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면 사과할텐데, 인간이 아니니까 사과 안하는 것 아니겠나요. 인간이 아닌 이들이 이렇게 저렇게 하는 것 신경쓰고 싶지 않습니다. 자기들이 안한다고 하면 어쩌겠어요. 감옥만 가면 됩니다. 정말 사과하려는 마음이 있었다면 이미 했지 않겠나요.”

쏟아낸 단어들만 놓고 보면 격한 슬픔과 분노의 감정이 표정에서 읽힐만도 했다. 인터뷰 내내 백남기 농민의 장녀인 백도라지씨가 2015년 이후 벌어진 사건들을 회상하는 표정은 의연했다. 당시 책임자·관계자들과 오랜 기간 맞서 온 백도라지씨는 여전히 당당한 모습이었다.

백도라지씨는 지금도 아버지를 앗아간 경찰과 서울대병원 등의 부담함을 질타하는 싸움에 일상의 일부를 할애하고 있었다. 그는 담담하게, 그러나 당당하게 경찰의 부당한 공권력 행사에 대한 비판을 이어갔다. 서울 중구 명동의 한 카페에서 지난 29일 오후 7시 경 백도라지씨를 만났다.

-요즘 어떻게 지내고 계시는지 궁금하다.

“민사재판 등을 진행 중인데 변론이 두 달에 한 번 씩은 열리고 있어서 출석하고 있다. 경찰 과 병원 상대로 소송을 진행 중이다. 사망진단서는 어쨌든 잘못 썼고 그것이 부검 영장의 빌미가 됐으며 이 때문에 장례가 늦춰지기도 했다. 관련해서 서울대병원에 대한 소송도 진행 중이다. 대한민국 정부를 대상으로 하고 있는 소송은 지난해 3월 말 즈음 소장을 접수했다. 헌법재판소를 대상으로도 물대포 직사 살수와 물대포 운용 지침에 대해 헌법소원을 낸 상태다.

▲ 고 백남기 농민의 장녀 백도라지 씨. 사진=이치열 기자 truth710@
▲ 고 백남기 농민의 장녀 백도라지 씨. 사진=이치열 기자 truth710@

(편집자주: 유족들과 전국농민회총연맹 등은 강신명 전 경찰청장과 구은수 전 서울경찰청장 등 경찰 7명을 살인미수 혐의로 검찰에 고발했다. 지난해 3월에는 대한민국과 강신명 전 경찰청장, 구은수 전 서울청장 등을 상대로도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했다. 서울대병원과 당시 사망진단서를 작성한 백선하 교수를 상대로 손해배상청구 소송도 제기해 진행 중이다. 이외에도 김세의 MBC 기자와 만화가 윤서인씨, 장기정 자유청년연합대표 등도 명예훼손으로 고소했다. 유족들은 또한 서창석 서울대병원 원장을 백씨 사망 전후로 병세 등을 청와대에 보고하고 대응책을 협의했다는 의혹이 있다며 의료법 위반으로 특검에 고소한 바 있다.)”

-아직 백남기 농민에 대한 사망신고를 하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다.

“사망진단서에 병사로 기록돼있지 않나. 돌아가신 이유를 병이라고 하니까 이걸 정정하고 신고하려고 한다. 사망신고 자체는 아버지는 돌아가셨으니 언제 하건 상관이 없는건데, 기왕 신고하는거면 고쳐서 하자는 것이다. 서울대병원에 (외부 충격에 의한 사망을 의미하는 외인사가 아닌 병사로 사인을 기록한) 잘못된 것을 고치라는 차원이다. 병원에서는 당시 주치의였던 백선하 교수가 (병사를 외인사로) 고치지 않으면 (최종사망신고 병사기록을) 못 고친다는 입장이다. 검찰이 만약 수사결과에서 외적 요인에 의해 돌아가셨다고 결론을 내리면 우길 수 없지 않을까.”

-아버님은 어떤 분이셨는지.

“80~90년대 중반까지 농민회 활동을 활발하게 하셨다. 그 이후에는 계속 회원이긴 했지만 주로 우리밀 살리기 운동 쪽으로 방향을 바꾸셨다. 가톨릭농민회가 (농민 운동의) 주축이었는데 전국농민회총연맹이 생기면서 생명운동과 농촌살리기 운동으로 방향을 바꾸셨다고 하더라. 다만 그 이후로는 크게 활동을 안하시긴 했다. 제가 학교 들어가기 전, 어디서 집회 있다고 하면 형사가 집에 와서 (아버지가) 집회 못가게 집 지키고 있고, 일 도와주겠다며 옆에서 같이 일하기도 했다. 아버지는 회를 좋아하지도 않는데 같이 회 먹으러 가자며 태워서 멀리 데리고 가기도 했다. 아마 자기들이 먹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 이후에는 집회같은 것은 거의 안나가고 가끔 한 번씩 전국에서 버스대절해서 참여하는 큰 집회가 있을 때 가셨다. (2015년 민중총궐기에도) 사실은 안 가시려고 했다. 그때도 주변에서 가자고 해서 간거였다. 나이 든 사람들이 앞에 나서지 않고 길을 비켜줘야 한다고 생각하셨다. 그래야 후배들이 잘 할 수 있다는 거다. 근데 그날은 가서 머리수나 채워주자고 (주변에서) 가자고 하니까, 그럼 한번 가볼까 하고 가신거다. 그런 부탁 받으면 거절을 못하신다. 가서 (후배들) 뒤에서 징치고 꽹가리 쳐주자고 했을 것이다. 전날 새벽에 밀 파종도 다 끝났고, 파종도 끝났으니 함께 가보자고 하니 갔다고 하더라. 아마 그런 일이 있으리라고는 생각을 못했을 것이다. 그렇게 심하게 진압하는 건 80년대나 있던 일 아닌가. 그때는 겪어보셨으니까 최근 집회는 그 정도로 심하지 않겠지라는 생각했을 거다.”

▲ 고 백남기 농민의 장녀 백도라지 씨. 사진=이치열 기자 truth710@
▲ 고 백남기 농민의 장녀 백도라지 씨. 사진=이치열 기자 truth710@

-그날 현장에서 경찰의 살수차가 직사를 했다는 사실도 밝혀지긴 했지만 아직 밝혀지지 않은 점들이 많다.

“청문감사보고서를 청문회에서도 공개하지 않았다. 민사소송 과정에서도 그날 사건 발생 직후 사람들이 진술한 내용이 담겨있기 때문에 그날의 전모를 파악하는데 중요한 자료이니까 제출하라고 법원이 명령했는데 경찰청이 (제출 안하고 법원 명령에 불복해) 즉시 항고했다.

(아버지가 민중총궐기 당시 물대포를 맞던 당시) 영상이라든가 여러 각도에서 찍은 사진들도 있고, 여러 자료들이 충분히 있다. 살수차 내부에서 찍은 CCTV 영상도 있고 반대편 살수차에서 바라본 영상이나 모의영상 자료도 있다. 법정에서는 그런 자료를 바탕으로 고의가 있는지 과실치사인지를 밝혀야 한다. 이걸 밝히기 위해서는 청문보고서가 있어야 한다. 법원에 나와서 (관련자들이 직접) 증언한게 아니기 때문에 (증언 내용을) 알려면 청문 보고서가 있어야 한다. 검찰에서도 수사를 진행했다고 하는데 어느 정도 진행됐는지 모르겠고 진술 확보가 됐는지도 모르겠다.”

-백남기 농민 사망 전후 부검과 사인을 둘러싼 논쟁도 벌어졌다.

“(경찰에서) 부검한다는 얘기는 돌아가시기 전부터 나왔다. 어머니가 백선하 교수를 찾아가 부검이 외부적 요인에 의해 돌아가신거라고 사인을 써달라고 했는데 거절하기도 했다. 돌아가신 날이 일요일(2016년9월25일)이었는데, 토요일에 병원에서 전화가 왔다. 오전까지도 병원에 가 있다가 집에 왔고, 다시 병원을 가려고 지하철을 타고 있었다. 그때 전화가 왔는데 위독하다고 했다. 아빠 상태가, 뇌가 제 기능을 못하는 상태였고 그러다보니 장기에 무리가 갔다. 초반부터 장기부전이 있었는데 소변을 못 보면 하나의 신호라고 병원에서 얘기하더라. 임종이 가까워온다는 하나의 신호. 그날 병원에서 전화를 걸어, 보통 이뇨제를 쓰면 반응이 오는데 이제는 써도 반응이 안 오는 단계라고 얘기를 했다.

병원에 도착했는데 그때부터 사복경찰들이 왔다갔다 하더라. 사람들이 SNS를 통해 (소식 전해듣고) 모여들고 병원 복도에서 아무데나 누워서 자고 아버지를 지키겠다고 버텼다. 돌아가신 날은 경찰들이 방패로 사람 밀고 해서 겨우겨우 장례식장으로 들어왔다. 경찰은 우리보다 더 먼저 (아버지가 위독하신 상황을) 알고 있었다. 병원에서 연락이 온 다음에 백남기투쟁본부에 상황을 전달하는데, 항상 경찰에서 연락이 먼저 온 다음에 우리가 연락을 한다고 하더라. 서창석 서울대병원장이 청와대에 보고한다는 얘기도 있었고, 누가 어떻게 알려줬다는 물증은 없지만 뭔가 통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후에 검안(시신의 외관상태를 살피는 작업)이 이뤄졌고, 외부적인 요인에 의한 것이 98% 정도라고 했다. 다만 그걸(외부 충격에 의한 사망이라는 사실) 확실하게 한다며 굳이 부검이 필요하다고 병원 쪽에서 말했던건데 그 이후에는 (검안 결과 등에 대해) 이렇다할 설명을 들은 것은 없었다.

(백남기 농민 사망사건은) 이화여대 건과 비슷했던 것 같다. 거기서 (촛불이) 시작됐고 (이화여대 입시비리처럼) 최순실의 입김으로 좌지우지됐던 것도 있었다. 부검 영장 집행 전날에 촛불집회가 터졌는데 그 때문에 경찰이 밀어붙이지 못한 것도 있는 것 같다.”

-문재인 정부가 백남기 농민 사망사건 진상규명에 전향적인 모습을 보여줄 것이라는 기대도 클 것 같다. 문 대통령이 5.18 기념식 때 유족들과 대화도 나눴고 그 이전에도 따로 병원에 와서 얘기를 나눴던 것으로 알고 있다.

“5.18 기념식 때는 따로 약속을 잡고 만난 건 아니었다. 기다리고 계시다가 (문재인 대통령이) 지나가던 길에서 한참 어머니와 얘기를 나눴다. 빨리 해결됐으면 좋겠다고 얘기를 나눴다고 알고 있다. 지난해 총선 전에도 왔다 갔는데 (당시 문 대통령은) 해결 주체도 아니어서 어떻게 할 수 있다고 말한 건 아니었고 해결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 정도였다.

(민주당에서 만든 새정부 개혁과제 보고서에) 10대 개혁과제 중 하나로 포함됐다고 해도 결국 (진상조사를 위해서는) 기다려야 한다. 들어선지 한 달도 안된 정부인데 새정부가 됐다고 해서 해결된다고 보기도 어렵다. 정부가 뭘 어떻게 해야 한다기 보다는 검찰이 기소만 하면 되는 문제다. 수사해서 불기소처분을 한다, 무혐의가 났다고 하면 정부 차원에서 뭘 어떻게 해달라고 할 수 있을텐데 지금은 수사 차원에서 진행이 안되고 있다. 정부가 바뀌었으니 자신들의 조직 보위를 위해 (수사를) 하지 않을까 싶다.”

-백남기씨가 파면된 전 대통령 박근혜씨가 구속수감된 걸 보셨다면 뭐라고 하셨을까.

“잘 들어갔다고 하지 않았을까.”


▲ 고 백남기 농민의 장녀 백도라지 씨. 사진=이치열 기자 truth710@
▲ 고 백남기 농민의 장녀 백도라지 씨. 사진=이치열 기자 truth710@

-경찰의 수사권 독립 요구가 나오고 있다. 이를 의식한 것인지 경찰은 ‘인권경찰’이 되겠다는 입장을 밝히고 있는데 어떻게 보시나.

“(수사권 독립을 계기로) 사과하지 않을까 했는데 청문감사보고서를 안 내놓겠다고 하는 걸 보니 아직 정신 못 차린 것 같다. (인권경찰 얘기도) 반쪽짜리 제스처라고 생각한다. 경찰이 저희 아버지 사건 수사 관련해서 최대한 협조하면서 인권경찰로 거듭난다는 제스처도 하면 진정성이 있겠지만, 겉으로 내세우는 것만 인권경찰되겠다고 하는건데 이건 얼마든지 쉽게 할 수 있다. (저희 입장에서) 경찰 개혁되는건 부차적인 문제고, 빨리 수사가 돼야 하는게 중요하다.

아버지 사건 뿐만아니라 다른 시위 진압 등에도 경찰이 연관돼있고 경찰의 물리력을 통제 안하고 있는데 수사권까지 가져가겠다는 건 받아들이기 어렵다. 유신시대에 경찰에 끌려가 고문당하고 했던 것 생각하면, 경찰이 수사권까지 가져가는 건 너무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궁극적으로 인권경찰이 되려면 경찰 조직이 권력자에게 충성하는 그런 체질을 바꿔야 한다.”

-백남기 농민이 마지막으로 심었던 밀은 어떻게 됐나.

“지금은 가족들이 아니라 가톨릭농민회에서 도맡아서 농사를 짓고 있다. 지난해 추수했고 다시 심어서 곧 수확을 앞두고 있다. 수확량이 많진 않았지만 그때 심은 밀로 밀가루도 만들었다.”

-계속 이어지고 있는 싸움들로 힘들진 않으신지.

“가릴 처지가 아니다. 문제 해결이 중요하다. 힘들어도 어쩌겠나. 여기서 제가 포기하면 누가 하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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