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N(국제연합)에선 지금도 일본의 전시성노예 제도에 대한 사죄와 국가배상 조치를 촉구하는 목소리가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아베 신조-박근혜 정부 간 한일 위안부 합의에 대해서도, UN은 합의가 충분치 못하며 피해자 구제에도 미흡하다며 재협상을 권고하기도 했다.

위안부 문제에 대한 UN과 국제사회의 기준은 두 개의 보고서를 통해 정립됐다고 볼 수 있다. 즉 1996년 유엔 인권위에서 채택된 라디카 쿠마라스와미 보고서와 1998년 유엔 인권소위에서 채택된 게이 맥두걸의 보고서가 그것이다.

이 두 보고서가 채택되기까지는, 정대협 및 정대협과 함께 위안부 문제에 관심을 기울여온 국제 NGO 활동가들의 노력이 있었음은 물론이다. UN에서 관련 결의안 하나가 나오는 과정만 보더라도, 이는 해당 사안의 정당성 뿐만 아니라 관련국의 외교력이 크게 작용하기 때문에 ‘일본’이라는 막강한 나라가 UN에서 수세에 몰리게 된 것은 정대협과 국제 NGO 측의 적잖은 성공이라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초기 정대협에 있어서 UN은 그저 머나먼 나라 이야기였다. 정대협 1기 활동가인 김혜원 선생은 그의 책 ‘딸들의 이야기’에서 이렇게 풀어놓고 있다.

정대협이 국제무대의 문을 두드려 볼 수는 없을까 고민을 하던 1992년 무렵, 일본의 시민단체들은 ‘일본정부는 국내 여론보다는 외국 특히 구미 쪽의 여론에 민감하다’는 귀띔을 해줬다. 1992년 2월 정대협 공동대표인 이효재 선생이 조카 결혼식 참석차 미국 방문을 앞두고 있었는데, 이 방문길은 위안부 문제가 유엔으로 가는 길이 됐다. 이효재는 먼저 LA에서 조카 결혼식에 참석한 후 뉴욕으로 가서 교포들과 미국 신문 기자들에게 얼마 전 만난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의 얘기를 했고, 제자인 신혜수(전 정대협 국제협력위원장, 현 유엔 경제적사회적문화적 권리위원회 위원)의 소개로 샬럿 번치(Charlotte Bunch) 럿거스대 교수를 만나게 됐다. 국제적인 인권운동가인 번치 교수는 이효재 대표 일행을 UN인권센터의 뉴욕 연락관에게 소개했고 그로부터 유엔에 위안부 문제를 제안하기 위한 많은 조언을 얻었다.

▲ 1995년 방한한 라디카 쿠마라스와미 특별보고관과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 사진=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 1995년 방한한 라디카 쿠마라스와미 특별보고관과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 사진=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몇 차례의 실패에도 이 방문길에 이효재 대표 일행은 UN인권위로 편지를 보냈고, 이후 도움을 주게 될 인권변호사 도츠카 에츠로(고베 대학 국제법 교수)와의 인연도 이 때 맺었다. 도츠카 변호사는 UN이라는 낯선 무대에서 정대협이 언론사를 상대하고 설명회를 할 수 있도록 도움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일본인이면서도 이 문제해결을 위해 정대협과 협력하고 헌신해 준 많은 일본인들 가운데서도 잊지 못할 사람”이라고 김혜원은 말한다.

성노예제에 대한 기준 확립한 게이 맥두걸 보고서

그해 2월 도츠카 에츠로 교수는 제48차 유엔 인권위에서 일본군의 위안부 강제연행 문제를 제기했고 이를 국제적으로 해결해야 할 필요성을 알렸다. 이후 정대협 등은 1503절차(기본적 자유와 인권의 심각한 침해가 지속적으로 발생하는 상황에 대한 통보)에 의해 피해자 개인에 대한 보상 등을 요구하는 통보를 제출했고, 이에 92년 5월 유엔 인권 소위의 ‘현대 노예제부회’는 이 문제에 관한 정보를 특별보고관에게 제출하도록 유엔 사무국 총장에 요청하는 보고를 채택했다. 이것이 위안부 문제와 관련한 유엔의 첫 움직임이었다.

정대협이 유엔에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 것은 92년 8월이었다. 당시 정대협 국제협력위원장을 맡고 있던 신혜수는 세계교회협의회(WCC)의 자격을 빌려 인권소위에 참석, 위안부 문제의 실상을 고발했다. 이 자리에 황금주 할머니와 이효재 대표, 정진성(당시 정대협 진상규명위원장) 대표도 참석했다.

정대협은 두 개의 구두발언을 했고 기자회견과 NGO 설명회를 열었다. 또한 특별보고관인 반 보벤을 한국에 초청하는 성과도 거뒀다.

93년 8월 인권소위원회는 전시 노예제에 관한 결의를 채택하여, ‘전쟁 중의 조직적인 강간, 성 노예제 및 그와 유사한 관행’에 대한 특별보고관으로 린다 차베즈를 임명했다. 린다 차베즈의 1차 보고서는 1996년 8월에 제출되어 조직적 강간에 대한 국제법적 규범과, 국가 및 개인의 책임, 배상 문제 등의 내용을 담았다.

이듬해인 1994년 8월 열린 46차 유엔인권소위의 최대 관심사는 바로 일본의 성 노예 문제였다. 인권소위는 ‘불처벌 문제’ 특별 보고관에 대해 이 문제를 연구하도록 요청하는 결의를 채택했다.

1998년엔 인권소위 특별보고관인 게이 맥두걸이 ‘전시 조직적 강간, 성노예, 노예적 취급 관행에 관한 특별 보고서’를 제출했다. 게이 맥두걸 보고서는 특별보고관으로 임명된 린다 차베즈가 중간에 사임하면서 다소 지연되어 맥두걸 보고서로 나온 것이었다. 이 보고서는 일본측이 내세운 국민기금에 따른 보상 등의 조치는 도의적인 것에 불과하다고 규정하고, 일본 정부의 배상 책임과 가해자 개인의 형사책임을 물어 매우 중요한 진전을 이뤄냈다.

이후에도 인권소위는 2008년 인권이사회자문위원회로 개편되기 전까지 매년 ‘조직적 강간, 성노예제 및 유사 노예제’에 대한 실태 조사보고서를 제출했다.

일본의 성노예 범죄를 규명한 라디카 쿠마라스와미 보고서

▲ 1992년 1월8일 일본 대사관 앞에서 열린 첫 수요시위. 사진=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 1992년 1월8일 일본 대사관 앞에서 열린 첫 수요시위. 사진=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전문가 위원으로 구성되는 유엔 인권소위와 함께, 국가가 위원이 되는 유엔 인권위에서도 관련 절차가 진행됐다.

1994년 1월부터 3월까지 열린 유엔 인권위원회는 일본군의 성노예 범죄에 대한 책임자 처벌 요구를 최초로 제기했다. 이는 일본 정부를 매우 당혹스럽게 했던 것으로 당시의 일본 신문들도 보도하고 있다.

이 50차 유엔 인권위원회에선 여성 폭력 특별 보고관이라는 자리가 신설됐고, 여기에 스리랑카의 변호사 라디카 쿠마라스와미가 임명됐다. 이 특별보고관의 임기는 3년으로 여성 폭력 문제를 조사 연구하여 매년 인권위에 보고하도록 했다. 정대협이 여성로비팀의 일원으로 파견한 신혜수는 이 50차 인권위의 결의안을 초안하는 과정에 참여했다. 또한 신혜수는 스리랑카로 날아가 쿠마라스와미 변호사에게 위안부 문제를 조사해줄 것을 요청했다.

쿠마라스와미는 95년 한국과 북한, 일본에서 실태 조사를 진행했고 96년 4월 유엔 인권위에서 보고서가 채택됐다. 일본 정부는 보고서 채택이 무산되도록 총력을 기울였다. 일본 정부는 주요국 외무장관에게 특별보고관에 대한 인신공격까지 담은 50쪽 분량의 문건을 보냈다가 회원국들과 인권단체들로부터 비판을 받고 사과하기도 했다. 유엔 인권위는 보고서를 채택하며 회원국간의 역학관계에 의해 ‘welcome’(환영하다)이 아닌 ‘take note’(유의하다)로 그 수위를 낮추긴 했으나 52대1이라는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다.

쿠마라스와미 보고서는 일본의 성노예 문제에 대한 사죄와 국가배상을 권고한 유엔의 공식보고서로서, 정대협의 국제활동이 이룩한 쾌거였다. 쿠마라스와미 보고서는 마지막 권고에서 총 6개항의 위안부 문제 해결 기준을 제시하고 있다.

첫째, 일본 제국군대에 의해 설치된 위안소제도가 국제법 위반이었음을 인정하고 법적 책임을 수용할 것. 둘째, 군 성노예제도의 피해자 개개인에 대해 특별보고관이 제시한 원칙에 따라 배상하고, 특별 행정 법정을 단기간 내에 설치할 것. 셋째, 일본 제국군대의 위안소 관련 활동에 대한 모든 문서 및 자료를 공개할 것. 넷째, 피해자로 입증된 여성 개개인에 대해, 문서로 공적인 사죄를 할 것. 다섯째, 역사적 사실을 반영하도록 교육 과정을 개편하여, 이 문제에 대한 인식을 높일 것. 여섯째, 위안부의 징집 및 위안소의 제도화에 관여한 범행자를 찾아내 처벌할 것 등이다.

또한 국제사회에 제시한 권고는 다음과 같다. 첫째, 비정부단체(NGO)들은, 유엔 내에서 이 문제를 계속 제기할 것과 국제사법재판소 또는 상설중재재판소의 의견을 구하는 시도를 할 것. 둘째, 북한 정부와 한국 정부는 일본의 배상 책임 및 지불에 관한 법적 문제를 국제사법재판소에 청구하는 것을 고려할 것. 셋째, 일본 정부는 생존여성이 고령이라는 사실 및 1995년이 제2차 세계대전 종전 50주년임에 유의하여, 가능한 빠른 시일 내 행동을 취할 것 등이었다.

맥두걸 보고서와 쿠마라스와미 보고서는 일본의 성노예 범죄와 책임불이행의 문제를 유엔의 공식 문서로 규정했다는 데 중대한 의의가 있다.

연재순서

③-2 슬프지만 슬프지 않게, 화나지만 화난 표정이 아닌

③“부러진 뼈는 신경쓰지 않고 성병검진만 했다”

②-2 “혼자 울 때 불어온 바람이, 위안부의 원혼으로 느껴졌다”

② 위안부로 끌려간 열일곱살 박영심의 기록

①-2“사냥감은 13세, 14세의 소녀들이었다”

① 한 노(老)교수의 기획기사가 세계를 뒤흔들다

저작권자 © 미디어오늘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