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연금관리공단이 ‘삼성물산 합병안’에 찬성 입장을 정하기 직전, 청와대와 보건복지부가 합병 찬성 의결을 전제로 둔 동향 문건을 수시로 주고 받은 정황이 확인됐다.

박영수 특별검사팀은 지난 14일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7부(김진동 부장판사) 심리로 열린 ‘삼성그룹 뇌물공여 국정농단’ 사건 제28회 공판에서 2015년 6월 말부터 7월10일까지 김기남 전 청와대 행정관과 백아무개 당시 보건복지부 국민연금재정과 사무관이 주고 받은 이메일 및 문자메시지 내역을 공개했다. 7월10일은 국민연금관리공단 내 투자위원회가 개최돼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에  찬성 입장을 의결한 때다.

▲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5월25일 오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린 뇌물공여 혐의 관련 18회 공판에 출석하며 가벼운 미소를 짓고 있다.ⓒ민중의소리
▲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5월25일 오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린 뇌물공여 혐의 관련 18회 공판에 출석하며 가벼운 미소를 짓고 있다.ⓒ민중의소리

김 전 행정관은 6월 말 최원영 전 청와대 고용복지수석으로부터 ‘삼성물산 합병 이슈를 알아보라’는 지시를 듣고 백 사무관, 최아무개 과장으로부터 2주 동안 집중적으로 동향 보고 문건 등을 전달받았다. 

백 사무관은 국민연금공단 주식의결권 행사 전문위원회(이하 전문위원회)가 ‘SK C&C-SK 주식회사 합병안’에 반대 입장을 의결한 6월24일, 관련 내용을 김 전 행정관에게 보고했다. SK그룹 합병안은 삼성물산 합병안과 마찬가지로 대주주에 유리한 합병 비율 산정 등의 문제가 있었다. 전문위는 ‘합병 취지에는 공감하나 시너지 효과에 대한 판단이 쉽지 않다’ ‘일부 주주 가치 훼손할 우려가 있다’ 등의 이유를 들었다.

김 전 행정관은 6월26일 ‘백사무관님, 합병 건 위원회에 올라가면 미리 알려달라’는 내용의 문자를 보냈다.

이어 6월29일 김 전 행정관은 백 사무관에게 ‘삼성물산 합병건에 대한 주요 주주별 입장, 쟁점, 주총일정 등 자료를 본부에서 받아달라’는 지시 문자를 보냈다. 백 사무관은 7월1일 ‘제일모직 삼성물산 합병 관련 동향 보고’ 문건을 이메일을 통해 보고했다.

특검은 청와대 보건복지수석실의 지시와 보건복지부의 보고가 국민연금의 합병 찬성 의결을 전제로 이뤄진 것이라 의심하고 있다.

7월3일 백 사무관은 ‘삼성물산 합병 관련 동향 보고’ 문건을 재전송하며 ‘첫번째 자료는 무시하면 된다. PER(주가수익률), PBR(주가순자산비율) 관련 내용은 반대와 찬성 모두 가능하고 반대 쪽 논리도 될 수 있다. 그래서 없애고 나중에 보낸 자료로 정리했다’는 내용의 문자를 보냈다. 김 전 행정관은 ‘반대 쪽 논리’ 언급 부분에 대해 법정에서 “복지부가 자료를 보내고 나서 수정이 필요한 부분을 봐서 문자를 보냈다는 정도로 여겼다”고 말했다.

당시 보건복지부는 합병건이 삼성그룹 총수 일가의 지배권 강화 문제와 관련돼 있다고 특정하기도 했다. 7월3일자 동향 보고 문건 중 합병 배경 부분에는 ‘양사 사업 영역 결합으로 매출 이익 증대 등 외형적 성장, 신규 유망사업 발굴 뿐 아니라 지배구조 개편을 위한 합병으로 순환출자구조 단순화, 오너 일가의 안정적 지배체제 확보’라는 내용이 기재돼있다. 문건엔 ‘투자위원회 개최 시기, 결정 여부 등 향후 일정은 우리부와 상의해서 결정’이라는 내용이 있다.

이후 7월6일 김 전 행정관은 백 사무관에 ‘기금운용본부 삼성합병 관련 투자위원회 개최 일정 아직 미정인가요’라는 문자를 보냈다. 같은 과 최아무개 과장은 김 전 행정관에 기금운용본부 담당 부서가 ‘전문위원회’ 안건 부의를 주장해 본부와 의견 조율이 안된 상태로 투자위원회는 3~4일 내 개최될 것이라 보고했다. 김 전 행정관은 이에 대해 “합병건이 언론에서 이슈가 되고 있고, 비서관이 복지부에서 진행이 어떻게 되고 있는지 확인해 보자는 말이 나와서”라고 말했다.

7월8일 백 사무관은 김 전 행정관에게 ‘주주총회 안건 등 자문기관 의견 차이 안건 현황’ 및 ‘국민연금공단 의결권 행사 처리 방안 관련 보고’ 문건을 전송했다. 투자위원회가 ISS, 한국기업지배구조원 등 자문기관 의견과 다르게 결정한 사례가 있는지 알아보라는 지시에 따른 보고문건이었다. ISS(Institutional Shareholder Service)와 한국기업지배구조원은 모두 삼성 측이 제시하는 합병안에 ‘반대’를 권고한 자문기관이다.

같은 날 오후 백 사무관이 보낸 ‘투자위원회 논의 추진 방안 검토’ 문건엔 “삼성물산 합병 안건은 기금운용본부 투자위에서 결정하도록 유도”라는 문구가 기재돼있다. 실제로 ‘SK그룹 합병 건’은 외부 전문가위원들로 구성된 전문위에서 결정한 반면 삼성물산 합병건은 국민연금공단 내부 임직원들로 구성된 투자위원회에서 결정했다.

‘신속히 찬성을 결정하기 위해 투자위로 유도한 게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는 대목이다. 당시 합병건이 전문위원회에 상정될 시 반대에 부딪힐 가능성이 높았다. ‘주주가치 훼손’을 근거로 SK그룹 합병안이 무산된 선례가 있는 데다 김성민 당시 전문위원회 위원장은 반대 입장을 고수하고 있었다. 보건복지부는 당시 전문위원별 성향을 분석해 설득 시나리오를 만드는 등 합병 찬성을 이끌기 위한 작업을 진행했다.

다음 날인 7월9일 백 사무관은 김 전 행정관에게 ‘BH(청와대)’ 보고자료인 ‘합병 관련 국민연금 의결권 행사 상황 보고’ 문건을 보고했다. 문건엔 ‘합병 성사 시 주주가치 제고에 기여하고 주식시장 및 경제에 긍정적 영향을 미친다’는 내용과 ‘향후 예상되는 쟁점 및 대응논리’ 등이 자세히 기재돼 있다. 투자위원회의 합병 찬성 의결이 전제된 내용으로, 회의가 개최되기 하루 전 보건복지부가 이를 검토한 정황이다.

김 전 행정관은 7월9일 다음 날 열릴 투자위원회 개최와 관련해 ‘내일 아무일 없이 잘 끝나길 빈다’고 백 사무관에게 문자를 보냈다.

김 전 행정관은 투자위원회가 열린 7월10일에도 백 사무관에게 투자위 결과를 묻는 문자를 수차례 보냈다. 국민연금공단 투자위원회는 이날 삼성물산 측이 제안한 합병안에 찬성입장을 의결했다.

김 전 행정관은 특검 측이 청와대 및 보건복지부의 ‘합병 찬성 유도’ 여부를 묻는 질문에 대부분 “관점에 따라 다르다” “의도를 가지고 보고를 요청한 것이 아니다”라고 답했다.

김 전 행정관은 ‘투자위 결정 유도’가 기재된 7월8일자 보건복지부 작성 문건에 대해 “찬성이라는 건 보고서에 명시돼 있지 않다. 투자위원회에서 결정하겠다 정도의 의사결정이 있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합병 찬성 결론 중심으로 쓰인 7월9일자 청와대 보고 문건에 대해서도 김 전 행정관은 “관점에 따라 다를 것 같다”고 답했다.

삼성, 특검 ‘진술 끼워맞추기’ 의혹 제기

한편 삼성 측 변호인은 특검 조사의 신빙성에 문제를 제기했다. 특검 측이 김 전 행정관이 하지 않은 진술을 참고인 진술조서에 작성했고 김 전 행정관이 추측을 통해 말한 진술을 경험한 사실처럼 기재했다는 취지다.

김 전 행정관의 진술조서에는 ‘김진수 비서관이 나에게 투자위원회에서 합병 찬성 결정을 하는 것에 대해 검토하라 지시했다’는 내용이 기재돼 있다. 김 전 행정관은 법정에서 “앞뒤 상황이 그럴 수도 있겠다고 해서 (진술 기재에) 동의한 부분”이라며 “김진수 비서관이 적시해서 지시하진 않았을 것 같다”고 말했다.

당시 진술조서를 작성한 특검 측 조상원 검사는 “증인은 특검 조사 받을 때 ‘김진수 비서관이 나에게 명시적으로 합병 성사돼야 한다고 말한 건 아니지만, 전후 맥락을 비춰볼 때 찬성이 아니었나’라고 말했다”면서 “변호인 측은 진술조서 뒷부분만 잘라서 보여줬다. 증인은 이거 다 읽어보고 서명·무인한 게 아니냐”고 반박했다. 김 전 행정관은 “그렇다”고 답했다.

특검은 일련의 과정에 대해 삼성그룹 총수 일가의 경영권 승계와 관련된 현안을 청와대 측이 지속적으로 파악·관리한 정황으로 보고 있다. 특검은 특히 SK그룹 합병 건이 국민연금 전문위원회에 부의돼 반대에 부딪힌 선례가 있는 점에 비춰 청와대, 보건복지부 등이 삼성물산 합병 찬성을 유도하는 작업에 개입했다고 보고 있다.

특검 측 조상원 검사는 “2015년 7월 초 최원영 청와대 고용복지수석비서관, 김진수 보건복지비서관 지시로 김기남 행정관이 보건복지부를 통해 국민연금의 의결권 행사 방향을 지속적으로 파악한 사실 확인됐다”면서 “(보건복지부는) 국민연금 내부 투자위원회에서 안건을 결정하겠다고 최종 확인한 뒤 투자위원회에서 찬성 결정을 하도록 한 사실이 확인된다”고 주장했다.

삼성 측 변호인단은 “김 전 행정관이나 김진수 비서관, 청와대에서는 이 사건 합병에 관한 방향성이나 찬성 입장을 가지고 보건복지부에 압력을 행사한 게 아니”라며 “증인은 기억이 안나거나 직접 진술한 것이 아님에도 특검이 보여준 자료로 추정·추측한 진술이 있다는 점도 확인됐다”고 말했다.

변호인단은 “증인에 대한 특검 진술 조서에 신빙성이 부여될 수 있을지 의문”이라며 “청와대의 합병 지시는 전혀 입증되지 않았다. 이를 전제로 한 대통령과 이재용 부회장 간 합병에 대한 부정청탁, 뇌물 수수 합의 등은 성립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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