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담과 이브, 그리고 쾌락주의로 매도되어 가끔씩 욕도 먹는 에피쿠로스. 이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바로 인류 최초로 “그것”의 중요성을 알았다는 점이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라면 신의 세계에 속한 아담과 이브는 최초로 그것을 알았고, 인간 세계에 속한 철학자로선 에피쿠로스가 그것의 의미를 최초로 깨달았다. 여기서 말하는 그것이란? 답은 쉽다. 예컨대 독일처럼 4주간 휴가를 간다고 상상해보라. 당신이 꿈에 그리던 휴양지에서 아무것도 안하고 하루 종일 게으름을 피우며 멍때리거나 마음껏 논다고 생각해 보라. 천국이 따로 없다고 느끼지 않을까. 이것이 “그것”이다. 고된 일에서 벗어나 마음 가는대로 지내는 상태다.

요즘 언론을 장식하는 화두 가운데 하나는 4차 산업혁명이 일자리를 빼앗지 않나 하는 것이다. 여기 답하기 전에 저 천국의 이야기를 좀더 해보자. 아무 생각 없이 쉬거나 놀고 나면 사람은 어떤 상태에 이르게 될까. 잠도 실컷 자고, 책도 들추어보다가 맥주도 좀 마셔보다가 어느 순간 점차 지루함을 느끼게 된다. 결국 무언가 새로운 것을 “만들어” 볼까 생각하게 되는 게 인간 상식이라면 상식이다. 이때 나타나는 창조 욕구는 매우 강렬하다. 그것이 예컨대 권력에의 의지든, 더 잘 쉬기 위해 새로운 어떤 것을 만드는 의지든 그 강렬한 욕구가 역사를 만들어왔다. 일생동안 휴양지에서 일하지 않고 놀고자 하는 사람도 물론 있겠다. 그러나 “지금, 여기”보다 “일보전진”이 역사의 진정한 내용이라는 점은 정말 “역사”가 잘 보여준다. 노동에의 욕구가 역사를 창조해왔다.

그런데 이 자본주의의 시대에 모든 노동이 정당한 대가를 받을까. 예컨대 지금으로부터 40여 년 전, 세계를 변혁시키겠다는 일념으로 주차장에 처박혀 컴퓨터를 만든 사람이 있다면, 훗날 돈방석에 앉았을진 몰라도, 당시 그의 노동은 가치를 인정받았을까. 지난 90년대 UNIX 같은 개방형 운영체계를 만든 프로그래머에겐, 또 비트코인(Bitcoin)의 기반인 블록체인(BlockChain)을 개발한 익명의 설계자에겐 정당한 경제적 가치가 주어졌을까.

이 노동의 문제에서 늘 평행선을 타는 진보와 보수가 오랜만에 한마음이 되는 지점이 있다. 바로 로봇이 일자리를 빼앗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이다. 이는 사실 오래된 것이지만, 요즘 4차 산업혁명의 이름으로 더 증폭되고 있다. 인공지능(AI)이 스스로 발전하면 인간은 몇 가지 고급노동만 하게 될 것이라든가, 네일아트, 문신디자이너, 바리스타 또는 웹디자이너와 같은 저급노동은 사라질 것이라는 두려움이다.

하지만 이는 기우에 불과하다. 이런 류의 저급 노동들은 앞서 언급한 컴퓨터·디지털 노동들처럼 한때 가치를 별로 인정받지 못했었다. 이 노동들은 그러나, 부가 축적되고 경제적 여유와 힐링의 시간 늘어나면서 나타난 새로운 욕구로 인해 “돈을 벌 수 있는 노동”으로 격상된 것이다. “천국”에 있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생긴 창조욕구는 더 많은 종류의 노동을 만들어냈다.

그런데도, 로봇이 노동을 대체하고 3D 프린터가 건물을 거의 공짜로 찍어내는, 이 테크놀러지의 시대를 맞이하여 저급직종은 물론 언론사 기자, 법원판사 같은 고급직종마저 사라질 판인데 무슨 소리인가 하는 반문에는 제레미 리프킨(Jeremy Rifkin)의 응답이 적격이겠다. 이 걸출한 경제학자에 따르면 앞으로는 정신의 만족을 추구하는 노동이 가치를 얻게 된다. 예컨대 예술인의, 어찌보면 궁상맞은 창작활동 같은 지불되지 않는 노동, 다시 말해 부불노동에도 정당한 대가가 주어질 수 있다는 말씀이다. 그의 저서 <공감의 시대>에서는 공감능력도 중요한 것으로 나타나는데, 이 또한 합당한 경제적 대가를 받게 된다. 정신적 만족은 미래 노동의 내용이요 공감은 형식이 되는 셈이다.

다소 거창하게 리프킨을 인용했지만, 사실 이는 이미 현실이다. 정신 힐링과 공감능력은 오늘 상품이 되고 산업이 되어 경제적 가치를 창출하고 있다. 철학과 심리학은 유래없는 대중적 호황을 누리고 있다. 예전 같으면 상상도 못했을, 인문학으로 돈을 버는 시대다. 힐링을 위해서라면 달나라 여행에 기꺼이 돈을 쓰겠다는 사람을 위한 달여행 상품도 있다. 동물과 공감하는 노동, 예컨대 강아지 잘 쓰다듬어주기도 어쩌면 하나의 직종이 될 수 있겠다.

4차 산업혁명의 문제는 그래서 일자리 상실보다는 외려 지식권력의 독점에 있는지 모른다. 페이스북(Facebook), 구글(Google), 에어비앤비(AirBnb), 우버(Uber) 등 혁신능력과 돈을 갖고 있는 소수 거대 기업의 독점은 이제 “국가”의 지식 관리 능력을 넘어서기 시작했다. IT 칼럼니스트 에브게니 모로조프(Evgeny Morozov)는 얼마전 독일 언론에 기고한 글에서 이 현상을 “디지털 봉건주의”라고 불렀다. 로봇이든 AI를 만들든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 지식정보가 필요하면, 이 영주들에게 의존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전통적으로 지식 관리를 담당하던 국가가 기업에게 자리를 내주고 있지만, 이에 대한 깊은 논의는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천국에서 지내고 싶은 인간의 욕구는 어떤 기계도 충족시켜주지 못한다. 노동이 새로운 욕구를 채우기 위한 밥이라면 기술은 반찬 같은 것이다. ATM 기계가 등장할 당시 은행직원들은 실직의 공포를 느꼈었다. 그러나 은행업무의 디지털화는 외려 더 질 좋은 고객상담이라는 새로운 욕구를 만들어냈다. 반전도 이만하면 역대급 반전이다. 더구나 100여 년 전보다 더 발전된 오늘의 기술사회에서 새로운 일자리는 더 늘었다. 기술이 발전할수록 일자리는 늘어나면 늘어났지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니 이제 4차 산업혁명에 관한 논의에서 일자리의 소멸에 대한 두려움은 그만 접어도 된다. 영원한 것은 천국의 노동이요, 사라질 것은 기술 디스토피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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