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그룹의 ‘부정청탁’ 정황을 증언할 것으로 기대된 공정거래위원회 고위직 출신이 “기억이 안 난다”는 모르쇠로 일관했다. 특히 청탁 사안이 “공정위 중요 현안”이라면서도 “나는 관심이 없어 모른다”는 모순된 태도를 보여 진술의 신빙성에 의문을 더했다.

김학현 전 공정위 부위원장(현 단국대 초빙교수는 )은 지난 26일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17부(김진동 부장판사) 심리로 열린 ‘삼성 뇌물 재판’ 제19회 공판에 오후 증인으로 출석했다.

공정위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뇌물공여 혐의를 조준한 박영수 특별검사팀의 주요 수사대상이었다. 공정위는 ‘삼성그룹 신규 순환출자고리 해소’ 현안과 관련해 2015년 10월14일 위원장 결재까지 완료된 ‘1000만 주 처분’ 방침을 뒤집고, 12월23일 삼성 측이 희망했던 ‘500만 주 처분’으로 결정을 번복했다. 공정위는 이례적으로 결정을 번복하면서까지 삼성 측에 유리한 결정을 내렸다는 의혹에 휩싸인 바 있다.

▲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5월25일 오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린 뇌물공여 혐의 관련 18회 공판에 출석하며 가벼운 미소를 짓고 있다.ⓒ민중의소리
▲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5월25일 오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린 뇌물공여 혐의 관련 18회 공판에 출석하며 가벼운 미소를 짓고 있다.ⓒ민중의소리

김 전 부위원장은 결정 번복을 주도한 공정위 간부다. 그는 결정을 번복한 시점에 각각 김종중 삼성그룹 전 미전실 팀장(사장급)을 만났고 최상목 전 청와대 경제금융비서관(현 기획재정부 차관)과 집중적으로 통화했다.

김 전 부위원장은 11월18일 ‘1000만 주 처분안’ 재검토를 지시한 이유는 “오류가 있는 결정을 바로잡으려 했던 공정위 공무원으로서의 소신”이라고 밝혔다. 자신의 결정 번복이 삼성그룹의 부정청탁과 청와대 측의 외압행사에 따른 것이 아니라는 주장이다.

‘10월14일 자신이 결재한 1000만 주 처분안을 왜 한 달 뒤에서야 갑자기 번복했느냐’는 질문에 그는 “당시 신규 순환출자문제에 관심이 없어 잘 몰랐다”고 답했다.

그는 “창피한 말이지만, 내가 결재를 한 것이지만 결재를 한 사실도 기억이 잘 안난다”며 “실무자가 가져온 요약보고서를 보니 크게 틀리지 않아 보여 문제를 깊이 들여다보지 않았다”고 말했다.

특검 측 박주성 검사는 “부위원장 취임 후 기사 스크랩을 매일 아침 보고 받지 않느냐”면서 “부위원장으로서 증인이 직접 결재한 보고서다. 6월에 기사가 난 문제고, 증인이 직접 이 문제는 한 기업에 대한 것일 뿐만 아니라 향후 가이드라인이 되는 것이어서 매우 중요한 사안임을 알고 있었다고 인정했는데 관심이 없었단 말이 납득이 안된다”고 말했다. 박 검사는 2015년 6월9일 한겨레의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땐 ‘신규 순환출자 금지’ 적용받을 수도"라는 제목의 기사를 제시했다.

김 전 부위원장은 ‘다른 건의 경우에도 관심없는 내용은 잘 안 보고 결재할 때가 자주 있느냐’는 특검 측 질문에 “많지 않다”고 답했다.

특검 측은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이 성사된 2015년 7월17일 김 전 부위원장이 “합병 건은 아무리 봐도 삼성물산 주주들 스스로 이재용한테 부를 이전하는 느낌이다. 이재용의 삼성그룹 승계를 위해 기꺼이 희생했거나 속았다”는 내용의 카카오톡을 지인들에게 보낸 자료를 제시했다.

그는 “증인은 이 당시부터 합병에 관심이 있었던 것 같은데, 관심이 없었단 것은 납득이 안간다”는 특검 측 질문에 그는 “합병에는 관심많았지만 순환출자에는 관심이 없었다”고 해명했다.

그는 당시 실무자가 보고하거나 삼성 및 청와대 경제수석실로부터 전달받은 다수 자료 문건에 대해서도 “관심이 없어서 모른다”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식의 태도를 취했다.

‘부정청탁’ 정황 드러날 질문에 “모른다” “기억 안 난다”

그는 이후 12월 한 차례 더 결정을 번복한 정황에 대해서도 ‘공무원으로서의 소신’을 강조했다. 공정위는 김 전 부위원장의 요구로 삼성물산의 처분 주식 기준을 정하는 문제를 12월16일 공정위 전원회의에 올렸다. 처분 주식수는 1000만 주에서 900만 주로 축소됐다.

김 전 위원장은 6일 가량 후인 22일 경, ‘900만 주 처분’ 결론이 담긴 보고서를 들고 간 사무관에게 ‘500만 주 처분 내용의 2안을 추가로 삽입해 다시 가져오라’고 지시했다.

특검은 이와 관련 김 전 부위원장이 최상목 전 경제금융비서관으로부터 청와대 의사를 전달받았다고 특정하고 있다.

특검은 관련자 진술조서에 따라 최 전 비서관이 11월17일엔 김 부위원장에게 전화해 ‘삼성 측이 불만이 있으니 잘 검토해달라’고, 12월21일엔 ‘500만 주만 처분하게 하라’는 취지로 의견을 전달했다고 보고 있다. 특검은 12월22일 안 전 수석으로부터 ‘위원장에게 빨리 500만 주 결정하게 해라’는 지시를 받은 최 전 비서관은 김 부위원장에게 “안종범 수석이 아주 역정을 낸다. 상황이 좋지 않다. 형님이 위원장님께 2안(500만 주 처분)으로 결정할 수 있도록 설득해달라”고 압박했다고 특정했다.

▲ 최지성 전 삼성 미래전략실장이 25일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에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에 대한 18차 공판에 출석하고 있다.ⓒ민중의소리
▲ 최지성 전 삼성 미래전략실장이 25일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에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에 대한 18차 공판에 출석하고 있다.ⓒ민중의소리

김 전 부위원장은 통화내역을 제시하는 특검에 전화통화 내용 대부분이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답했다. 특검은 11월24일 네 차례 통화기록, 11월27일 네 차례 통화 기록, 12월9·12일 기록, 12월22일 아홉 차례 통화·문자전송 기록 등을 공개했다.

김 전 부위원장은 부정청탁 정황이 직간접적으로 드러난 진술은 일체 부인하기도 했다. 그는 특검 조사에서 김종중 전 사장이 11월17일 ‘공정위는 자꾸 주식 팔아야 한다고 하는데 로펌 의견을 들어보면 공정거래법 상 신규 순환출자고리 금지 적용 제외 대상에 해당한다고 한다. 로펌이 얘기하기를 주식 매각 명령을 내리면 재판에 갈 수 있고 그럼 우리가 승소할 수 있다. 공정위가 삼성과 소송할 필요가 뭐가 있느냐’는 취지로 말했다고 진술했다.

그러나 그는 법정에서 “김종중 사장이 여러가지 불만을 얘기했지만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답했다.

그는 최 전 비서관에게 마지막 결재 보고서에 500만 주 처분이 결론인 안을 보고했고 최 전 비서관과 관련 논의를 했다고 언급한 특검에서의 진술도 부인했다.

김학현 “특검이 자의적으로 조서 작성” vs 특검 “이 표현이 조작 가능하냐”

김 전 부위원장은 최 전 비서관으로부터 ‘삼성이 종전 검토 결과에 부정적이니 제대로 검토해달라’는 말을 들었다는 진술에 대해서는 “그런 말 들은 적이 없다”면서 “검사가 ‘저렇게 해야 앞뒤가 맞는다’고 계속 얘기해 ‘추측했다’로 기재하자고 합의한 후 넘어간 것”이라 부인했다.

김 전 부위원장은 특검 조사에서 최 전 비서관으로부터 12월22일 ‘안 수석이 정채찬 공정위원장이 2안을 결정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역정을 낸다. 상황이 좋지 않다. 형님이 위원장께 2안을 결정할 수 있록 설득을 해달라'는 취지의 발언을 들었다고 진술했다. 그는 이에 대해서도 법정에서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내가 진술했다기 보다 검사가 그렇게 말했다”고 답했다.

당시 진술조서를 작성한 특검팀 조상원 검사가 “검사가 이 내용을 조작할 수 있다는 것이냐” “이 얘기를 누가 먼저 하셨느냐”고 반박하자 그는 “내가 먼저 말했지만 안종범 수석이 ‘2안’으로 해라고 했다는 게 기억 나지 않는다는 것”이라 해명했다.

김 전 부위원장이 최 전 비서관으로부터 ‘500만 주 처분안(2안)’에 대해 지시를 받았다면 이는 청와대의 부적절한 외압 행사 정황이 될 수 있다.

김 전 부위원장은 “안종범 수석이 ‘500만 주’ 안을 결정해놓고 최 전 비서관이 이를 관철하기 위해 증인에게 ‘빨리 결정하도록 위원장 설득해라’고 했다면 이거 잘못된 일이 아니냐”는 박 검사의 질문에 “잘못됐다 생각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지난 2015년 12월 공정위는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이 합병함에 따라 그룹 내 신규 순환출자고리가 형성된 문제에 대해 “삼성SDI가 삼성물산 지분 500만 주를 처분해야 한다”고 결정했다. 이는 불과 두 달 전인 10월14일 “삼성SDI와 삼성전기가 삼성물산 지분을 각 500만 주씩, 1000만 주를 처분해야 한다”는 결정을 번복한 것이다. ‘1000만 주 처분안’은 담당 과·국장, 사무처장, 부위원장을 거쳐 위원장 최종 결재까지 거친 내부 결정이었다.

처분 주식 수가 주목받은 이유는 처분 규모가 클수록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삼성물산에 행사할 수 있는 실질적 의결권이 줄어들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특검은 공정위가 1000만 주에서 500만 주로 결정을 번복하는 동안 김종중 미래전략실 전략팀장 등 삼성 관계자들은 공정위·청와대 고위직을 만나 ‘500만 주’로 결정해 줄 것을 요청했다고 파악하고 있다.

김 전 부위원장에 대한 증인 신문은 지난 26일 오후 2시 경 시작해 27일 새벽 1시 경에 끝났다. 

저작권자 © 미디어오늘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