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부들에게 묻는다. 당신들은 왜 그 자리에 남아 있는가.” 지난 26일 10년차~20년차 미만 KBS 기자 215명이 기명성명을 내고 고대영 KBS사장의 퇴진을 요구했다. 같은 날 KBS 제작본부 TV프로덕션4 소속 PD 36명은 오늘부터 고대영 사장의 지시를 거부하겠다고 밝혔다. 앞서 24일에는 20년차 이상 기자 71명이 기명성명을 내고 사퇴를 요구하고 나섰다. 문재인정부 출범과 YTN 조준희 사장의 사임 이후 KBS내부에서 ‘언론적폐청산’을 위한 투쟁이 본격화되고 있다. 투쟁의 중심에 있는 성재호 전국언론노조 KBS본부장을 29일 만나 KBS분위기와 향후 투쟁방향 등을 물었다. 그는 20년차 KBS기자이기도 하다.

▲ 성재호 언론노조 KBS본부장. 사진=이치열 기자
▲ 성재호 언론노조 KBS본부장. 사진=이치열 기자
- 신뢰도나 영향력 등 각종 지표에서 JTBC에 밀리고 있다. 구성원들이 위기감을 느끼나.

“위기감이 아니라 자괴감 수준까지 왔다. 많은 지표들이 고대영-이인호 체제에서 일제히 하락했다. 특히 최순실-박근혜 국정농단 이후 곤두박질쳤다. 많은 지표들이 JTBC로 몰리기 시작했다. 지금은 ‘연예가중계’에 세월호 리본만 달아도 문제가 된다. 아이디어 싸움을 해야 하는데 (경영진은) 이것저것 하지 말라고 검열만 주입한다. 뉴스부분에서는 이미 9년간의 자기검열이 적폐로 쌓여 보도로 나타나고 있다. 다시 과거로 돌아갈 수 있을까라는 전망에 대한 불투명까지 있다. 하지만 포기할 단계는 아니다. JTBC는 2014년 세월호 보도의 진정성을 바탕으로 2016년 국정농단 보도에서 빛을 발휘했다. KBS에는 여전히 역량 있는 기자·PD들이 있다. 그들이 제대로 실력을 발휘할 수 있다면 KBS의 진정성도 시청자들이 알아주실 거라 믿고 있다.”

- 고대영 사장 퇴진을 요구하는 기명성명이 잇따라 등장하고 있다. 3년 전 길환영 사장 퇴진 당시와 지금을 비교했을 때 분위기가 비슷한가.

“당시는 단발적인 이슈였다. 청와대의 KBS 방송통제 문제가 세월호참사라는 특정사건과 맞물려 폭발력을 갖게 됐다. 길환영 사장이 청와대 대리인으로서 적극 보도에 개입한 정황이 드러나며 사장퇴진 공감대가 급속히 확산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부적으로 정권의 통제 하에 공영방송이 움직이는 구조 자체가 그대로 존속됐다. 길환영이라는 대리인에 대한 청산만 불거졌던 상황이라 애초부처 근본적 변화에는 한계가 있었다. 지배구조를 바꾸기엔 너무 힘들었던 짧은 봄이었다.”

- 3년 전과 달라진 점이 있다면.

“공영방송을 통제했던 정치권력이 퇴출됐다. 새로운 정부는 두고 봐야겠지만 쉽게 언론을 통제하려고 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밖은 변했지만 안은 그대로다. 고대영-이인호 체제는 몇 번씩 물러나도 남을 만큼 형편없는 성적을 받아왔다. 고대영-이인호 체제 청산을 위한 스모킹 건이 필요한 상황이다. 촉발지점을 찾아야 한다. 우리가 이슈파이팅을 해서 그들이 물러날 수밖에 없는 조건을 만들어나가야 한다는 공감대가 있다.”

- 고대영-이인호 체제 청산을 위해 무엇을 준비 중인가.

“봇물처럼 터져 나오고 있는 내부의 퇴진요구를 하나의 목소리로 담아낼 계획이다. 절대다수가 고대영-이인호 체제 해체를 요구하고 있다. 지금 당장, 구성원 전체를 대상으로 경영진의 신임을 묻는 조사를 진행할 계획이다. 객관적 평가지표를 갖고 협회와 양대 노조가 하나의 의견을 모아 기자회견을 가질 계획이다. 아마 사장과 이사회에게 용단을 촉구하게 될 것이다. 만약 KBS 구성원들이 한 목소리로 의견을 전달했는데 요구사항에 대해 무시하거나 거부한다면 특단의 방법에 나설 수밖에 없다. 모든 수단을 동원할 수밖에 없다. 구체제를 더 이상 끌고 갈 수 없다.”

- 제작거부나 양대 노조 공동파업도 가능한 분위기인가.

“우리는 지난해부터 고대영-이인호 체제의 퇴진을 주장해왔는데, 대선 전후로 퇴진을 요구하는 목소리들이 봇물처럼 터져 나오고 있다. 시작은 기자 집단이었다. 고대영 사장이 기자 집단이란 친정세력을 바탕으로 세워진 체제이기 때문에 기자들이 먼저 반성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10~20년차 기자들의 기명성명에 이어 곧 1~10년차 기자들의 기명성명도 나올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다른 직능단체에서도 동참해줄 것으로 보인다. KBS노동조합도 여기에 한 목소리로 참여해줄 것이라 기대하고 있다.”

▲ 2017년 3월14일 민주당 대선후보경선TV토론회 당시 문재인 후보가 KBS 본관에 들어서기 전 언론노조 성재호 KBS본부장이 공영방송 독립에 대한 내용을 TV토론에서 다뤄줄 것을 요청하고 있는 모습. ⓒ이치열 기자
▲ 2017년 3월14일 민주당 대선후보경선TV토론회 당시 문재인 후보가 KBS 본관에 들어서기 전 언론노조 성재호 KBS본부장이 공영방송 독립에 대한 내용을 TV토론에서 다뤄줄 것을 요청하고 있는 모습. ⓒ이치열 기자
- KBS 구성원들은 고대영-이인호 체제 퇴진을 통해 무엇을 얻고자 하나.

“국민신뢰를 얻기 위한 적폐청산이다. 적폐청산은 누구에게 특정한 불이익을 주자는 것이 아니다. 이명박·박근혜 정권에서 불공정방송을 담당했던 자에 대한 상징적 조치가 필요하다. 우리 조직이 전체적으로 반성할 수 있게끔 명확한 평가가 필요하다는 의미다. 적폐청산을 통해 신뢰도를 올리는 것이 급선무다. 청와대가 어떻게 KBS보도와 제작 자율성을 농단했는지 사회적인 진상규명이 필요하다. 국정조사가 안 된다면 정부차원의 조사가 필요하다.”

- KBS 내부의 언론적폐는 어떤 기준으로 규정하고, 청산작업은 어떻게 진행할 생각인가.

“언론적폐란 표현은 광범위하고 모호하다. 범위를 분명히 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일부 몇 사람이 정할 수 없는 작업이다. 오랜 토론과 조사가 필요하다. 우선 지난 9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록하고 정리하는 백서 작업이 필요하다. 그동안 방송편성규약이 왜 지켜지지 않았는지, 방송장악 대리인들이 게시판에 항의할 권리조차 빼앗았던 사례까지 모두 정리해야 한다. 기자의 양심과 제작 자율성 침해가 어떻게 구체적으로 이뤄졌는지도 기록해야 한다. 이 같은 노력은 KBS노사와 시청자가 함께하는 범 KBS차원의 기구에서 함께 이뤄져야 한다. 부역자 청산을 위해 당시 편집국장이 누구였는지, 지시했던 간부가 누구였는지 다 기록해야 한다. KBS 도청 논란도 재조사해야 한다.”

- 새 정부에서 KBS사장 임명방식은 어떻게 달라져야 하나.

“(국회에 계류 중인) 여야 추천 이사 7대6 특별 다수제 방식이 진일보한 것일 수 있으나 여야 정당이 추천한 이사들이 줄다리기 속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장을 뽑을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KBS의 모든 사안을 정치권에서 결정하게 된다는 우려도 있다. 그래서 KBS이사회 내에 수신료를 내는 시청자가 참여하고 공영방송을 이끄는 구성원이 참여하는 사장추천위원회를 두는 것이 바람직하다. 시청자·구성원·이사회 3자가 조화를 이뤄야 한다. 사추위에서 단수든 복수든 사장 후보자를 추천한 뒤 이사회가 결정하는 구조로 바뀌어야 한다.”

- 새 정부에서 수신료 인상 논의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나.

“사회적으로 진지하게 논의해야 하지만 지금이 때는 아니다. KBS가 변화를 시작했을 때, 그 이후에 논의되어야 한다. 수신료는 단순히 KBS를 유지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급변하는 미디어환경에서 시청자들에게 자본이나 권력에 휘둘리지 않는 프로그램과 뉴스를 흔들림 없이 보여주기 위해 받는 것이다. 무엇보다 수신료 인상 논의는 정부가 아니라 시민사회에서 주도하는 것이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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