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건을 ‘프레임’에 넣어 바라볼 때, 사건의 원인을 하나로 좁히는 부작용을 낳는다. 2016년 ‘강남역 살인사건’의 경우, ‘조현병 환자의 묻지마 살인’이냐, ‘여성혐오 범죄’냐에 대한 논의로 프레임 대결이 펼쳐졌다. 이 대결의 문제는 사건을 ‘조현병 환자의 묻지마 살인’으로 규정하면 ‘여성혐오’라는 프레임은 ‘틀린’ 것처럼 취급하는 데 있다.

이 사건이 ‘여성혐오 범죄’가 아니라고 주장한 이들은 당시 경찰이 사건을 ‘묻지마 살인’으로 규정했기 때문에 ‘여성혐오 범죄’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여성혐오 범죄를 주장한 이들을 향해 비극적 사건을 ‘여성혐오’ 의제에 동원한다고 비난했다. 하지만 하나의 사건에 원인은 여러 가지 일 수 있으며, 조현병 환자의 살인이라고 결론이 난다고해도 여성혐오가 역시 사건의 또 다른 원인이 될 수 있다.

‘조현병 환자의 묻지마 살인’ vs ‘여성혐오 범죄’

2016년 5월 17일 한 남성이 서울 강남역의 노래방 건물 공용화장실에서 한 여성을 살해했다. 해당 사건은 △전혀 알지 못하는 여성을 살해한 점 △범인이 피해자가 오기 전까지 여섯 명의 남성을 그냥 돌려보낸 점 △사건 직후 체포된 범인이 경찰에 “여자들이 무시해서 범행을 저질렀다”고 진술한 점 때문에 ‘여성혐오’ 범죄사건의 요소가 있다고 볼 수 있다.

이 사건이 ‘여성혐오 범죄’임을 강조한 시민들은 강남역 10번 출구 앞에서 추모행사를 열고, 포스트잇을 붙였으며 ‘나는 우연히 살아남았다’는 구호를 외쳤다. 끊임없는 추모행렬이 이어졌다. 흉악 강력범죄에 노출되는 여성 피해자가 늘어나는 상황에서 수많은 여성들은 이 사건에서 자신들이 공중화장실을 갔을 때 느꼈던 서늘함이 단순한 우려가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어쩌면 이 사건을 ‘여성혐오 범죄’로 명명한 것은 여성들이 느꼈던 일상적 공포였다. 공중화장실을 갈 때 누군가 칸 속에 있지는 않을까, 밤에 길을 걸을 때 이어폰을 낄까 말까 망설였던 순간, 엘리베이터를 탈 때 함께 누가 타는지 의식했던 시간들이 모여 만든 공포는 여성들의 일상에 피로감을 더해왔다.

▲ 2016년 강남역 살인사건 이후 시민들은 강남역 10번출구에 추모공간을 만들었다.  사진=이치열 기자 truth710@
▲ 2016년 강남역 살인사건 이후 시민들은 강남역 10번출구에 추모공간을 만들어 포스트잇 부착 등 추모행사를 진행했다. 사진=이치열 기자 truth710@
통계 역시 이 공포가 ‘근거 있는 공포’임을 말해준다. 대검찰청의 2015년 범죄분석 피해결과에 따르면 1995년 강력범죄(살인, 강도, 강간, 방화)에 노출된 여성 피해자는 전체 7947명 중 29.9%인 2377명이었고 남성은 5570명이었으나 5년 뒤 2000년에는 전체 피해자 8765명 중 남성피해자가 2520명으로 뚝 떨어진다. 여성 피해자는 6245명이었다. 이후 여성 피해자는 꾸준히 늘어 2014년 3만4126명을 기록했다. 남성 피해자는 2009년 5649명까지 증가했지만 꾸준히 줄어 2014년에는 3552명이었다.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은 해당 통계를 두고 “강력범죄의 성별 피해자 현황은 강력범죄가 여성을 대상으로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극명하게 보여준다”고 분석했다. 특히 성폭력 범죄 피해자의 경우는 여성이 전체 통계의 90%를 차지할 정도로 극명하게 높다. 2014년 흉악 강력범죄 피해자 3만4126명 가운데 성폭력 범죄 피해자는 2만 9863명(87.5%)이며, 이 가운데 여성은 2만7129명으로 90%에 달했다.

(관련기사: 한겨레 '이유있는 언니들의 분노, 통계로 짚어봤습니다')

시민들, 특히 일상에서 무의식적으로 공포를 느꼈던 많은 여성들은 이 사건을 통해 공포의 실체를 알게 됐다. 엄기호 작가는 이러한 시민들의 움직임을 두고 ‘집단적 각성’이라고 표현했다. 엄기호 작가는 “일각에서는 우연한 사고에 과잉 대응한다고 말하지만 오히려 이들이 깨달은 우연은 그 사고가 아니라 자신들의 집단적 운명”이라고 썼다.

여성들이 ‘강남역 살인사건’에서 느낀 ‘집단적 운명’은 이 사건이 ‘여성혐오 범죄’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느껴봤던 감정일 것이다. 크게 다른 감정이 아니다. 엄기호 작가의 표현을 빌리자면 “세월호에서부터 메르스, 그리고 가습기 살균제 사건에 이르기까지 하나하나 이 계보가 그려지고 있다. 이 국가와 사회가 나를 지켜주지 않을 것이라는 공포와 그리 죽어간 사람들에 대한 슬픔, 그리고 무고한 죽음이 발생할 때마다 사람들의 숨을 턱턱 막히게 한” 것이었다. 이 집단적 각성은 “그 불행한 사건이 언제 내 차례가 될지 모르며, 그 차례는 정확하게 약자들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게 하는 사건들”이었다.

그러나 경찰은 범인이 조현병을 앓았다며 ‘정신이상자의 묻지마 살인’으로 브리핑했다. 2016년 5월23일 강신명 경찰청장은 “혐오는 의지적 요소가 들어가야 한다”며 “이번 사건은 발생 열흘 전 김씨가 본인이 일하던 장소에서 쫓겨나는 과정에서 여성들이 고자질한 것으로 소위 망상을 하게 돼 피해의식을 느꼈다”고 설명했다. 이어 강 청장은 “김씨는 ‘여성을 혐오하지 않는다’고 밝혔다”며 “실체가 없는 망상으로 인한 범행을 혐오범죄로 보긴 적절치 않다”고 강조했다.

▲ 강남역 10번출구에 붙은 포스트잇. 사진=이치열 기자 truth710@
▲ 강남역 10번출구에 붙은 포스트잇. 사진=이치열 기자 truth710@
“정신병 증상은 사회적 맥락에서 발현된다”

‘조현병 때문에 발생한 사건’이라는 경찰의 결론을 ‘여성혐오 범죄가 아니다’라고 해석하기에는 오류가 있다. ‘조현병’과 ‘여성혐오’는 배타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전혀 다른 유형의 개념이기에, 두 개념이 동시에 겹쳐질 수도 있는 것이다. 조현병 환자라고해서 여성혐오에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오히려 조현병 환자의 망상에 낀 여성혐오는 한국사회의 사회문화적 환경을 비췄다. 배은경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는 “이 사건이 진짜 조현병 증상 때문에 생긴 거라면, 오히려 여성혐오가 작동한 무의식을 잘 보여주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조현병 환자의 망상에도 사회학적 맥락이 들어가 있다. 망상도 인간이 만들어낸 것이기 때문이다. 서천석 정신과전문의 설명에 따르면 정신병 증상은 사회적 맥락에서 발현된다. 과거 권위주의 독재시절에는 많은 조현병 환자들이 환청을 호소하며 중앙정보부가 자신을 미행하고 도청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1980년대 후반에는 CIA가 자신을 미행한다는 망상들이 많았고 2000년대 이후에는 삼성이 소재가 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마찬가지로 여성혐오 의식이 정신병의 증상으로까지 발전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의 무의식에는 사회현상이 들어가기 때문이다. 때문에 서천석 전문의는 “만약 환자의 망상에 여성혐오가 포함돼 있다면 그 심각성을 인정하고, 사회 전반에 이런 의식이 자리 잡지 못하도록 구조적 개혁을 하고 의식의 변화를 추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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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한가지 주목할 점은 가해자가 경찰에서 “여자들이 나를 무시해서 범행을 저질렀다”고 진술한 대목이다. 이나영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는 이 ‘무시’라는 개념이 가해자가 자신도 모르게 여성혐오적 생각을 드러낸 것이라고 분석한다.

“조현병에 시달렸던 피의자는 평소 수많은 남성들로부터 어쩌면 더 많은 무시를 당했을지도 모른다. 모욕감과 수치심도 느꼈을 것이다. 비가시적이나 구조적 차별에 많은 피해를 입었을지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적으로 상대적 약자인 피의자가 ‘평소 여자들이 나를 무시해서’라고 말했다는 사실은 ‘내가 무시해 마땅한 너(여자)마저 감히 나(남자)를 무시해?(너는 나를 무시해선 안된다)’는 생각의 다른 표현이다.”(여성혐오와 젠더차별, 페미니즘-이나영, 2016)

‘강남역 살인사건’이 조현병 환자의 망상으로 인한 묻지마 살인사건이었더라도, 그 망상에는 ‘여성혐오’가 자리 잡고 있었다고 볼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경찰 브리핑 받아쓴 언론, 여성혐오를 지우다

사건 당시 많은 언론이 경찰의 브리핑을 그대로 받아 ‘조현병 환자의 일탈’이라고 보도했다. 해당 프레임은 앞서 지적한 것처럼 한 사건에는 마치 하나의 이유만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하기 때문에 문제다.

조선일보의 ‘강남역 뒤덮은 추모 포스트잇 5000장’(5월20일)과 같은 보도가 대표적이다. 이 기사에서 조선일보는 “추모의 벽의 엄숙한 분위기와는 달리, 일부 극렬 인터넷 커뮤니티에서는 남녀 간에 성별을 비하하는 볼썽사나운 싸움이 벌어졌다”며 표창원 더불어민주당 의원의 “여성 혐오 범죄로 단정하기 어렵다”는 발언을 인용하며 해당 사건이 ‘여성혐오 범죄’가 아님을 강조했다. 이어 조선일보는 경찰이 “(김씨가) 최근 정신분열 약을 복용하지 않아 증세가 악화돼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면서 “여성에게 무시당해 범행을 저질렀다는 범인의 변명에 현혹되면 안 될 것 같다”는 시민의 발언을 인용했다.

▲ 2016년5월20일 조선일보.
▲ 2016년5월20일 조선일보.
‘조현병 환자’만을 강조한 보도는 결국 사건이 ‘여성혐오 범죄’가 아님을 언급하는데 사용됐다. 용의자가 조현병, 남성, 30대, 빈곤층 등 다양한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 만큼 해당 사건은 ‘조현병 환자의 묻지마 살인’이 될 수도, ‘여성혐오 범죄’가 될 수도 있다. 만약 조현병을 가지고 범죄를 설명하는 것이라면 관련 보도에서는 범죄와 조현병의 상관관계나 인과관계를 정교하게 설명했어야 했다. 하지만 언론은 경찰의 브리핑을 그대로 받아쓰는데 그쳤다.

경찰 브리핑을 그대로 보도한 언론들의 또 다른 문제점은 경찰의 모순을 지적하지 않은 것이다. 경찰은 당시 발표 내용과 이어지지 않는 대책을 내놓았다. 당시 경찰은 “여성의 불안감이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다”며 ‘여성 대상 범죄 및 묻지마 범죄를 예방하기 위한 대책’을 발표했다. 경찰이 발표한 대책에는 △6월1일부터 8월31일 3개월 동안 여성범죄대응 특별 치안 활동 △위험인물에 대한 제보 접수 후 순찰 강화 △신변 위협을 받는 여성들에게 위험 상황을 곧바로 알리는 ‘스마트 워치’ 지급이 포함돼 있었다.

“여성혐오 범죄가 아니다”라고 발표한 경찰이 ‘여성 대상 범죄’ 대책을 내놓은 것이다. 모순이다. 물론 경찰은 조현병 환자 등 정신장애인을 격리하는 대책들도 내놓았다. 경찰이 내놓은 대책은 △여성범죄가 아니라고 사건을 규정지으면서 여성 범죄 방지 대책을 내놓은 점 △정신장애인 혐오를 확산하는 대책을 내놓은 점에서 문제가 있다.

만약 경찰이 발표대로 ‘조현병 환자의 묻지마 살인’이라면 대책은 여성뿐 아니라 모든 시민으로 확대돼야 했다. 어쩌면 경찰은 ‘이 사건은 여성혐오 범죄가 아닌데, 여성들은 발표를 믿지 않고 불안해하기 때문에, 여성 대상 범죄 대책을 일단 내놓겠다’고 판단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만약 그렇다면, 여성들이 왜 불안한지를 고려해 최종브리핑을 내놓았어야 했고, 섣불리 “이 범죄는 여성혐오 범죄가 아니다”라고 단정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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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현병’ 강조하며 정신장애인 혐오 강화한 경찰과 언론

또 다른 문제점은 경찰의 브리핑과 대책이 결과적으로 정신장애인의 혐오를 불러일으켰다는 점이다. 경찰은 “이번 사건은 여성혐오 범죄가 아니다”라는 브리핑과 함께 정신장애인 혐오를 조장하는 결과를 만들었다. 정부는 강남역 살인사건 등에 대한 조치로 ‘여성 대상 강력 범죄 및 동기 없는 범죄 종합대책’을 통해 여성 범죄에 대한 대책과 함께 정신질환자에 대한 응급입원 조치 실행, 학교에서 조기에 정신질환을 분류할 수 있는 시스템 마련이라는 장애인 혐오를 조장하는 대책을 발표했다.

언론 역시 이런 경찰의 발표를 그대로 받았고, 정신장애인에 대한 공포를 확산시켰다. ‘묻지마 살인 부른 망상, 국내 50만명 정신분열증 앓고 있다’(뉴스1), ‘국내 10명 중 1명 정신분열증 환자…인권 논란에 관리 어려움’(MBN), ‘정신분열증 환자 관리 더 어려워져…정신보건법은 예방에 역행’(연합뉴스)과 같은 기사가 대표적이다.

심층적 뉴스를 다루는 탐사보도프로그램도 ‘강남역 살인사건’을 보도하면서는 아쉬운 면모를 보였다. 대표적 탐사보도 프로그램 SBS ‘그것이 알고싶다’ 강남역 살인사건편(2016년 6월4일 방영)은 여성혐오범죄를 부정하고 정신장애(조현병)인의 범죄로 규정해 조현병 환자에 대한 전수조사 등의 대책을 내놓은 경찰의 시선을 거르지 않고 그대로 방영했다. 추가적으로 비판적 관점을 보도하지도 않았다.

언론보도와는 다르게 통계는 총범죄자 중 정신장애인 비율이 0.3%(2012년 경찰통계연보)라고 말하고 있다. 경찰과 언론은 해당 사건이 ‘여성혐오 범죄’가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새로운 먹잇감을 찾은 게 아닐까.

▲ 2016년 5월 25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열린 강남역 여성살해사건 추모 참여자 인권침해 공동대응 기자회견. 사진=이치열 기자 truth710@
▲ 2016년 5월 25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열린 강남역 여성살해사건 추모 참여자 인권침해 공동대응 기자회견. 사진=이치열 기자 truth710@
‘페미니즘 열풍’의 시발점 된 강남역 살인사건

강남역 살인사건 이후 등장한 ‘페미니즘 열풍’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언론사가 눈에 띄기도 했다. 한국일보와 경향신문은 당시 ‘강남역 살인사건’을 보도하며 여성혐오 등 페미니즘 개념을 적극적으로 확산시킨 언론으로 꼽을 수 있다. ‘페미사이드’라는 개념을 1면 기사에 등장시킨 한국일보의 ‘극단 치닫는 여성혐오, 무섭지만 굴하지 않겠다’(5월20일) 기사는 대표적 사례중 하나다. 이 기사는 ‘페미사이드’(여성female과 살해homicide의 결합어, 여자라는 이유로 살해당한 것을 규정짓는 단어) 용어를 설명하며 “우연한 결과로 희석돼 온 그간의 페미사이드를 여성 혐오 범죄로 분명하게 가시화하겠다는 여성들의 의지와 연대”를 언급했다. 경향신문 사회부는 강남역 10번 출구에 시민들이 남긴 1004개의 포스트잇을 빼곡히 기록해 책으로 남기는 작업을 진행하기도 했다.

▲ 2016년5월20일 한국일보.
▲ 2016년5월20일 한국일보.
강남역 살인사건은 여성들이 지금까지 자신만 겪는 줄 알았던 개별적 공포와 사건들을 한데 모으는 계기가 됐다. ‘우리에겐 언어가 필요하다’의 저자 이민경 작가는 강남역 살인사건의 의의를 가리켜 “여성혐오범죄, 증오범죄 속 여성 대삼 범죄로 분류될 첫 번째 사건이 강남역 살인사건에 빚지고 있다는데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을 것”이라고 밝혔다. 이민경 작가는 “증오범죄는 인정하지만 여성혐오범죄라는 지칭이 본질을 다룰 수 없다는 가치판단 자체에 여성혐오가 깃들어 있다”며 “이 사건에서 ‘여성’이라는 말을 빼는 것은 존재하는 문제를 직시하지 않으려는 핑계일 뿐”이라고 꼬집었다.

경찰이나 법정의 결론과는 별개로 강남역 살인사건 이후, 논쟁이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한국사회는 ‘여성혐오’라는 개념에 조금 더 익숙해졌다. 물론 여전히 경찰이나 법정은 강남역 살인사건의 동기에서 ‘여성혐오’를 지우고 있다. 대법원은 4월14일 김씨에게 살인죄로 30년 징역을 선고했지만 판결문을 보면 ‘김씨가 여성을 혐오했다기보다 남성을 무서워하는 성격 및 망상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피해의식으로 상대적 약자인 여성을 대상으로 범행했다’고 판단했다. ‘여성혐오’라는 표현에는 선을 그은 것이다.

▲ 2017년5월17일 경향신문.
▲ 2017년5월17일 경향신문.
그러나 변화가 없다고 볼 수 없다. 강남역 살인사건을 계기로 ‘여성혐오’에 대한 담론이 폭발적으로 쏟아져 나왔다. 사건 1주기였던 지난 5월17일 기사를 살펴봐도 이런 흐름을 알 수 있다. 꾸준히 여성혐오와 페미니즘에 관련된 기사를 내온 한국일보와 한겨레, 경향신문은 강남역 살인사건을 계기로 페미니스트가 된 이들을 인터뷰하는 기획기사 등을 실었다. 그 외에도 서울신문 ‘출근길, 난 오늘도 여혐과 마주쳤다’, 국민일보 ‘1년 전 오늘 스러진 여성인권, 아직도 여성은 무섭다’처럼 여성들이 일상에서 맞추지는 공포와 혐오를 인정하는 기사들이 종종 접할 수 있다. 동아일보도 ‘코르셋과 맨박스로부터의 탈피’라는 칼럼을 통해 “강남역 살인사건 이후 여성혐오는 더 이상 개인적 고민의 문제가 아닌 사회적 담론으로 대두됐다”고 강조했다. 

기사 외에도 각종 미디어와 시민단체를 중심으로 여성주의 액티비즘이 매우 활발해졌다. 강남역 10번 출구 운동 등에서 시작해 페미네트워크, 불꽃페미액션, 리벤지포르노(디지털성범죄)아웃, 페미당당, 페미디아 등 다양한 조직을 결성하고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이들은 페미니즘 이슈뿐 아니라 김포공항 청소노동자 투쟁에 연대하는 등 사회이슈와 노동이슈에도 함께 하고 있다. 이 비극적 사건을 계기로 한국사회가 그동안 감추고 지워왔던 ‘여성혐오’가 드러났고 그에 대한 연대가 확장됐으며 그 연대는 지금도 진행 중이다.

▲ 2016년 10월15일 오후 서울 종로구 보신각 앞에서 ‘불꽃페미액션’, ‘페미당당’, ‘강남역 10번 출구’ 등 페미니스트 그룹들과 시민이 보건복지부의 시행 개정안 및 낙태죄를 반대하는 폴란드의 ‘낙태 금지법’ 반대 시위를 모티브로 하는 검은 시위를 하고 있다.ⓒ민중의소리 ⓒ김철수 기자
▲ 2016년 10월15일 오후 서울 종로구 보신각 앞에서 ‘불꽃페미액션’, ‘페미당당’, ‘강남역 10번 출구’ 등 페미니스트 그룹들과 시민이 보건복지부의 시행 개정안 및 낙태죄를 반대하는 폴란드의 ‘낙태 금지법’ 반대 시위를 모티브로 하는 검은 시위를 하고 있다.ⓒ민중의소리 ⓒ김철수 기자
이렇게 ‘강남역 살인사건’에서 여성혐오 담론을 지우려던 수많은 시도들은 사후적으로, 사실상 실패한 게 아닐까. 

참고문헌

‘뉴스의 배경’-조영주, 2016
‘우리에게도 언어가 필요하다: 입이 트이는 페미니즘’-이민경, 2016
‘나는 세상을 리셋하고 싶습니다’-엄기호, 2016
‘대한민국 넷페미사’-권김현영, 손희정, 박은하, 이민경, 2016
‘여성혐오 젠더차별, 페미니즘’-이나영,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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