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그룹 뇌물공여 국정농단’ 사건 공판기일에만 볼 수 있는 풍경이 있다. 밤 시간 서울법원종합청사 정문 계단 아래 밀집되는 ‘고급 세단 무리’다. 에쿠스, 체어맨 등 고급 세단 열 서너대가 붉은 색 전조등을 환하게 켠 채 차주를 기다린다. 차 옆엔 운전기사들이 서 있다. 재판을 마치고 나온 삼성그룹 임원 등을 기다리는 차량이다.

삼성그룹 컨트롤타워 격인 미래전략실(현재 해체) 간부들은 삼성 뇌물 재판의 ‘개근 방청객’이다. 이수형 전 기획팀장(부사장), 성열우 전 법무팀장(부사장), 김종중 전 전략팀장(사장) 등 미전실 임원 퇴직자 대여섯명은 거의 빠짐없이 법정을 찾는다. 이인용 삼성전자 커뮤니케이션팀장을 비롯해 삼성전자 법무팀장·감사팀장·금융팀장 등 계열사 임원들, 홍보담당 직원들도 재판을 방청한다. 퇴사한 전직 임원이 재판을 방청하기도 한다.

대법정 150석, 누가 매일 이재용을 찾나

‘일반 시민 개근 방청객’도 최소 10명이 더 있다. 지역 주민, 대학생, 해고노동자, 삼성 계열사 고발인 등으로, 법정을 찾는 이유가 가지각색이다.

▲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5월25일 오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린 뇌물공여 혐의 관련 18회 공판에 출석하며 가벼운 미소를 짓고 있다.ⓒ민중의소리
▲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5월25일 오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린 뇌물공여 혐의 관련 18회 공판에 출석하며 가벼운 미소를 짓고 있다.ⓒ민중의소리

강남구 주민이라 밝힌 A·B씨는 “이재용 부회장이 억울해 보인다. 내용을 알고 싶어 재판을 찾는다”며 “변호인단의 말을 들으니 점점 확신이 생긴다”고 말했다. 서울시민이라 밝힌 중년여성 김아무개씨는 “시간도 되고 재판에 관심이 많아 오고 있다”면서 “삼성은 국가를 살린 기업인데 이건 애국이 아니”라고 말했다.

삼성그룹의 피해자라고 밝히는 시민들도 있다. 이만신씨는 1987년 입사한 삼성SDI에서 “그때 노동조합을 만드려다 계속해서 표적 괴롭힘을 받았고 2012년 쯤 해고됐다”며 “삼성 쪽 회사 내부를 내가 아는데, 변호인이 말한 기안서, 계약 과정 관련 내용은 모두 엉터리 주장”이라고 말했다. 변호인단은 삼성전자가 ‘정유라 승마 지원’을 위해 올린 내부 기안서 등이 규칙에 따라 적법하게 결재된 것이며 해당 용역계약도 일반적인 계약과 다를 바 없다고 주장한 바 있다.

‘삼성증권 주식 조작’ 피해자라 주장하는 김아무개씨, “(뇌물 사건) 내막을 알고 싶다”는 서울 주민 C씨, 서울 소재 대학 법학과에 다니는 20대 여성 김아무개씨 등도 매일같이 법정을 찾고 있다. 삼성 측과 법률자문 계약을 맺은 바 있는 김앤장 법률사무소 변호사가 참관해 노트북으로 심리 내용을 기록하기도 한다.

법정 소란도 때때로 발생했다. 지난 3월9일 1회 공판준비기일에는 60대 중반의 한 여성이 변호인의 변론을 참지못하고 일어나 “재판장님, 퇴장당할 거 각오하고 말합니다” “한마디만 하고 나갈게요”라 소리쳐 재판부의 제지를 받았다.

5월19일엔 삼성전자 반도체·LCD공장 직업병 피해자들이 법정을 찾았다. 고 황유미씨의 부친 황상기씨와 뇌종양을 앓고 있는 한혜경씨 및 한씨의 모친 김시녀씨는 오전 재판이 끝난 후 법정 문 밖으로 나오는 장충기 전 사장(불구속 기소)을 향해 “당신이 사람이냐” “유미 치료해 줄 돈으로, 한혜경 치료해줄 돈 가지고 최순실·정유라 몇 백 억씩 갖다줬냐”라고 외쳤다. 황씨와 김씨는 곧장 법원 경비 및 삼성 측 직원들의 제지를 받았고 장 전 사장은 법정으로 다시 들어갔다.

이들은 지난 24일에도 ‘피고인 임원들의 대답을 듣기 위해’ 법정을 찾았다. 김씨는 오전 재판이 끝난 후 법정을 나가는 이재용 부회장에게 “말 좀 해보세요”라고 소리치며 ‘삼성 직업병 해결하라’가 적힌 A4용지를 들이밀었다. 피해자들과 ‘반도체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지킴이’ 반올림 활동가들은 법정 밖에서 “빨리 나와보세요”라며 삼성 측 임원들을 기다렸다. 이들은 일반인이 이용하는 문이 아닌 피고인, 검사 등이 이용하는 문으로 법정을 빠져나갔다.

퇴직한 미전실 간부, 주 3회 7시30분 법원 출근 도장

방청객들은 오전 7시30분 경부터 법원을 찾는다. 삼성그룹 임원들이 가장 빠르다. 매일 법정을 찾는 삼성 측 관계자는 “임원들은 법원에 7시30분 경에 나온다. 원래 출근 시간이 6시30분이었던 것에 비하면 늦은 시각”이라면서 “제1회 공판엔 새벽 6시부터 대기했다”고 말했다. 제1회 공판은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피고인의 공판 출석 의무에 따라 구속 후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낸 재판이었다.

▲ 삼성전자 LCD공장에서 일하다 뇌종양을 앓고 있는 직업병 피해자 한혜경씨가 19일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삼성그룹 뇌물공여 재판 제16회 공판 방청을 위해 대기하고 있다. 사진=손가영 기자
▲ 삼성전자 LCD공장에서 일하다 뇌종양을 앓고 있는 직업병 피해자 한혜경씨가 19일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삼성그룹 뇌물공여 재판 제16회 공판 방청을 위해 대기하고 있다. 사진=손가영 기자

방청객들은 도착한 순서대로 대법정으로 향하는 ‘5번 출입구’ 앞에 선다. 법정 출입구는 오전 9시30분에 열려 선착순으로 ‘방청권’이 배부된다. 서울중앙지법이 방청 경쟁률을 고려해 지난 1월 최순실씨 국정농단 사건 재판 때부터 채택한 선착순 배부 방식이다. 오전 9시가 되기 전부터 40~50명의 인원이 한 줄로 선다. 가방으로 대기 자리를 맡아 놔 십수개 가방이 일렬로 정렬되는 풍경도 자주 볼 수 있다.

4월 초까지 150석 만석이 돼던 법정은 4월 중순을 지나며 40~50석 정도가 비기 시작했다. 전직 대통령 박근혜씨에게 대법정을 넘겨 준 날에는 34석 규모의 소법정에서 재판이 열린다. 이런 날엔 자리를 잡지 못한 사건관계인·기자 10여 명이 서서 8시간이 넘는 재판을 방청했다.

“데스크가 ‘삼성에서 산업부 취재를 요구한다’ 하더라”

삼성그룹을 출입하는 산업부 기자들도 재판을 챙기고 있다. 공판준비기일이 열린 3월 초부터 4월 초까진 기자석 45석이 법조 출입기자와 사회부 기자로 빼곡히 들어찼으나 4월 초가 지나면서 산업부 기자들의 비중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재판 초기 삼성 뇌물 재판을 취재하던 법조 기자 A씨는 “나는 산업부와 기사를 두고 ‘누가 맞냐’고 싸우다가 이재용 재판에서 손을 뗐다”고 말했다. A씨는 “처음에는 데스크가 ‘삼성에서 산업부 취재를 요구한다’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기사를 그쪽에서 쓴다면 우리가 뭐하러 가겠습니까’라 하니 ‘수익 때문에 그렇다’고 하더라”면서 “‘수익 때문에 삼성이 이렇게 쓰라면 이러고 저렇게 쓰라면 저러냐’ ‘삼성이 데스크냐’고 항의했다. 이 문제로 잠깐 회사에서 말이 많았다”고 말했다.

A씨는 자사 산업부 기자의 전언이라며 “삼성 측에서 아무래도 법조 기자들이 특검 위주로 기사를 쓰는 게 있다 보니, 불리하게 기사가 나갈 수 있으니 산업부 데스크에게 ‘산업부가 챙겨주면 좋겠다’고 말했다고 한다”면서 ”모 매체 산업부는 전체 2명 밖에 안되는데 매번 그 재판을 가서 대기하거나 일부 경제지 경우 3~4명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는 얘기도 들었다“고 말했다.

▲ 5월12일 한국경제 33면
▲ 5월12일 한국경제 33면

일부 매체 산업부 및 경제부 기사는 ‘특검에게 증거가 없다’는 논조를 보이고 있다. ‘삼성이 공정위에 외압 가했다는 특검, 삼성 무죄만 입증해’, ‘삼성물산 합병 반대한 보고서, 오류투성이로’, ‘진위여부는 어디로? 뇌물없는 뇌물재판증인들의 오락가락 진술’, ‘삼성 측 "'이재용 재판'에 이재용이 없다"’ 등이 관련 기사 제목이다.

‘매머드급’ 변호인… 공식 수만 22명, 비공식 조력자 규모 상당할 것

방청석 가장 첫 줄은 삼성 변호인단 등 사건관계인의 자리다. 변호인, 삼성임원 등은 보통 1~3번째 줄을 차지한다. 5월30일 기준 삼성 측 변호인은 공식적인 수만 22명에 달한다. 법무법인 태평양 소속 변호사 19명, 기업 소송 전문 법무법인 기현의 이현철·정한진 변호사, 김종훈 변호사가 선임계를 제출했다. 지난 3월 12명이던 변호인단은 4월 말 태평양 변호사 2명과 기현 변호사 2명이 추가돼 16명으로 늘었다. 지난 19일 자로 태평양 변호사 6명이 담당 변호사로 추가 지정돼 총 22명 규모의 ‘매머드급’ 변호인단이 구성됐다.

비공식적인 조력자 규모는 아직 파악되지 않았다. 지난 5월17일 시사저널은 “이종왕 전 대검 수사기획관(검사장급)이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최순실 게이트 재판’ 변호팀을 막후에서 지원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며 “주 세 차례씩 서울 서초동 삼성전자 사옥에서 사내 법무팀과 법무법인 태평양 소속 변호사들을 모아 놓고 대책회의를 갖는 등 사실상 컨트롤 타워 역할을 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고 보도했다. 여기에 삼성 계열사 법무팀의 지원도 배제할 수 없다.

20회 공판 기일 동안 특검 측에선 양재식 특검보, 윤석열 전 특검 수사팀장, 김영철·문지석·박주성·조상원 검사 등이 출석했다. 검사석엔 보통 검사 3~4명이 착석하고 맞은편 피고인 석엔 피고인 5인을 비롯해 변호사 12~13명이 앉는다.

새벽 2시 퇴근하는 ‘이재용 재판’ 재판부·검사·변호인·방청객

‘밤샘 재판’은 국정농단 혐의자 중 이재용 부회장 재판에서만 볼 수 있다. 지난 5월29일 오후 2시에 시작한 20회 공판은 다음날 새벽 2시에 마쳤다. 지난 5월19일 오후 2시에 시작한 19회 공판은 다음날 새벽 1시에 마쳤다. 30일 자정을 막 넘긴 시각, 부장판사를 비롯한 좌우 배석판사, 좌측의 검사들, 우측의 변호인들, 법원 직원들까지 고개를 푹 숙이거나 하품을 참지 못하며 피곤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삼성 뇌물 재판은 지난 29일 재판을 기점으로 20회를 채웠다. 지난 3월9일 제1회 공판준비기일부터 제20회 공판기일까지 진행된 재판 시간을 합치면 189시간 24분, 즉 190여 시간에 달한다. 1주일에 1~2차례 열리던 공판은 신속한 재판 진행을 위해 지난 4월19일부터 3~4차례 열리고 있다.

저작권자 © 미디어오늘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