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측 가능한 ‘위험’과 예측 불가능한 ‘위기’
사실 위험이라는 개념은 19세기 산업사회의 등장과 맥을 같이 한다. 자유로이 노동하는 개인들로 구성된 산업사회는 이들 개인의 존재를 보장(insurance)해줄 수 있는 다양한 제도를 만들어냈다. 노동현장에서 발생하는 산업재해와 같은 위험은 예컨대 보험이라는 예측 가능한 대비책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위험은 일반적으로 불이익을 얻을 수 있는 가능성을 말한다.
흔히 위험과 위기는 별다른 구분 없이 쓰인다. 하지만 이 두 개념은 다소 차이가 있다. 독일의 사회학자 울리히 벡(U. Beck)은 계산 가능한 위험(risk)과 계산 불가능한 위기(danger)로 분류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사고의 인과성과 책임소재의 규명은 물론 보상(insurance)을 위한 제도가 마련되어 있는 재해는 계산 가능한 위험이다. 산업재해가 이에 해당한다. 반면, 일단 발생하면 돌이킬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시공간적으로 제한되지 않으며, 책임소재의 규명이나 보상 또는 보험이 보장되지 않는 계산 불가능한 위기가 있다. 예컨대 핵·화학·유전공학의 문제 등이 이에 해당한다.
무엇보다 과학·기술의 발전과 자본의 세계화는 수학적으로 더 이상 외삽(extrapolate)할 수 없는 위기를 산출하고 있다. 그것은 아직 경험하지 않은, 그리고 결코 경험해서는 안 될 재앙이다. 이를 위해 보험을 들 수도 없는 노릇이다. 사실 보험이라는 ‘산업사회적 이데올로기’를 뒤흔든 위기는 무엇보다 지난 80년대 중반 구소련의 체르노빌 원자력 재난이었다. 이 사건을 기점으로 위기는 역설적이게도 모던 사회의 간판스타가 된다. 산업사회 초기와 달리, 위기는 더 이상 특정지역이나 특정 계급에 국한되지 않고 ‘민주적이고 평등하게’ 확산되기 때문이다. 생태·환경 위기는 모두에게 평등하게 해당될 뿐만 아니라 계급·계층을 넘어 피해를 준다. 심지어 가족도 더 이상 확실한 보호시스템이 아니다. 경제발전과 기술진보와 같은, 인간에게 유용한 것들이 이젠 예측이 불가능한 위기로 다가오고 있다. 그리고 이는 바로 산업사회 자신이 잉태한 위기다. 산업사회적 진보는 자멸의 진보라는 벡의 지적은 섬뜩하기까지 하다.
‘위기’를 확대 재생산하는 보도, 옐로우 저널리즘이 문제다
여기 언론은 위기를 예측 가능한 위험으로 전환시켜야할 책임을 갖는다. 위험은 통제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언론은 어떠한가. 오히려 위기를 확대 재생산하는 보도, 일종의 옐로우 저널리즘이 더 많지는 않나. 사정이 이러니, 시민들은 언론의 위기보도에 불안해하고 공포에 휩싸일 뿐만 아니라 냉소적이 되어가고 있다. 예컨대 지난해 메르스 위기가 나올 무렵 언론은 대부분 메르스 치사율에 대한 자의적 추측으로 일관했었다. 더구나 KBS는 ‘메르스 악성코드 이메일 북한 연계 포착’이라는 보도를 통해 국민의 불안을 키우기도 했다. 종편채널들의 경우도 다르지 않았다. ‘공포’, ‘대란’ 등 위기 인지에 함몰되어 불확실성과 불안감을 키웠을 뿐이다.
오늘 새롭게 나타나는 생태·환경 갈등은 국가, 정당, 기업, 노조 등 주요 사회주체들에게 새로운 능력을 요구하고 있다. 모든 국민이 환경 보험을 들 수도 없는 노릇이다. 여기 다시 벡(Beck)의 조언을 들어보면, 한국도 이제 제2의 현대화, 다시 말해 성찰적 현대화의 길을 모색해야 할 때다. 그리고 언론은 바로 이런 이행기적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언론지식인들의 운명이 여기에 있다. 그것은 새 패러다임, 성찰적 패러다임을 창조하는 ‘성찰적 운명’이다. 언론은 위기를 산출하는 위기보도에서 벗어나, 정확하고 예측 가능한 위험보도를 해야 한다. 위험사회로의 이행을 위한 언론의 위험커뮤니케이션 능력은 위기에 직면한 공동체에 신선한 피를 수혈하는 행위이다. 언론이여, ‘위기’를 ‘위험’으로 전환시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