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작가 토리야마 아키라의 작품 ‘드래곤볼’에는 ‘정신과 시간의 방’이라는 공간이 나온다. 밖에서 1일이 여기서는 1년이다. 손오공을 비롯한 등장인물들은 자신보다 더 강한 ‘악당’을 상대하기 위해 이 방에 들어가 수련을 한다. 지구의 10배에 달하는 중력을 버티며 ‘1일 수련’을 마친 인물들은 엄청나게 강해져 돌아온다.

문재인 정부가 들어선지 20여 일, 청와대의 시간은 마치 ‘정신과 시간의 방’처럼 흘렀다. 3개월이 지나간 느낌이다. 출입기자들이 있는 춘추관은 매일매일 들썩였다. 그 전에는 1년에 한 번 볼까말까 했던 대통령이 벌써 두 번이나 직접 브리핑 하러 나타났다. 그 전에는 질문 한 번 하기 어려웠는데, 이제는 대통령이 먼저 “질문 있습니까?”하고 묻는다. 질문 못 한다고 욕먹던 기자들은 이제 ‘제대로’ 질문하지 못하면 욕을 먹게 됐다.

조국, 김상조, 강경화, 장하성 등 파격적인 인사 발표가 계속됐다. 서울중앙지검장에 국정원 댓글 수사와, 최순실-박근혜 특검이었던 윤석열 검사를 임명했을 때는 기자들 사이에서도 탄성이 나왔다. 사람들은 한국판 ‘웨스트윙’ (백악관 서쪽 건물로 대통령과 참모들의 사무실이 있는 곳, 유명 미국 정치 드라마 제목)을 보는 것 같다고 했지만, 기자들에게는 ‘인터스텔라’였다. 평소 살던 곳과는 전혀 다른 행성에 온 것 같은 기분이랄까?

인사뿐 아니다. 대통령의 행보도 거침없었다. 취임 후 첫 현장으로 인천공항을 방문해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를 강조했다. 이어 국정교과서 폐지, 세월호 희생자 기간제 교사의 순직 인정, 5·18 진상조사를 약속한 기념사까지 ‘파격적’이라고만 하기에는 설명이 부족하다. 솔직히 5·18 기념사를 듣고는 눈물을 조금 흘렸다. 이 정도라면 ‘허니문’이 아니라 ‘금혼식’이라도 올릴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다.

격식을 깨고 권위를 내려놓은 대통령의 모습을 놓고는 ‘파파미(파도 파도 미담)’라는 말까지 생겼다고 한다. 공식행사를 제외한 식사는 자비로 지출하고, 그렇게 특수활동비를 아낀 돈으로 청년 일자리를 지원 한다고 한다. 한동안 쏟아졌던 미담이 이제 좀 그치나 싶었는데, 10여 년 전 노무현 전 대통령의 민정수석으로 있을 때 썼던 원탁까지 찾아 대통령 집무실에 놓고 재활용 한단다. 이제는 하루라도 미담기사를 쓰지 않는 게 어색할 지경이다.

대통령이 워낙 ‘잘’ 하다 보니 문제가 좀 생겼다. 감시와 비판을 숙명으로 하는 기자로서 전투력이 딸리는 느낌이다. 남들이 박수칠 때 같이 박수만 칠 수 없는 게 기자이지 않는가. 그렇다고 해서 대충 그럴싸하게 비판하는 기사를 쓸 수도 없다. 독자들은 이제 기사를 일방적으로 수용하지 않는다. 그동안 너무 쉽게 취재하고 쉽게 기사를 썼다. ‘악당’은 아니지만 대통령과 독자, 기자가 상대해야 할 대상이 이전보다 훨씬 막강해졌다.

▲ 최지용 오마이뉴스 기자
▲ 최지용 오마이뉴스 기자
그래서 기자도 수련해야 한다. 대통령의 지지자들을 비난하고 있을 여유가 없다. 누구를 가르치려고 기자가 된 게 아니다. ‘나는 잘 했는데 억울하다’ 항변 할 이유도 없다. 언제 칭찬 듣자고 기자가 됐던가. 이전 정부가 국민에게 최악이었다면 이번 정부는 언론에게 최악이 될 가능성이 크다. 이전 정부는 아부하기도, 비판하기도 쉬웠다면 이번 정부는 아부도 비판도 쉽지 않은 상대다. 이왕 ‘정신과 시간의 방’에 들어왔다면 더 강해져 돌아가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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