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엔 ‘관광’도 겸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일본에서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김혜원 선생은 ‘내가 왜 이런 데 스스로 뛰어들었나’ 후회도 하고 큰 파도더미를 짊어진 듯 마음이 무거웠다고 했다. 1988년 2월 ‘정신대’의 흔적을 찾아 일본 오키나와에서 삿포로까지 일본열도를 종단한 세 사람은 윤정옥, 김신실, 김혜원이었다. 윤정옥은 당시 이화여대 교수였고 김신실, 김혜원은 한국교회여성연합회(한교여연) 소속 활동가들이었다.

말하자면 이 답사활동은 위안부 문제를 조사하기 위한 한국 여성단체의 첫걸음이었다. 그 결과물은 1988년 4월 한교여연 주최의 국제세미나(여성과 관광문화)에서 발표됐고, 윤정옥 교수가 1990년 한겨레신문에 연재한 ‘정신대 취재기’의 토대가 됐다.

한교여연은 7개 개신교 교단의 여성을 회원으로 하는 초교파(에큐메니칼) 활동 단체로, 엄혹하던 박정희 시절인 진보적 여성운동의 산실이었다. 한교여연은 70년대에 일본의 강제동원 원폭 피해자 관련 실태조사와 지원을 했고 일본의 기생관광 문제에도 꾸준히 관심을 기울였다.

한교여연이 정신대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한 것은 1984년부터다. 그해 8월 전두환의 방일을 앞두고 한교여연과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여성위원회가 공동으로 서한을 보내 “양국이 우호관계를 맺으려면 조속히 타결해야 할 문제로 여자정신대 문제에 대해 일본은 사죄해야 한다” “이대로 묵과할 수는 없다. 꼭 사과를 받아야 한다”는 등의 내용을 전달했다.

▲ 6월 2일 김혜원 선생이 미디어오늘과 인터뷰하고 있다. 사진=이치열 기자 truth710@
▲ 6월 2일 김혜원 선생이 미디어오늘과 인터뷰하고 있다. 사진=이치열 기자 truth710@

김혜원은 한교여연으로부터 인연이 닿은 정대협 1세대 활동가다. 그는 20여년간 관련 활동하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운동의 토대를 닦았다.

“남편 모르게 모아놓은 50만원으로, 88년엔 큰 돈이에요, 이거면 되겠지 하고 갔어요. 오키나와 부둣가 민박집 같은 데서 자고 편의점에서 삼각김밥 사먹고 했죠. 가서 생각지도 못한 큰 파도더미를 짊어지고 온거에요. 가는 곳마다, 너무 가슴이 아파. 김일면 선생(재일교포, 위안부 문제 연구자)을 만나서 들은 얘기도 그렇고. 내가 편히 살 걸, 왜 이런데 스스로 나방이 불에 뛰어들 듯 들었을까. 귀국 비행기 안에서 굉장히 고민하고 그랬어요. 그리고 고난의 한가운데에 합류하기로 마음을 굳혔어요.”

정대협 결성으로 가는 계기는 윤정옥 교수와 한교여연의 만남이었다. 1987년 12월 당시 한국여성단체연합 대표이자 한교여연에서 평화통일위원을 겸직하고 있던 이효재 선생이 다리를 놨다. 윤영애 당시 한교여연 총무는 어느날 이효재 선생이 찾아와 “친구(윤정옥)가 이 문제에 대해 오랫동안 연구하고 현지도 방문하고 했지만 혼자서 이 엄청난 일을 한다는 것은 역부족”이라며 윤정옥 교수를 만나볼 것을 권유했다고 전하고 있다.(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20년사. 한울)

김혜원은 윤영애 씨에 대해 “이 운동의 큰 공로자”라며 “한교여연 총무로 있으면서 이 모든 걸 기획했다. 조사단 파견도 그렇고 교여연 안에다 정대협이 사무실을 만들고 신고전화를 개설하고 이걸 모두 기획하고 추진한 게 윤영애씨”라고 말했다.

“나도 그땐 정신대 문제가 이렇게 심각한 건지도 몰랐죠. 이런 문제는 국가가 조사하고 역사가들이 해야 할 일이지, 무슨 우리같이 힘없는 민간단체 몇 사람이서…감히 꿈도 못꿨죠. 그런데 윤영애, 이 분이 열정을 다 해 추진한 거에요. 그래서 나도 거기 끌려들어간거죠.”

정대협은 윤정옥이 만든 정신대연구회와 한교여연이 중심이 되어 여성단체연합회 소속 총 37의 여성단체가 참여해 1990년 11월16일 결성됐다.

정대협 결성 당시엔 NGO들도 민주화운동과 다른 인권 문제들로 인해 손을 내밀 수 없는 상황이었다고 한다. 그런 가운데 한교여연이 터전이 됐고 김혜원을 비롯한 활동가들도 자비를 털어 운동에 매진했다. 정대협에서 ‘복지위원장’을 했던 그는 일본군 위안소로부터 가까스로 살아돌아온 후에도 힘들고 외롭기만 했던 할머니들의 모습에 안타까워했다.

“예산도 아무것도 없었어요. 그 때 할머니들이 생계, 주거, 질병 문제 이런 게 아주 바닥이었잖아요. 할머니들의 아픈 상처들을 어루만져줘야 되는 일인데 기껏 할머니들 어디 아프시면 고기라도 좀 사들고 방문하고 그런 일이었어요. 김학순 할머니가 그때 창신동 사셨는데 천식이 심하셨어요. 찾아가보면 늘 방이 싸늘했어요.”

정대협의 초창기 모습도 그랬다. 지금은 시민모금을 통해 작지만 ‘전쟁과여성인권박물관’과 함께 어엿한 사무실을 꾸리고 있지만, 초기엔 사무실 한 칸을 마련하지 못해 몇 달마다 이사를 다녀야했다. 처음엔 정동 구세군회관 별관 1층의 좁은 교여연 사무실 한켠에 신고전화 한 대를 놓은 게 전부였다. 김학순 할머니의 첫 증언 이후 일이 넘쳐나자 정대협은 전화기 한대만 다시 들고 김혜원 씨의 남편인 박일재 변호사의 사무실로 옮겼고 다시 3개월 후엔 마포구 아현동에 있는 ‘여성사회문제연구소’에 딸린 작은 방 하나를 마련했다. 장충동 ‘여성평화의 집’ 내의 지하사무실로 입주하는 93년 가을까지, 제대로 된 사무실 하나를 마련하는데만 3년이 걸린 셈이다.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운동은 초기 정대협 활동가들의 열정과 헌신에 의해서만 만들어질 수 있었다.

“이 운동을 멈출 수가 없죠. 비록 우리 1세대는 다 이렇게 늙어버렸지만, 수요집회에 가끔 나가면 희망을 가져요. 어린 학생들이 와서 그 자리를 아직도 지키고 있다는 것, 은폐된 진실은 반드시 밝혀져야 한다는 희망이죠. 지난 겨울에 소녀상을 지킨다고 강추위에 스티로폼 하나로 앉아있는 학생들을 보고 눈물을 흘렸네요. 짓밟힌 진실을, 역사를 찾겠다는 우리의 얼이 아직도 저렇게 뜨겁구나. 일본은 계속해서 진실 앞에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지만 그래도 이 과정을 통해서 우리 국민들이 깨어나면 영원히 발뺌할 수는 없을 거다. 일본도 언젠가는 변하지 않을까. 그런 희망을 갖죠.”

▲ 사진=이치열 기자 truth710@
▲ 사진=이치열 기자 truth710@

연재순서

④ 국제사회에서 일본을 고립시킨 2개의 보고서

③-2 슬프지만 슬프지 않게, 화나지만 화난 표정이 아닌

③“부러진 뼈는 신경쓰지 않고 성병검진만 했다”

②-2 “혼자 울 때 불어온 바람이, 위안부의 원혼으로 느껴졌다”

② 위안부로 끌려간 열일곱살 박영심의 기록

①-2“사냥감은 13세, 14세의 소녀들이었다”

① 한 노(老)교수의 기획기사가 세계를 뒤흔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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