몸만 나가라는 거다. 이것저것 싣고 나가려던 다른 업체들에도 다섯시가 넘으니까 도로 놓고 가라고 했다. (이런저런 실랑이를 하다가) 결국 아홉시 넘어서 나왔을거다. 저는 그때 일본 NHK 생중계로 개성공단에서 나오는 차들을 봤다. 직원을 인질로 잡으면 어쩌나 싶어서 걱정돼서 우리 회사 차 나오나 살펴봤다.“

▲ 2013년 4월 개성공단이 폐쇄됐을 때 짐을 잔뜩 싣고 내려오는 개성공단 입주업체 관계자들. 사진=이치열 기자.
▲ 2013년 4월 개성공단이 폐쇄됐을 때 짐을 잔뜩 싣고 내려오는 개성공단 입주업체 관계자들. 사진=이치열 기자.
-그때 놓고 온 기계 설비나 제품들은 얼마 정도 규모였나? 어느 정도 손실이 있었는지, 정부에서는 어떻게 지원했는지 궁금하다.

“우리는 놓고 온 물건의 규모보다 그 이후의 영업손실이 더 컸다. 놓고 온 건, 투자한 것 까지 합쳐서 약 45~50억원 정도 규모다.

패러글라이더는 스포츠 매니아층을 대상으로 한 기호상품이다. 알프스 산맥을 낀 독일과 스위스 일대를 중심으로 3월부터 패러글라이더 시즌이 시작되니까, 2월 말부터 출시할 준비를 잔뜩 해놓고 있었다. 사실 패러글라이더 원·부자재가 해봤자 가격이 얼마나 되겠나. 근데 이걸 기술력을 가지고 만들어서 팔면 몇 십억이 되는거다. 이미 2013년에 개성공단 잠시 중단되면서 그때도 회사 없어지는 것 아니냐고 소비자들이 놀랐는데, 2016년 시즌에도 또 한 차례 출시가 안되니 소비자들은 진글라이더라는 브랜드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는거다.


▲ 사진=진글라이더
▲ 사진=진글라이더

생각해봐라. 만약 어떤 소비자가 아우디의 신차 출시를 기다리다가 안나와서 BMW 자동차를 샀다. 근데 이것도 괜찮다고 생각이 들면 다시 아우디 제품을 사려고 돌아오기까지는 시간이 걸린다. 기호상품은 항상 시장을 개척해야 하고 제때 물건을 내야 한다. 이런 잠재적 브랜드 가치 손실부터 시작해서 영업손실을 따지면 수백억원 규모다.

개성공단 폐쇄 후 우릴 도와준건 (정부가 아니라) 유럽의 원·부자재 공급업체들이었다. 개성공단이 국제적 이슈였고 진글라이더의 잘못이 아니니까, 업체들이 먼저 도와주겠다며 결제도 3개월 간 미뤄주고 했다. 그쪽에선 우리나라가 다 해줄거라고 생각했겠지만, 대한민국은 그렇지 않다고 했더니 말도 안된다고 하더라.

각 업체를 방문한 자리에서 국무조정실장, 통일부장관 등은 어려운 일 없다고 돕겠다고 했다. 정작 정부가 지원해준다면서 돈을 빌려줬고, 이자는 2%이상을 받아갔다. 지원 규모도 기업 신용등급에 따라 다 달랐다. 보상은 특별법이 제정돼야만 가능하다고 했다. 지원이라는 명분으로 빌려줄 거면 왜 이자는 그렇게 받아가는지 궁금했다. 정말 받아야 하는거면 한국 은행의 기준금리 정도 수준에서 받으면 명분되는거 아닌가.

박근혜 대통령이 그때 국민이 납득하는 한도 내에서 지원해주겠다고 하더라. 그 말 때문에 ‘지원’이 ‘보상’이라고 많은 사람들에게 인식이 돼버렸다. 그때 (일각에서는) 우리를 다 좌빨로 만들었다. ‘태극기 부대’ 할아버지나 일각에서는 우리를 북한에 돈을 갖다준 자금책으로 만들어버리고는, 보상 받을거 다 받고 돈 많이 번거 아니냐고 하더라.“

▲ 김대중 정부에서 진글라이더 송진석 대표가 받은 포장증(위)과 노무현 대통령 취임 후 중견기업들을 초대한 자리에서 받은 기념 시계. 송 대표는 대표 사무실에 걸어두고 있다. 사진=이치열 기자.
▲ 김대중 정부에서 진글라이더 송진석 대표가 받은 포장증(위)과 노무현 대통령이 취임 후 중견기업들을 초대한 자리에서 받은 기념 시계. 송 대표는 "초청했던 이백여명의 회사 사장들 중에 '일등 하는 회사는 진글라이더밖에 없다'고 노무현 대통령이 했던 말을 잊지 못한다"고 회상했다. 사진=이치열 기자.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면서 개성공단에 대한 기대도 클 것 같다. 최근 정치권에서도 관련 기업들 목소리도 듣고 있는 것 같은데, 향후 개성공단은 어떻게 될 것 같은가. 그리고 개성공단이 재개되면 다시 들어갈 계획도 있나.

“정치권은 그동안 도와주지도 않았으면서 개성공단 들어갈 때 리스크도 생각 안하고 들어갔냐, 거기 들어가서 돈 벌었다고 하더라. 정치권은 정권 바뀌니까 태도가 바뀌었다. 그 전에는 개성공단 기업협의회 임원들이 서서 기다리고 만나려고 해도 안 만나줬다.

정치적으로는, 김정은이 계속 ‘미친 짓’을 하는 동안에는 개성공단이 성공할지 안할지는 누구도 답을 줄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민간 입장에서 보면 정말 위대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민족끼리 같이 뭔가를 한다는 한다는 그런 차원에서는 다시 가고 싶다.

정부가 (개성공단의 갑작스러운 폐쇄 방지 등) 보장을 할 수 있나. 저는 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개성공단은 일방이 할 수 있는게 아니다. 쌍방이 노력해야 한다. 우리는 만약 개성공단이 열린다고 하면 열리는 대로 발은 들여놓을 것 같다. 그렇지만 올인은 절대 안한다. 주요 품목은 딴데서 하고 개성공단은 중요하지 않은 품목만 하면서 적당히 유지만 할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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